지아니의 잊혀진 역사 속 인물 탐구

잊혀진 역사 속 인물 탐구에 대해서 글을 작성합니다.

  • 2025. 5. 14.

    by. 지아니13

    목차

      1. 조선 궁중 음식의 위상과 의미

      조선의 궁중 음식은 단지 배를 채우기 위한 식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의 권위와 위계, 예법과 상징이 담긴 일종의 ‘정치 행위’였다.
      왕이 먹는 수라상(御膳)은 하루 세 번, 계절과 절기에 맞춰 구성되었고,
      음식의 종류, 배치, 색상, 온도, 재료, 조리 방식까지 모두 엄격하게 규율되었다.

      이처럼 정교한 궁중 음식 문화의 핵심에는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이던 수많은 조리 인력,
      즉 ‘그림자 같은 요리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왕의 입’을 위한 음식을 만들면서도,
      자신의 이름을 한 줄조차 남기지 못한 존재들이었다.

      2. 수라간의 체계와 요리사의 역할 분담

      조선 왕실의 음식을 담당하는 공간, ‘수라간(御膳間)’은 단순한 부엌이 아니었다.
      그곳은 왕의 건강과 기분, 나아가 국정의 분위기까지 책임지는 정치적 주방이었으며,
      철저한 계급 질서와 분업 구조에 따라 운영되는 왕실 음식의 본산지였다.

      수라간은 단일 부서가 아니라, 복수의 ‘방(房)’으로 나뉜 조리 조직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방은 특정한 음식군을 전담했고, 그에 따라 요리사들의 역할도 정밀하게 분화되었다.

      수라간 내부의 주요 부속 조직

      조선 후기 기준, 수라간은 총 5~7개의 조리 공간으로 나뉘며,
      각각 담당하는 음식군이 명확히 정해져 있었다.

      • 소주방(小廚房): 밥, 죽, 국, 찌개 등 주식을 담당. 왕의 식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서.
      • 생과방(生菓房): 과일, 떡, 한과 등 후식류와 제례용 음식 조리. 설탕, 꿀, 견과류 사용 빈번.
      • 침방(沈房): 장류, 젓갈, 김치 등 저장 음식과 발효식품 담당. 전통 발효기술의 중심.
      • 전방(煎房): 부침개, 전, 지짐 등 구이와 기름 조리. 기름 온도 조절 기술이 핵심.
      • 정과방(正果房): 말린 과일, 조청, 잼, 다식 등 당류 가공식품 조리. 의례·진상품 제작에 필수.
      • 수라방: 왕의 상을 직접 차리는 마지막 주방. 완성된 음식을 모아 데우고 세팅함.

      각 방은 단순한 ‘부서’가 아니라 하나의 전통 기술 공동체였고,
      전통 조리법과 감각은 ‘몸으로 전수’되는 구조였다.

      계층별 요리사와 역할 구조

      수라간 내부에는 엄격한 계급과 역할 구분이 있었다.
      이 구조는 군대와도 유사할 만큼 상하관계가 뚜렷했고,
      요리사의 수직적 위계는 음식의 맛과 안전, 의례적 정합성을 보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상궁: 수라간 전체 운영 총괄. 주방장의 역할이자 조율자.
        왕의 입맛, 계절, 건강상태, 음식 기호를 파악하고 세부 지시를 내림.
      • 나인: 실질적인 조리를 담당하는 여성 종사자들.
        경력이 쌓이면 특정 방의 주임 역할을 맡기도 하며, 기술자 + 실무자의 중간 위치.
      • 별좌(別坐): 수라간 소속 남자 요리사.
        궁중에 특별 초대 손님이 올 경우 진지방(進饌房) 등에서 보조 역할.
      • 잡역 군인: 불 피우기, 물 긷기, 재료 운반 등 요리 외적 환경 담당.
      • 보조 하인: 설거지, 뒷정리, 음식 쓰레기 처리 등 ‘그림자 노동’을 수행.

      즉, 조선의 수라간은 하나의 요리만이 아닌 ‘조리 시스템’ 전체가 돌아가는 조직이었다.

      조리의 분업화와 ‘맛의 위계’

      왕의 수라는 ‘단일 요리사’가 만든 것이 아니다.
      밥을 짓는 사람, 국을 끓이는 사람, 전을 부치는 사람, 김치를 담그는 사람, 후식을 만드는 사람…
      수십 명의 손길이 모여 하나의 수라상이 완성된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개개인의 조리 능력도 중요하지만,
      타 부서와의 협업, 타이밍 조절, 온도 유지, 상차림의 균형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래서 상궁은 ‘요리하는 손’이 아니라 맛을 감별하고 조율하는 총감독이었다.

      왕이 음식의 온도, 간, 식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우,
      상궁은 해당 부서의 요리법을 조정하거나 교체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그만큼 **궁중 요리는 ‘기술’이 아닌 ‘지식과 감각의 복합체’**였고,
      그 중심에는 분업화된 수라간 체계와 그것을 움직인 사람들의 손이 있었다.

      음식을 넘어서 ‘조선 왕실의 시스템’을 유지한 공간

      수라간은 단순히 음식만 만드는 곳이 아니었다.
      그곳은 왕의 일상, 왕의 정치, 왕의 신체와 감정까지 관리하는
      조선 왕조의 핵심 실무 공간이었다.

      수라간이 실수하면
      왕은 병에 걸릴 수 있었고, 상중의 음식이 잘못 차려지면 예법 전체가 무너질 수 있었으며,
      왕비나 세자의 식사에서 오점이 생기면 왕실 권위에 흠이 갈 수 있는 중대한 사건으로 번질 수 있었다.

      이러한 중압감 속에서 수라간 요리사들은
      수십 년간 같은 조리법을 반복하면서도 항상 동일한 품질을 유지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이름은 감추고 오직 완성된 음식으로 존재를 증명해야 했다.

      왕의 밥상을 책임졌던 이들, 궁중 요리사들의 숨겨진 이야기

      3. 음식으로 섬긴 이들, 무명의 조리 장인들

      조선 왕실의 수라상은 단지 입맛을 위한 식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분, 정치, 건강, 의례를 아우르는 하나의 복합적 권력 상징이었다.
      그리고 그 복잡하고 정교한 음식 구조의 배후에는
      이름 없이 살아간 수십 명의 조리 장인들,
      즉 궁중 요리사들이 있었다.

      이들은 수라간과 그 하위 조직에서 매일같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왕과 왕실 가족의 하루 세 끼를 준비했다.
      단 하나의 실수도 허용되지 않는 조리 현장 속에서,
      음식은 완벽해야 했고, 사람은 조용해야 했다.

      매일 새벽 불을 지핀 손들

      궁중 요리사의 하루는 해가 뜨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왕이 아침 식사를 시작하기 전까지
      모든 재료 손질, 조리, 정리, 상차림이 완료되어야 했기 때문에
      새벽 2시~3시에 일어나 식자재를 준비하고 불을 지펴야 했다.

      당시에는 현대처럼 불의 온도를 조절할 수 있는 도구가 없었기에,
      장작불 하나로 온도를 섬세하게 맞추는 건 오랜 훈련이 필요했다.
      ‘국이 끓기 전 거품을 걷는 타이밍’,
      ‘전의 앞뒤를 뒤집는 정확한 온도’,
      ‘찜이 마르지 않도록 수분을 유지하는 방법’까지—
      모든 것이 오감과 경험에 의존한 기술이었다.

      그러나 정작 이 기술자들의 이름은
      어느 공식 문서에도 남아 있지 않다.

      오차 없는 정성과 절대 복종의 룰

      궁중 음식은 그 품질뿐 아니라
      정확한 수량과 규격, 식재료 배합의 비례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 잔칫날은 12첩,
      • 일상식은 9첩,
      • 특별한 날엔 15첩 이상 등
        요리 하나하나가 예법과 격식에 따라 배열되어야 했다.

      만약 음식을 담당한 나인이 잘못된 반찬을 올리거나,
      절기나 계절에 맞지 않는 재료를 사용하면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예법을 무너뜨린 중죄’**로 간주되었다.
      심한 경우 상궁은 직무 해임, 나인은 추방, 혹은 곤장을 맞는 벌을 받기도 했다.

      그만큼 이들이 감당해야 했던 책임은 무겁고,
      자유는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하지만 궁중 요리사는 그 모든 부담을 감내하며
      오직 ‘완벽한 밥상’을 만드는 데 집중해야 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더욱 투명했던 존재

      궁중 조리 인력의 대부분은 여성,
      그 중에서도 상궁, 나인, 별좌 등 하위 신분에 속한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직책이 있음에도 공식 문서에는 ‘조리 상궁’, ‘소주방 나인’ 등 직군만 표기될 뿐
      실명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유교 사회의 성별 위계 속에서
      ‘음식을 만드는 여성’은 오직 ‘보조자’ 혹은 ‘실무자’로만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음식이 아무리 맛있어도,
      그 공로는 ‘왕이 먹고 감탄했다’는 식으로만 기록되고,
      그것을 만든 이의 이름은 온전히 사라졌다.

      음식이 예술이 되지 못한 이유

      우리가 프랑스 요리의 ‘셰프’나 일본의 ‘이타마에’를 예술가로 기억하듯,
      조선에도 그에 못지않은 손기술과 감각을 지닌 요리사들이 수없이 존재했다.
      그러나 그들의 요리는 ‘기술’로만 평가되었고,
      ‘예술’로 기록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그들이 신분이 낮았고, 여성이며, 말 대신 손으로 일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록의 주체가 아니었고,
      그저 매일같이 밥을 짓고 국을 끓이는 그림자 같은 존재로 살아야 했다.

      그림자는 빛이 있어야 보인다.
      그러나 조선의 요리사들은
      빛 앞에 서는 일이 허락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존재는 사라졌는가?

      그렇지 않다.
      오늘날 우리가 ‘궁중 음식’이라 부르며 재현하고 배우는 모든 전통은
      사실상 이 이름 없는 요리 장인들의 손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의 방식, 그들의 순서, 그들의 손맛—
      모두가 현재에도 살아 있고,
      한국 음식 문화의 정수로 이어져 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의 이름을 복원하지 못하더라도,
      그들의 ‘존재’를 역사로 다시 끌어내는 일이다.

      **"누가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을
      비로소 던질 수 있을 때,
      우리는 궁중 음식의 진정한 뿌리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4. 상궁과 나인의 손끝에서 이어진 전통

      궁중 음식은 단지 맛있는 한 끼가 아니었다.
      그것은 세대를 거쳐 이어진 손의 기술이자, 한 국가의 문화유산이었으며,
      상궁과 나인의 손끝에서 만들어지고 지켜져온 무형의 지식 체계였다.

      이들은 단순한 조리자가 아니라,
      왕실 음식 전통의 기억자이자, 전승자였다.
      기록으로 남을 수 없었던 여성들이었지만,
      그들은 말 대신 손으로 지식을 남겼고,
      종이에 적을 수 없던 감각을 몸으로 전수했다.

      ‘상궁’이라는 이름, 단지 높은 직급이 아니었다

      상궁은 궁중 여성 직책 중 상위 계급에 속했지만,
      단순히 권위적인 감시자가 아닌,
      수라간 전체의 품질을 조율하는 음식감독자이자 교육자였다.

      • 왕의 체질과 취향 파악
      • 계절별 재료 선정
      • 절기와 의례에 따른 상차림 변경
      • 각 방(생과방, 소주방 등)과의 협업 및 품질 점검
      • 실무 나인에 대한 기술 교육과 평가

      그녀는 음식의 품질뿐 아니라 음식이 왕실의 위상에 걸맞게 기능하도록 조율했고,
      실수는 개인의 잘못이 아닌, 수라간 전체의 책임으로 간주될 수 있었기 때문에
      탁월한 리더십과 미각, 훈련된 감각, 외교적 조정 능력까지 갖춰야 했다.

      나인의 역할: 기술과 인내의 총합

      ‘나인’이라 하면 조선 시대 여성이 왕실에서 시중드는 존재로 알려져 있지만,
      수라간의 나인은 단순한 종이 아니었다.
      그들은 수년간 음식만을 익히고 조리하는 전문 기술자였으며,
      각자의 손길로 수백 년 궁중 음식의 전통을 이어온 현장 전승자였다.

      실제로 조선 궁궐 내에는

      • 음식 담당 나인,
      • 장(醬) 담당 나인,
      • 김치 담당 나인,
      • 전(煎) 담당 나인,
        등 세분화된 역할이 존재했고,
        각 나인은 자신의 담당 영역에서 숙련되기까지 1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이들은 신분상으로 승진이나 사회적 명예를 얻을 수 없었지만,
      왕실의 맛을 유지하는 데 있어 절대적인 존재였다.

      궁중 요리의 전통은 어떻게 전해졌을까?

      궁중 요리는 기술이면서 동시에 감각이었다.
      그래서 기록보다는 “보고, 듣고, 따라 하는” 방식으로 전수되었다.

      • 상궁은 직접 조리하지 않고, 눈으로 보고 지시하며, 손맛을 판단했다.
      • 나인은 선배의 행동을 옆에서 복사하듯 따라 하며 익히는 견습 과정을 거쳤다.
      • 정확한 레시피보다는 “이건 손끝에서 알지”, “이 정도 익으면 냄새가 달라져”와 같은
        구술적 지식이 교육의 주된 방식이었다.

      이는 마치 장인의 도제 시스템처럼,
      경험과 감각, 몸의 기억을 통해 계승되는 미묘하고 정교한 문화 전수 시스템이었다.

      오늘날에도 이어진 ‘장금이’의 유산

      궁중 요리는 조선 왕조의 멸망 이후에도 일부 상궁들에 의해 민간으로 전해졌다.
      1920~30년대에는 해방 이후 궁궐에서 나와
      서울 도성 안에 살던 전직 상궁 출신 여성들
      자신이 익힌 요리를 일반 가정에 전수하거나
      한식당을 열어 ‘왕실 음식’의 민간화를 이뤘다.

      대표적으로

      • 한상차림 문화,
      • 12첩 반상,
      • 떡과 한과를 함께 차리는 다과상
        지금도 우리가 전통이라 부르는 식문화는
        그들의 손끝에서 탄생하고 뿌리내렸다.

      드라마 <대장금>이 대중적으로 궁중 요리사를 조명하기 전까지,
      그들은 묵묵히 음식을 통해 기억을 지켜온 여성들이었다.

      기록되지 않았지만 지워지지 않은 전통

      상궁과 나인은 이름으로 기억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지킨 음식의 온도, 식감, 담음새, 순서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살아 있다.

      • “장은 언제 담그는지”
      • “궁중 떡은 몇 겹을 찌는지”
      • “여름 국은 어떤 약재와 어울리는지”
        이 모든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저 ‘음식을 만드는 여성들’로만 여겨졌던 상궁과 나인이었다.

      그들의 기억은
      책 한 권 없이도 전통을 완성할 수 있는 지혜였고,
      그 지혜가 없었다면 지금의 한국 음식 문화도 없었을 것이다.

      5. 왜 그들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는가?

      궁중 요리사는 수십 년을 불 앞에서 살았다.
      왕의 건강과 식사, 왕비의 기분과 명절의 상차림, 국가 행사의 음식까지
      모두 그들의 손끝에서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 줄의 이름조차 역사에 남기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단지 "기록이 적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조선 사회의 위계 질서와 기록문화, 여성에 대한 인식 구조
      서로 교차하며 만들어낸 ‘의도된 침묵’이었다.

      1) 조선은 ‘위에서 아래를 기록’하는 사회였다

      조선 시대는 철저한 위계 중심 기록사회였다.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각종 의궤(儀軌)와 의서, 명령서 등
      모든 기록의 초점은 임금, 고위 관료, 사대부 남성에게 맞춰져 있었다.

      궁중에서 실제 음식을 조리한 상궁이나 나인, 별좌, 하인들은
      ‘사건이 없는 한’ 기록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설사 실수가 있어 문제를 일으켜도
      “수라간 소속 나인” 또는 “소주방 상궁”이라는 직책만 표기될 뿐
      이름이나 나이, 경력, 생활상은 철저히 삭제되었다.

      이름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름이 아예 ‘기록의 대상이 아니었다’.

      2) 여성은 ‘존재하되 기록되지 않는’ 존재였다

      조선 유교 사회에서 여성은 ‘가정 안’의 존재로 규정되었다.
      그녀가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도,
      사회적으로는 ‘남성을 보조하는 위치’로만 인정받았다.

      궁중 음식의 정점에 있는 상궁조차,
      사극에서는 권위 있는 존재로 그려지지만
      실제 역사 기록에서는 “소임을 수행한 자”,
      행위만 존재하고, 정체성은 없는 사람으로 남았다.

      기술자이자 관리자로서 음식을 만든 여성들은
      자신의 감각과 노동을 통해 전통을 지켜냈지만,
      그 감각과 노동은 ‘여성의 일’이라는 이유로
      역사 서술의 밖에 놓였다.

      3)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권리도 없었다

      기록은 단지 이름을 남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곧 지위, 권리, 보상의 근거가 된다.
      하지만 수라간의 상궁, 나인은
      자신의 기술을 ‘특허’로 보호받을 수도,
      자신의 음식을 ‘창작’으로 인정받을 수도 없었다.

      왕이 음식을 맛있게 먹어도
      그 공은 ‘궁궐 음식 문화의 우수함’으로 치환되었고,
      왕비가 상을 차리도록 지시해도
      그것은 ‘왕실 여성의 정성’으로 기록되었다.
      음식을 만든 이의 손은 철저히 투명하게 처리되었다.

      이로 인해 그들은 죽어서도 “이름 없는 궁인(宮人)”으로 묻혔다.
      무덤조차 기록 없이 흩어졌고,
      가문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삶으로 사라졌다.

      4) 음식은 남았고, 요리사는 지워졌다

      오늘날 전통 음식으로 남은 수많은 궁중 요리들—
      수정과, 잡채, 탕평채, 신선로, 편육, 약과, 떡국, 백김치…
      이 모든 음식은
      어디선가 누군가의 손에서 정확히 계산되고 완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음식을 가리켜 ‘조선 음식’이라 부른다.
      ‘○○가 만든 음식’이 아니라, ‘왕실의 문화유산’이라고 부른다.
      그 음식은 남았지만,
      그것을 만든 사람의 이름은 역사에서 삭제되었다.

      이는 단순한 기억의 부재가 아니라,
      역사적 지우기의 결과이자, 제도적 침묵의 산물이다.

      5) 이름을 남기지 못한 자들을 위한 기록의 시작

      이제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우리는 언제나 왕과 왕비만 기억하는가?
      그들의 밥상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바친 이들은
      왜 한 사람도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는가?

      ‘궁중 요리’가 문화유산으로 지정되고,
      ‘전통 음식’이 세계에 소개되는 오늘,
      우리는 그 뿌리를 묻고,
      그 뿌리에서 살아 있던 이름 없는 여성 장인들을 재조명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전통의 계승이며,
      진짜 문화유산을 존중하는 길이 아닐까.

      6. 오늘날 전통 음식으로 남은 궁중 요리, 그 뿌리를 잊지 말아야

      오늘날 ‘궁중음식’은 한국의 대표적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았다.
      한식당의 고급 메뉴로, 외국 국빈 초청 시의 공식 만찬으로,
      또는 드라마 <대장금>과 같은 문화콘텐츠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화려한 겉모습 속에는
      평생을 불 앞에서 지내며 손끝 감각으로 음식의 ‘온도’를 조절하던 이름 없는 장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매일 새벽 재료를 손질하고, 뜨거운 불 옆에서 식재료를 지키며
      왕의 기분과 건강까지 책임졌던 ‘무형의 전사’들이었다.

      지금 우리가 먹고, 보고, 전시하는 궁중음식은
      바로 그 이름 없는 손들이 남긴 유산이다.
      이제는 그 손끝에 담긴 기억을
      기록과 존중의 방식으로 되살릴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