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니의 잊혀진 역사 속 인물 탐구

잊혀진 역사 속 인물 탐구에 대해서 글을 작성합니다.

  • 2025. 5. 14.

    by. 지아니13

    목차

      1. 군사 기록에서 여성은 왜 사라졌는가

      역사 속 군사 기록은 오랫동안 남성 중심의 서사 구조로 쓰여져 왔다.
      국가의 존망을 좌우하는 전쟁, 영토를 지키는 병사,
      승리를 이끄는 장군이라는 위치에는 언제나 남성의 이름이 남는다.
      반면 여성은 ‘전쟁에 희생당한 민간인’, ‘후방에서 봉사한 간호사’,
      혹은 ‘위로부대’처럼 전쟁의 피해자 또는 주변인으로 기록되어 왔다.

      하지만 실제 역사를 들여다보면, 수많은 여성들이 총을 들고 싸웠다.
      그들은 군복을 입었고, 전선에 배치되었으며, 적을 사살하고 임무를 완수했다.
      문제는 그들의 존재가 기록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기록되지 않은 존재는 곧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취급된다.
      이 글은 바로 그 침묵의 기록, 보이지 않는 이름들을 다시 불러낸다.

      군복을 입은 그녀들, 그러나 기록되지 못한 이유

      2. 무기를 든 여성들: 전선에서 싸운 이름 없는 존재들

      역사는 전쟁을 남성의 이야기로 기록했다.
      총을 든 사람, 지휘한 사람, 전략을 세운 사람은 언제나 남성으로 표기되었고,
      여성은 간호사, 위생병, 종군 위안부 혹은 민간인의 이름으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실제 전선에는 총을 든 여성, 적진을 돌파한 여성, 폭탄을 투척한 여성이 있었다.

      그녀들은 국가의 명령으로, 혹은 자신이 믿는 이상을 위해 병사로 싸운 이들이었다.
      단지 기록되지 않았을 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전장의 여성, 전사로 재탄생하다

      제2차 세계대전은 여성 군인의 존재를 가장 분명하게 증명한 전쟁이었다.
      총 300만 명 이상의 여성이 군복을 입고 참전했으며,
      그 중 상당수는 의무대나 보조 병력이 아닌 실제 전투병으로 활동했다.

      **소련군 여성 저격수 루드밀라 파블리첸코(Lyudmila Pavlichenko)**는
      309명을 사살한 기록을 남긴 실존 인물이다.
      그녀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세바스토폴 방어전에서 활약하며,
      "단지 여성일 뿐인데도 내가 저격수라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독일군에 맞선 유고슬라비아의 여성 빨치산들은
      정보 수집, 정찰, 게릴라 작전의 중심축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연대 지휘관까지 오르기도 했으나, 전후에는 대부분 민간인으로 돌아가며 역사에서 사라졌다.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여성 투사들,
      특히 〈마르셀 르페브르〉, 〈베르트 모리스〉 같은 인물은
      무기를 숨기고, 교량을 폭파하며, 독일군 본부를 정찰한 실전 전사였다.

      아시아 전선: 여성 게릴라와 민병의 실전 참여

      전선이 아시아로 확장되자 여성의 군사 참여는 더욱 뚜렷해졌다.
      많은 이들은 공식 군 조직이 아닌 유격대, 독립군, 민병대 소속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더욱 이름 없이 사라지기 쉬운 운명에 처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 여성 유격대원
      ‘롱하 여성민병대’, ‘호아빈 여성 전투대’ 등으로 조직되어
      정글을 기반으로 지뢰 설치, 적기 격추, 낚시줄 폭탄 등의 전략을 구사했다.
      그들은 단순히 상징이 아니라, 실제 전투와 군사 훈련의 정식 구성원이었다.

      중국 항일 유격대의 여성 전사들
      하얼빈, 지린, 만주 일대에서 기관총 사수, 탄약 수송, 일본군 암살 작전에 투입되었으며,
      많은 여성은 포로로 잡히거나 이름 없이 전사했다.
      단 한 줄의 기록 없이 가족에게도 소식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진 이들이 수천 명에 이른다.

      대한민국의 여성 학도의용군 또한
      포항, 대구 일대에서 소총을 들고 병참선을 지켰으며,
      공식적으로는 보급병으로 분류되었지만
      여러 전투 기록에서 실탄 사격 훈련과 실전 배치 흔적이 확인되고 있다.

      군복을 입은 여성, 전투에 참여한 군인

      많은 이들은 여성의 군사 활동을 '예외적'이거나 '극히 드문 사례'로 보려 한다.
      그러나 이는 의도된 삭제에 가깝다.
      실제로 수많은 여성들은 전쟁 중 군번이 부여되지 않았고,
      전후에도 퇴역 군인으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보훈 대상에서도 제외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 조준 사격을 하고,
      • 폭약을 설치하고,
      • 야전에서 동료를 치료하며,
      • 피를 흘리고,
      • 목숨을 걸고 싸운 정식 군인이었다.

      단지 그녀의 성별이 ‘여성’이었기 때문에, 군사 기록에서 이름이 사라졌을 뿐이다.

      ‘이름 없는 전사’가 아닌, ‘기록되지 않은 전사’

      기록이 남기지 못한 것은 존재의 증명이 아니다.
      많은 여성 군인들은 국가의 부름을 받았고,
      그 누구보다 충성스럽게 싸웠으며,
      남성 병사와 같은 대우는커녕, 기억조차 되지 못했다.

      그녀들은 전쟁의 감정 노동자도 아니고,
      ‘여성스러운 미담’을 위해 희생된 존재도 아니었다.
      그녀들은 전장을 누비던 진짜 전사였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수많은 무명 전사로 남아 있다.

      그들의 존재는
      전쟁의 기억을 ‘남성 중심의 권력 서사’로부터 인간 중심의 서사로 바꾸는 중요한 열쇠다.

      3. 간호사가 아닌 전사였던 여성 군인들

      역사 속 여성 군인은 종종 ‘간호사’나 ‘의료 보조’로만 회상된다.
      총을 든 전사가 아니라, 상처를 돌보는 존재.
      그러나 이 같은 프레임은 여성 군인의 실질적 활동을 왜곡해왔다.

      현장에서 여성은 주사기만 쥔 것이 아니라,
      총검을 들고 돌격했고, 야전에서 포복하며 구조했고,
      탄창을 갈며 진지에서 적과 대치했다.

      간호사가 아닌 ‘군인’으로 참전한 여성들

      사라 에마 에드먼즈(Sarah Emma Edmonds) – 미국 남북전쟁
      북군에 입대한 사라 에마는 남성 이름 '프랭클린 톰슨'으로 신분을 속여 정식 보병으로 참전했다.
      의무대에서 시작했지만 점차 전투병으로 편입되었으며, 정찰병과 간첩 역할까지 맡았다.
      전쟁 후 그녀는 자신이 군인이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법정 투쟁을 했고,
      훗날 공식적으로 참전 군인 연금을 받은 몇 안 되는 여성 중 하나가 되었다.

      마리트 부데르(Marit Buder) – 제2차 세계대전 노르웨이 레지스탕스
      마리트는 야전 간호사로 위장했지만, 실제로는 산악 지형에서의 병기 운반과 저격병 훈련을 받은 전사였다.
      그녀의 작전기록은 공식 문서에는 ‘간호 활동’으로만 정리되었지만,
      현지 증언과 복원된 사진 속에서는 그녀가 기관총을 들고 보초를 선 모습도 확인된다.

      대한민국 학도의용군 여성 대원들 – 한국전쟁
      1950년 포항·대구·부산 등지에서 여학생들이 자원입대하여,
      야전에서 수류탄을 던지고 포탄을 운반하며 군사 작전에 동원되었다.
      이들은 전쟁 후 '의용 간호대'로 통합되어, 실제 전투에 참여한 기록은 대부분 군문서에서 누락되었다.
      단 몇 장의 사진과 구술 기록이 남았을 뿐이다.

      ‘간호사’ 프레임에 가려진 실전 투입 사례

      전쟁이 길어질수록, 병력 부족이 심해질수록
      여성 간호사는 ‘보조 인력’을 넘어 실제 전선에 배치되었다.

      • 야전 간호사들은 부상자를 구조하기 위해
        총탄이 날아드는 전장 한가운데를 뛰었고,
        환자 호송 중 적의 매복을 당해 응전해야 했다.
      • 군 지휘부는 이들에게도 실탄과 무기를 지급했지만,
        ‘전투 참가자’로 분류하진 않았다.
        결국 사망하거나 부상당해도 전사로 인정받지 못하고,
        '의료활동 중 사망'이라는 이름 아래 기록되었다.
      • 베트남전에서는 미군 여성 간호병이
        기관총 사격을 받은 헬기에서 직접 응사한 사례도 존재하지만,
        해당 내용은 전투 기록이 아닌 ‘정신력 미담’으로 포장되었다.

      전투병인가, 간호사인가? 정의의 문제

      이처럼 수많은 여성들은
      **“내가 들고 있던 것이 주사기인가, 총인가?”**라는 질문 사이에 갇혀왔다.

      간호병으로 입대했지만,

      • 사살을 했고,
      • 부대를 방어했고,
      • 작전을 수행했으며,
      • 탄환을 나르고,
      • 적에게 포위를 돌파했다면
        그녀는 군인이다. 간호사가 아니다.

      그러나 군 조직은 이를 애써 '보조 역할'로 축소했고,
      역사도 이를 그대로 따랐다.

      그 결과, 전사한 여성 군인의 무덤 앞에도
      "전투 참여자"라는 이름 대신 "의료 활동 중 순직"이라는 문구만 남게 되었다.

      오늘날의 질문: 그녀들은 누구였는가?

      오늘날 우리는 ‘여성도 군복을 입을 수 있다’는 사실에 익숙해졌지만,
      과거 그녀들은 ‘군복을 입었다는 사실조차 잊혀진 존재’였다.

      그녀들은 전쟁터에서 생사를 넘나들며
      남성과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싸웠고,
      간호사라는 타이틀은 그녀들이 실제로 한 일의 극히 일부일 뿐이었다.

      우리는 그녀들을 다시 기록해야 한다.
      간호사로만이 아닌, 군인으로, 전사로, 역사 속 주체로.

      4. 암호, 정찰, 저격: 특수전에서 활약한 여성들

      전쟁은 총검만이 아니라, 정보, 기밀, 심리전, 특수작전의 전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바로 그 은밀하고 결정적인 순간들에
      여성 전사들이 존재했다.

      그들은 단지 숨은 존재가 아니라,
      전황을 바꾸는 정보 전달자이자 저격수, 암호 해독가, 정찰병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대개 ‘비전투 요원’이라는 이유로 공식 기록에서 제외되었다.

      암호 해독과 첩보전: 눈에 보이지 않는 전선의 주역들

      영국 – 블레츨리 파크의 여성 코드브레이커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에니그마 암호체계를 해독한
      영국 **블레츨리 파크(Bletchley Park)**에는
      수천 명의 여성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그들은 단순한 타자수나 보조원들이 아니었다.

      • 조앤 클라크(Joan Clarke): 천재 수학자로 앨런 튜링과 함께
        에니그마 해독 작업에 참여했다.
        하지만 그녀의 기여는 대부분 튜링의 명성에 묻혔다.
      • 그 외에도 수많은 여성들이 언어 해독, 암호 수학, 통신 감청, 암호 생성 등의 고급 업무를 수행했으나,
        공식 군사훈장은 커녕 이름조차 남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미국 – OSS 여성 첩보요원

      미국 전략사무국(OSS, CIA의 전신)은
      유럽과 아시아 전역에 여성 요원들을 파견해
      연합군 진격 루트를 설계하고, 나치 고위 인사의 동향,
      무기 저장소 위치, 점령지 저항조직 연락체계를 구축했다.

      대표적 인물인 **버지니아 홀(Virginia Hall)**은
      한쪽 다리가 의족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서 게슈타포의 감시를 피해 2년 넘게 첩보 활동을 이어갔다.
      전후 그녀는 미국 최초의 여성 CIA 요원이 되었다.

      저격수와 유격대: 정면 전투를 마다하지 않은 여성들

      소련 – 여성 저격수 부대

      소련은 전쟁 초기부터 여성들을 정식 저격병으로 편성했다.

      • 루드밀라 파블리첸코(Lyudmila Pavlichenko): 309명 사살
      • 로자 샤닌(Roza Shanina): 59명 사살, 전투 중 사망

      이들은 지휘관급 제거 작전, 정찰병 보호 사격,
      야간 매복 등의 고난도 임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전후에는 **“청순한 여성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억에서 밀려나기도 했다.

      베트남 – 롱하 여성 전투대

      미군의 시선을 피한 정글 저격수,
      신체가 작아 은폐에 유리했던 여성 유격병들은
      야간 정찰, 급습, 게릴라 암살 작전에 투입되었다.
      심지어 일부 여성 병사는 스나이퍼 부대 훈련교관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들은 ‘포복이 빠르고 손이 정확하며,
      상대를 경계시키지 않는 외형’을 전술적으로 활용했다.
      그럼에도 공식 전투기록에는 여성 병사의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았다.

      정찰병, 파괴 공작, 공수 작전의 조용한 영웅들

      • 프랑스 레지스탕스 여성들은 전차가 드나드는 다리를 폭파하고,
        점령지의 통신선을 끊고, 연합군의 진격로를 미리 확보했다.
      • 유고슬라비아 빨치산 여성들은
        눈보라 속에서 통신기를 들고 산악을 넘었고,
        적군의 이동경로를 기록해 지도에 표시했다.

      그들이 감행한 수천 건의 정찰과 공작 임무
      연합군의 작전 성패를 좌우했지만,
      전후 그들은 대부분 **“전선 보조자”**로만 불렸다.

      비정규전에서 정규군보다 치열했던 여성들

      여성들은 정규군의 군번도 없이, 계급도 없이 전장을 누볐다.
      하지만 그들이 한 일은

      • 수색,
      • 저격,
      • 암호 수송,
      • 적진 침투,
      • 야간 포격 좌표 제공 등
        가장 고난도 전술이 요구되는 영역이었다.

      그들은 단순한 보조자도, 감정노동자도 아니었다.
      그녀들은 전술적으로 훈련된,
      침묵 속의 전투 전문가였다.

      그럼에도 기록은 이렇게 남았다

      • ‘여성 요원 O는 연락병으로 활동했다’
      • ‘암호 부서에서 보조 활동을 했다’
      • ‘전투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없음’

      이처럼 여성 군인의 전술 활동은
      군사기록과 전쟁사에서 축소되거나 삭제되었다.
      그녀들이 쏜 총탄은 실탄이었고,
      전쟁의 결과를 바꿨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록은 남성의 공로로 돌아갔다.

      우리가 다시 써야 할 전쟁의 문장

      특수전은 단지 폭탄과 칼의 싸움이 아니라,
      정보와 판단, 은신과 실행의 영역이다.
      그곳에서 수많은 여성 전사들이
      자신의 이름을 내걸지 못한 채
      누군가의 승리를 위한 그림자가 되었다.

      이제는 그 그림자에 이름과 서사, 권리와 기억을 되돌려주어야 한다.

      5. 전쟁 이후의 침묵: 왜 그들은 잊혀졌는가

      전쟁이 끝나면 전사는 귀환한다.
      승자는 영웅이 되고, 패자는 교훈이 된다.
      하지만 여성 군인에게는 전후(戰後)란 또 다른 침묵의 시작이었다.

      그녀들은 생명을 걸고 싸운 뒤에도
      역사서에 이름이 실리지 않았고,
      국가로부터 '군인'으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심지어 자신의 이야기를 말할 공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전장에서 돌아온 그녀들을 기다린 것: 무시와 삭제

      전쟁이 끝난 후 여성 군인에게 주어진 현실은 가혹했다.

      • 군번이 없다는 이유로 보훈 대상에서 제외되고,
      • 퇴역증명서조차 발급받지 못하고,
      • 의료·연금·사회 복귀 지원은 남성 참전용사에게만 집중되었다.

      여성은 전쟁 중에는 군복을 입었지만,
      전쟁 후에는 다시 ‘가정의 자리’로 강제 복귀되었다.
      심지어 일부 국가는 여성이 군복무를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불량 여성’, ‘결혼 부적합자’로 낙인찍었다.

      소련의 여성 전사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탁월한 성과를 냈지만,
      전후 사회에서 “너무 강한 여자”라는 이유로 배척당하고
      결혼과 사회생활에서 불이익을 받았다.

      미국에서는 일부 여성 첩보원이 전쟁 후 CIA로 편입되지 못한 채 퇴직당했고,
      몇몇은 비밀유지서약 때문에 평생 자신의 전투 경력을 밝히지 못했다.

      역사책은 왜 그들의 이름을 지우는가?

      역사 서술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권력을 가진 이들의 선택적 기억으로 구성된다.
      남성 중심의 역사관은
      여성의 전투 참여를 ‘일탈’, ‘보조적 사례’로 간주하며
      이를 본문에서 제외하거나, 각주로 처리했다.

      • 전투 현장에서 적을 사살한 여성 병사는
        “의료보조원” 또는 “간호 중 전사”로 기록되었고,
      • 정찰병과 폭파작전을 수행한 여성들은
        “비전투 지역 근무”로 분류되었다.

      심지어 여성들의 활약이 국가의 전통적 성역할 담론과 충돌할 경우,
      그녀들의 기록은 의도적으로 왜곡되거나 삭제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여성 학도의용군의 실질 전투 참여는
      공식 군사사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고,
      대부분 ‘간호학교 학생의 헌신’ 정도로만 축소되었다.

      전후 사회는 왜 그들을 불편해했는가?

      여성이 전장에서 남성과 동일한 행동을 했다는 사실은
      가부장제 사회에 위협이 되었다.
      전쟁은 남성 영웅의 신화를 만들고,
      국가의 정통성을 강화하는 도구로 작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성 군인의 존재는

      • "여성도 지휘할 수 있다",
      • "여성도 살상할 수 있다",
      • "여성도 전략과 판단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이런 진실은 체계의 균열을 의미했다.
      그래서 전후 사회는 그녀들을 조용히 사라지게 만들었고,
      그녀들 역시 침묵 속에서 자신을 지워야 했다.

      일부 여성 참전 용사는 전후 인터뷰 요청을 받았을 때,
      “나는 그냥 조용히 있었던 사람이에요”라고 말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남기지 않았다.
      그 침묵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가 강요한 침묵이었다.

      지금도 반복되는 ‘군복을 입은 여성의 침묵’

      오늘날에도 군대 내 여성 인원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지만,

      • 실전 경험이 폄하되거나,
      • 성별 고정관념에 따라 승진에서 불이익을 받거나,
      • 전투력보다는 ‘상징성’으로 소비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과거의 침묵이 여전히 현재형으로 지속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역사를 되돌리는 첫걸음은 이름을 부르는 것

      그녀들은 존재했다.
      단지 기록되지 않았고, 기억되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첫 번째 행동은
      그녀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내는 일이다.
      역사의 그림자 속에 있는 여성 군인들의 이야기를
      소리 내어 말하는 것.
      그것이 비로소 기억의 정의이며, 침묵에 대한 저항이다.

      6. 오늘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그녀들의 이름

      이제는 질문해야 한다.

      • 전쟁은 정말 남성만의 역사였는가?
      • 우리는 왜 여성 군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가?
      • 기록은 누구를 중심으로 쓰였으며, 누구를 지웠는가?

      전쟁의 기록에서 여성 군인이 ‘부재’한 것이 아니라,
      그녀들은 늘 존재해왔고, 단지 기억되지 않았을 뿐이다.

      오늘날, 전 세계 곳곳에서 여성 군인들은 정규군, 특수부대, 평화유지군으로 복무 중이다.
      과거의 무명 전사들을 기억하는 것은
      곧 현재의 여성 군인이 ‘예외’가 아닌, 역사의 한 축임을 인정하는 일이다.

      그녀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다만, 우리가 듣지 않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