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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농민은 왜 기록되지 않았는가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대부분 ‘위대한 인물’의 이야기다.
왕, 장군, 학자, 정승과 같은 권력자들의 업적이 중심이다.
하지만 역사의 실질적 무게를 떠받쳐온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바로 농민들이다.그들은 곡식을 심고, 논과 밭을 갈고, 가족과 공동체를 먹여 살리면서도,
공식 역사 속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기록을 남길 권한도, 수단도 없었기 때문이다.문자를 배우지 못했고, 글을 쓸 수 없었으며,
글을 남긴다 한들, 그것이 역사로 편입될 구조가 없었다.
결국 그들의 삶은 말이 아닌 노동으로만 존재했고, 기록되지 못한 시간 속으로 사라졌다.2. 땅을 일군 사람들, 무명의 생산자들
인류 문명이 시작된 이래, 먹을거리를 생산하고 사회를 유지해온 가장 근본적인 역할은 농민의 몫이었다.
농경이 시작된 순간부터 현대 산업화 이전까지, 전 인류의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했다.
그들은 도시를 지탱했고, 궁궐의 잔치를 책임졌으며, 전쟁의 병참을 마련했다.
그러나 왕의 이름은 돌에 새겨졌지만, 땅을 일군 이들의 이름은 흙 속에 묻혔다.모든 문명의 기초, 그러나 이름 없는 노동
고대 이집트의 나일강 유역, 메소포타미아의 유프라테스강 주변,
중국 황허 문명과 한반도의 삼한 사회까지—
모든 고대 문명의 시작에는 풍요로운 평야와 그것을 일구던 사람들이 있었다.
피라미드를 만든 이들은 노예가 아니라 대부분 농번기 외의 시기를 활용한 농민들이었다.
거대한 건축물을 만든 손이, 동시에 밀을 심고 거름을 나르던 손이었던 것이다.조선시대 역시 농민은 단순한 식량 생산자를 넘어선 사회의 유지 기반이었다.
양반, 관리, 중인, 상인의 계층 모두가 사실상 농민이 낸 **세금(전세, 공납, 부역)**으로 살아갔다.
국가 재정의 중심은 국유지와 농민의 생산물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는 이름은 전제왕권을 세운 임금, 과학기구를 만든 학자,
아름다운 시를 쓴 문인들뿐이다.
그들에게 쌀과 옷감을 제공하고, 궁궐의 연못을 파고, 병력을 운송한 사람들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농민은 왜 역사 기록에 남지 않았는가?
기록은 권력의 도구였다.
한자를 익힌 양반만이 글을 쓰고, 국가 기록물은 정해진 사관이 작성했다.
그들은 위정자의 명령과 업적, 천재 문인의 문장력을 남기는 데에 집중했지,
농부가 올해 김장을 일찍 끝냈는지, 장마에 논둑이 무너졌는지에는 관심이 없었다.심지어 가족을 위해 들에서 죽어나간 사람이 있어도
그 사망은 **“기근으로 백성 일부가 아사했다”**는 식으로만 기술됐다.
무수히 많은 삶이, 단 한 줄의 통계로 환산된 것이다.시대를 넘어 이어지는 ‘이름 없는 역사’
조선 중기 농사직설, 고려시대 제언사 운영기록,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 사업 문서 등에서
농업에 관한 수많은 자료들이 존재하지만,
그 속에는 특정 농민의 이름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다만 ‘곡창지대’, ‘농민 다수’, ‘피해 백성’ 같은 집단적 명사만 반복될 뿐이다.그렇다고 이들이 수동적으로만 살았던 것은 아니다.
홍수 피해 시에는 마을 단위로 둑을 복구했고,
논매기, 모내기, 추수 등의 모든 과정은 공동체 단위의 노동과 협력, 기술 전승을 통해 유지되었다.
그들의 삶은 과학이자 문화였고, 동시에 집단적 지식의 집합체였다.그들이 없었다면, 무엇도 가능하지 않았다
우리는 왕이 다스렸다고 말하지만,
그 왕의 밥상에 오른 음식, 그 왕이 이동한 도로,
그 왕이 치른 전쟁의 병참과 식량은 전부 농민의 손에서 나왔다.- “○○왕 때 풍년이 들었다”는 말은
누군가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거름을 퍼날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대에 창고가 풍족했다”는 것은
어떤 농가에서 아이 울음과 장마 속에서도 수확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 기록은 그 ‘누군가’를 말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그 이름 없는 이들을 위해 기록해야 한다.
그들의 이름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흔적은 우리의 밥상과 마을 이름,
땅의 결 속에 지금도 살아 있다.3. 전쟁의 짐을 진 이들, 동원된 농민의 운명
역사는 전쟁의 연대기로 가득하다.
왕이 언제 침략했는지, 어느 장수가 전투에서 승리했는지,
어떤 나라가 멸망했는지를 우리는 교과서에서 배운다.
하지만 그 화려한 전쟁 기록 이면에는 말없이 동원된 수많은 농민들의 고통과 희생이 숨어 있다.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징발된 사람들
농민은 군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전쟁이 터지면 가장 먼저 병력과 물자의 공급원으로 동원되는 이들이 바로 농민이었다.
고려-거란 전쟁, 조선의 임진왜란, 병자호란,
그리고 20세기 초 일제의 전쟁경제 체제까지—
모든 전쟁은 “병사” 이전에 “백성”을 동원하면서 시작됐다.- 논에서 일하던 이들은 창을 들고 전장에 끌려갔다.
- 가축을 기르던 가족은 군량미로 곡식을 빼앗겼다.
- 마을에서 공동체를 꾸리던 노인과 아이들까지 피란민으로 내몰렸다.
이들의 이름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전투는 몇 월 며칠, 어느 고을 근처에서 일어났다고 쓰였지만,
그 전투에 강제로 참여한 농민 병사의 이름은 빠져 있었다.보급과 물자, 병참의 주체였던 농민
전쟁은 단순한 무력 충돌이 아니다.
**병참전(兵站戰)**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다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군대가 움직이기 위해선 식량, 무기, 의복, 운송 수단이 필요하며,
이 모든 물자는 농민의 노동으로부터 나왔다.- 말을 끌고 군량미를 옮긴 것은 마을의 장정들,
- 피난 중인 병사에게 밥을 지어 나른 것은 농가의 부녀자들,
- 죽은 병사의 시신을 묻고 수습한 것도 남겨진 마을 사람들이다.
이처럼 농민은 단순히 ‘보급된 사람’이 아니라,
전쟁의 뒷면을 유지한 또 다른 군대였다.
하지만 역사는 이들을 '병참 요원'이라 부르지도 않고,
‘백성’, ‘부역자’, ‘현지 협조자’라는 희미한 명사로만 지칭한다.군공은 장군의 것이고, 패전은 백성의 탓?
승전보가 전해지면 전공은 지휘관에게 돌아간다.
하지만 전쟁이 패배하거나 혼란이 생기면,
국가는 항상 “민심이 흉흉하다”, “백성이 어지럽다”는 이유로
책임을 아래로 전가한다.특히 조선 중후기, 외세의 침입이나 내부 반란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가혹한 처벌과 부역이 내려진 것은 평민과 농민이었다.
전쟁 후 복구 사업 역시 농민의 부역을 기반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들이 만든 성곽과 보루는 장군의 공으로 보고되었다.그렇다면 질문해야 한다.
"누가 싸웠는가?"
"누가 죽었는가?"
"그리고 누가 기록되었는가?"역사에 남지 않은 이름들
일본이 조선을 강제병합한 이후, 수많은 농민들이
일제의 침략전쟁을 위한 군수물자 징발, 보급로 개척, 노동현장에 동원되었다.
누구는 군수공장에, 누구는 만주 철도 건설 현장에,
누구는 가족을 위해 침묵 속에서 모든 것을 내어주었다.하지만 광복 이후에도,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디에서 어떻게 사라졌는지
기록으로 남겨진 것은 거의 없다.
그들은 단지 “식민지 백성”, “조선 농민”으로 묶여버린 것이다.침묵한 이들의 희생은 어떻게 복원되는가
전쟁은 반드시 피해자를 낳는다.
그리고 그 피해자 대부분은 이름 없는 민중,
그중에서도 농민이었다.농민은 싸움을 원한 적이 없고,
전쟁을 시작하지도 않았으며,
국가를 위해 죽음을 각오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동원되었고, 희생되었으며, 묻혔다.이제는,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님을
역사와 사회가 정직하게 고백해야 할 때다.4. 세금, 공납, 부역의 이중고를 견딘 민중
역사는 흔히 왕의 업적과 제도의 정비를 칭송하지만,
그 제도 아래에서 살아가는 백성들의 고통은 종종 사라진다.
특히 농민은 단지 곡식을 수확하는 사람이 아니라,
국가 재정과 권력 시스템을 유지하는 세금의 공급자, 노동의 제공자로 기능했다.하지만 이들은 아무런 발언권 없이,
말 그대로 의무만 있고 권리는 없는 존재로 살아야 했다.
세금, 공납, 부역은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지배했고,
그것은 곧 삶의 조건이자, 통치의 수단이었다.전세, 공납, 군역 – 조선 삼정(三政)의 본질
조선시대 농민이 감당해야 했던 세금 구조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이를 '삼정(三政)'이라 부르며, 국가 통치의 근간으로 작동했다.- 전세(田稅): 수확량을 기준으로 땅에서 나오는 조세.
‘풍년이면 가볍고, 흉년이면 무겁다’는 말이 돌 정도로
세율이 자의적으로 조정되어 불공정한 경우가 많았다. - 공납(貢納): 지역 특산물, 물품 등을 납부하는 제도.
문제는 물품을 실물로 납부해야 했고, 이를 중간에서 방납업자가 독점하면서
농민들은 1냥짜리 옷감을 10냥에 사서 바치게 되는 착취가 발생했다. - 군역(軍役): 원칙적으로는 병역의무였으나,
돈을 내고 병역을 면제받는 군포 제도로 운영되면서
사실상 또 하나의 세금이었다.
이 모든 부담은 농민에게만 집중되었고,
양반과 권력층은 면세, 면역, 특혜로 보호되었다.정작 ‘법’은 없고, 임의는 많았다
문서상으로는 백성을 위한다는 이름의 조세제도였지만,
실제로는 토지 소유의 불균형, 지방관의 부패, 아전들의 횡포로 인해
농민들은 해마다 늘어나는 부담을 감내해야 했다.지방 수령은 지방권력과 결탁해 부당한 물자 요구를 일삼았고,
‘공납’이란 이름으로 벼룩가죽을 벗기듯 마을 곳곳에서 가축과 물품이 뜯겼다.
심지어 부역은 ‘공공노동’이라는 명분 아래
사적 건축물, 양반 사당, 지방관의 가옥 수리에도 동원되곤 했다.농사 외의 모든 시간이 ‘국가를 위한 무상노동’으로 사라졌고,
이러한 부정이 누적될수록 민중의 삶은 피폐해졌다.
그러나 그들은 법정에 호소할 수 없었고,
문서를 작성할 수 있는 능력도, 제도에 항의할 권리도 없었다.노동이 아니라 착취였던 부역(賦役)
부역은 농민에게 있어 가장 가혹한 형태의 통제였다.
한 해 농사를 지어 겨우 식량을 확보한 뒤에도,- 마을길 정비,
- 성곽 보수,
- 하천 정비,
- 궁궐 유지,
- 창고 운반,
같은 공공노동에 무보수로 징발되었다.
부역은 시간과 체력, 그리고 가족의 생계를 뺏어갔다.
남편이 부역을 나간 사이, 아이를 키우는 부녀자들은
노약한 몸으로 밭일과 가사노동을 모두 짊어졌고,
이런 일이 해마다 반복되면서 마을 단위의 가난이 대물림되었다.역사는 이를 단지 “부역이 힘들었다” 한 문장으로 설명하지만,
그 뒤에 있는 수천의 피로와 울음, 묵묵한 절망은 기록되지 않았다.조선 후기 삼정의 문란: 사회 붕괴의 시그널
조선 후기에 이르러 삼정은 ‘문란’이라는 단어로 불릴 정도로 부패했다.
사람 수를 부풀려 군포를 더 걷고,
지방 특산물을 요구하면서 되팔기 위해 더 많은 양을 징수하고,
비리 관료들이 세금 징수권을 매매하는 일까지 벌어졌다.이로 인해 수많은 농민들이 농토를 포기하고 유민이 되었고,
산속으로 피하거나, 봉기와 저항에 나섰다.
이 배경은 결국 19세기 후반의 홍경래의 난, 동학농민운동과 같은
거대한 민중 저항으로 이어진다.“성실히 사는 것”이 고통이었던 시대
역사에는 성실하게 농사짓고, 조세를 납부하며 살아온
이름 없는 농민들이 무수히 존재했다.
하지만 그들의 인생은- 불안정한 기후,
- 착취적 세금,
- 반복된 전쟁과 부역
으로 인해 한 번도 안정된 삶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지만,
제도의 구조는 언제나 그들을 희생시키는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의 삶은 “국가의 질서를 위해 필요했던 희생”이라며
감춰지거나 축소되었다.5. 기록 속에서 지워진 저항: 농민 반란과 봉기의 흔적
가끔 농민의 이름이 기록될 때가 있다.
그건 바로 반란을 일으켰을 때다.- 고려 말 홍건적의 난, 조위총의 난
- 조선시대 임꺽정, 홍경래의 난
- 동학농민운동, 갑오농민전쟁
이 모든 사건에서 농민은 주체였다.
그러나 기록에서는 **“반란군”, “폭도”, “역도”**로만 묘사된다.
그들이 주장했던 세금 개혁, 탐관오리 척결, 생존권 보장은 무시되고
단지 ‘질서를 어지럽힌 죄인’으로 남는다.그들은 정치적 발언을 했지만, 역사에서는 죄수로 기록됐다.
6. 역사라는 이름의 편견: 기록자의 시선
역사는 늘 기록자의 시선에 의해 쓰여졌다.
조선의 실록도, 중국의 사서도, 유럽의 연대기록도
모두 글을 쓸 수 있는 지배층, 남성, 문인들의 시선이다.그 시선은 백성을 하나의 덩어리로 보았고,
농민은 ‘소요’와 ‘풍년’이라는 단어로만 다뤄졌다.
“○○ 고을의 백성 3천이 반란을 일으켰다”
“흉년이 들자 백성이 굶주렸다”여기엔 개개인의 이름도, 생각도, 감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침묵은 무능이 아니라, 억압의 결과였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7. 농민사를 복원해야 하는 이유
역사는 ‘위에서 아래로’ 쓰여져 왔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아래에서 위로’ 쓰는 역사가 필요하다.농민은 단지 고통받은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공동체를 지켰고,
삶을 조직했고, 권력에 저항하며 자기만의 서사를 가진 역사 주체였다.그들의 말과 기록이 없었더라도,
우리는 그들의 노동, 저항, 삶의 흔적을 통해 그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지금 우리의 밥상에 오르는 쌀 한 톨에도,
이름 없는 수많은 농민의 손길이 있다.그 손을 잊지 않는 것이,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는 첫걸음이다.'잊혀진 역사 속 인물 탐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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