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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강릉의 무명 리더, 왜 박인복인가
박인복, 지역 속 묻힌 독립운동가
강릉은 단순한 관광지나 문화 도시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일제강점기, 동해안을 따라 펼쳐진 여러 도시들 가운데 강릉은 독립운동의 물류와 인적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하지만 이 지역의 항일운동사를 돌아보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름들은 많지 않다. 그 공백 사이에서, ‘박인복’이라는 이름은 마치 잊힌 노래처럼 조용히 울려 퍼진다.
박인복은 강릉 시민의 입을 통해, 오래된 사진의 뒷면 글씨를 통해, 구술된 증언 속에서 되살아난 존재다. 그녀는 이름 없이 활동했고, 기록되지 않았으며, 상훈 하나 없이 평범한 일상을 살았지만, 그 안에 담긴 역사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당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지도자로 불리지 못했지만, 그녀가 이끌던 모임, 조직,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연결고리는 강릉 항일운동의 뿌리였다.
그녀의 존재는 단순히 한 개인의 행적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어떻게 지역 사회를 기반으로 투쟁을 실현했는지를 보여준다. 박인복이 활동한 시대는 정보와 기록이 쉽게 남겨지지 않던 시절이었고, 특히 여성들의 활동은 더욱 의도적으로 지워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 틈을 메우고 있다. 공적인 문서에 없다고 해서 그녀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박인복은 ‘이름 없이 활동한 사람들’의 대표적 사례다. 그녀의 이야기를 복원한다는 것은 단지 한 인물을 조명하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경로로 활동하고 잊혀진 수많은 무명의 투사들을 떠올리는 일이다. ‘왜 박인복인가’라는 질문은 곧 ‘왜 우리는 이들을 잊었는가’라는 질문과 같다. 그 물음은 오늘날 지역사 복원의 동력이며, 새로운 역사 쓰기의 출발점이 된다.
2. 기록에 없는 이름, 구술로 되살아난 박인복
구술사로 복원된 박인복의 항일투쟁
박인복이라는 이름이 처음 세상에 다시 떠오른 것은, 역사책도 문서도 아닌, 강릉 옥천동 한 골목의 마을 어르신의 입에서였다. 당시 90을 넘긴 노인은 무심히 내뱉듯 말했다. “인복이 아지매는 돈을 걷었어요, 조선독립 한다고.” 이 짧은 한 마디가 마치 먼지 쌓인 사진첩 속 한 장의 흑백사진처럼 역사 탐색의 문을 열었다.
그 말을 듣고 시작된 지역 청년들의 기록 추적은 예상치 못한 발견들로 이어졌다. 노인의 말에 따르면, 박인복은 단순히 주변 사람들로부터 돈을 걷는 일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정기적으로 강릉 읍내와 인근 시골 마을을 돌며, 독립자금을 모으는 동시에, 외지에서 온 독립운동가들과 연결해주는 ‘연락책’ 역할까지 수행했다. 어떤 날은 농사짓는 척하다가 소쿠리에 쪽지를 숨기고, 어떤 날은 시장 상인 행세를 하며 비밀 문서를 건네기도 했다.
그녀의 활동이 단지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 수동적인 임무가 아니라는 점은, 여러 어르신들의 교차되는 기억에서도 확인된다. “그 집에 가면 언제나 담배 피우는 남정네들이 모여 있었어. 인복이한테 허락받고서야 뭔 얘기를 하더라고.” 한 마을 주민의 이 말은 박인복이 단지 전달자가 아닌, 중심을 잡는 ‘판짜기’ 역할을 했다는 것을 방증한다.
그녀의 흔적은 공식 문서에서 찾기 어렵다. 체포나 수형기록도 없고, 일제 말기 강릉 경찰서 문서에서도 유사 이름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구술자료 속 그녀의 모습은 명확하다. 박인복은 조직을 구성하고, 활동을 분담하며, 직접 자금과 정보를 관리한 실질적인 ‘지하조직 리더’였다.
이처럼 한 사람의 기억에서 출발한 증언은, 주변의 기억을 자극했고, 또 다른 단편적인 사실들을 끌어냈다. 옛 문서 속 “박○○, 옥천리 거주, 상회 운영” 같은 단서는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 실마리를 제공했고, 그것이 ‘박인복’이라는 이름과 연결되었을 때, 퍼즐의 조각은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박인복의 삶은 기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워진 것이 아니라, 기록의 바깥에서 오히려 더욱 강하게 남아 있었다. 입에서 입으로, 가정의 식탁에서, 장날 이야기 속에서 그녀는 계속 살아 있었다. 구술은 때때로 주관적이고 불완전하지만, 역사적 공백을 메우는 가장 인간적인 방식이다. 그리고 박인복처럼 잊혀진 인물에게는, 바로 그 인간적인 접근이 유일한 복원의 기회이기도 하다.
3. 여성이라는 이유로 지워진 투쟁의 흔적들
여성 독립운동가, 박인복이 겪은 침묵의 역사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는 ‘용맹한 남성 영웅’의 이름으로 점철되어 있다. 의거를 일으킨 남성, 해외망명을 통해 임시정부를 조직한 남성, 태극기를 들고 거리에 나선 남성의 이야기는 수많은 교과서와 다큐멘터리, 기념관에 남아 있다. 그러나 그 곁에서 함께 싸우고, 때로는 앞장서서 조직을 꾸리고, 자금을 모으고, 정보를 전달하던 여성들의 이름은 대부분 사라졌다. 박인복 역시 그런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녀는 단순한 조력자가 아니었다. 강릉 지역의 여성들로 구성된 비밀조직을 직접 조직하고 운영한 실질적인 리더였다. 남성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되거나 외지로 이동한 이후, 지역 내에서 독립운동의 맥을 이어간 것은 바로 이 여성 네트워크였으며, 그 중심에 박인복이 있었다. 그녀는 행동과 전략을 동시에 설계하는 사람이었고, 실제로 ‘여성 중심의 지하조직’을 운영했다는 점에서 매우 이례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녀의 활동은 ‘대단한 일’로 기록되지 못했다. 일제 경찰 기록에서도 여성에 대한 체계적 추적은 드물었고, 재판 기록에 남는 이름은 거의 대부분 남성이었다. 박인복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다는 증언이 여러 사람에게서 확인되었지만, 국가기록원이나 독립운동가 공훈록에는 그녀의 이름이 단 한 줄도 등장하지 않는다. 심지어 독립유공자 서훈 대상자 목록에도 그녀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러한 부재는 단순한 ‘누락’이 아니라 ‘의도된 침묵’에 가깝다. 여성 독립운동가는 남성 중심의 기록 체계 속에서 ‘비공식적인 존재’로 취급되었고, 공식 서사에서 제외되었다. ‘조력자’, ‘아내’, ‘연락책’이라는 이름으로만 포장되거나, 심지어 ‘어머니의 애국심’으로 추상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그 억압된 구조를 되짚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박인복의 이야기는 단지 한 인물의 복원이 아니다. 그것은 ‘누가 기록하고, 누가 잊히는가’에 대한 구조적 문제를 드러낸다. 그녀가 고문을 견디며 침묵을 강요당했던 것처럼, 역사 속에서도 침묵을 강요당한 것이다.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기록이 부재한 이유는, 그들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이는 곧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만들어지는 역사 왜곡의 전형이다.
오늘날 우리가 박인복을 기억하고 조명하는 일은 단순한 과거 복원이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기록되지 않는 자들의 자리를 되찾는 일이자,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기록 문화를 성찰하는 일이기도 하다. 역사는 과거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박인복이 남긴 흔적, 그리고 그것을 침묵시킨 구조는 지금도 누군가의 이름을 지우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이제 그 침묵을 깨야 한다.
4. 박인복이 이끈 강릉 지역 항일운동의 양상
강릉 항일운동, 여성 조직의 전략과 실천
박인복의 항일운동은 단순히 ‘여성 몇 명이 모여 자금을 모았다’는 식의 소극적인 활동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녀는 강릉 지역 여성들과 함께 철저히 은밀하고 체계적인 항일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표면적으로는 가정주부, 상점주인, 장터 상인으로 일상 속에 스며들어 있었지만, 그 이면에서는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민심을 조직화하고 행동을 이끄는 ‘조직가’의 역할을 해냈다.
그녀가 중심이 된 ‘비밀소모임’은 이름조차 공식적으로 남아 있지 않지만, 이 모임은 단순한 친목회나 정보교류 차원이 아니었다. 그들은 마을마다 신뢰할 수 있는 여성을 지정해 자금 수합을 맡기고, 그 자금을 어떻게 전달할지를 계획했으며, 심지어 경찰의 동향을 파악하고 서로에게 위험 신호를 보내는 체계도 마련했다. 일부 여성은 시장에서 야채를 팔며, 속에 독립운동 전단지나 쪽지를 숨기기도 했다.
박인복은 활동 거점을 농촌 지역으로 옮기기도 했다. 이는 일본 경찰이 도시보다 농촌을 덜 감시하는 틈을 노린 전략이었다. 그녀는 직접 나귀를 몰고 이동하면서, ‘장에 간다’는 명분으로 멀리 떨어진 마을들을 방문했고, 그 과정에서 동지들에게 소식을 전달하거나 격려의 말을 전했다. 이런 방식은 철저한 ‘비정치적 위장’ 아래 이뤄졌지만, 실질적으로는 정치적 저항 그 자체였다.
또한 일제의 문화검열을 피해 문학적 표현을 활용한 저항도 있었다. 박인복과 그녀의 동지들은 시나 짧은 수필, 자수 문양 등을 통해 항일 메시지를 담아냈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일상적 작품처럼 보이지만, 시 구절 한 줄, 무늬 하나에 담긴 상징은 명백한 민족의식과 독립에 대한 염원을 담고 있었다.
그녀가 이끈 모임은 일제의 감시 하에서도 꺼지지 않은 민중 항거의 불씨였고, 이는 단순히 지역의 동조를 넘어 조직적, 집단적 저항운동으로 기능했다. 상경하는 투사들에게 자금을 전달하거나, 외부 인사들과의 접점을 연결하는 ‘연락책’ 역할도 이 모임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였다. 특히나 여성의 얼굴은 ‘의심받기 어렵다’는 통념을 역으로 활용해, 경찰의 눈을 피해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박인복의 전략은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전략적 판단과 공동체 운영 능력을 기반으로 한 고차원적 실천이었다. 그녀는 단순히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 이가 아니라,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사람을 조직하며 위기를 피하는 법을 아는 진정한 리더였다. 이러한 방식은 오늘날 ‘풀뿌리 저항운동’의 전형으로도 평가할 수 있을 만큼 자생적이고 창의적이며, 무엇보다도 집단적 지혜에 기초한 실천이었다.
강릉이라는 특정 지역, 그리고 여성이라는 정체성 속에서도 박인복은 ‘한계를 가능성으로 바꿔낸 인물’이었다. 그녀가 이끌던 모임의 항일운동은 일제의 공권력에 대한 직접 저항이자, 일상을 통한 저항, 관계를 통한 저항, 문화적 공간을 통한 저항이었으며, 이는 지금도 지역사회 안에서 전해지는 귀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5. 후손과 지역이 함께 복원한 기억
지역 공동체의 기억 복원, 박인복 재조명
박인복이라는 이름은 역사책에 실려 있지 않고, 국가 기록보관소에서도 찾기 어렵다. 그녀의 후손도 남아 있지 않아 가계나 가족사를 통해 전해지는 이야기조차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인복의 기억은 지금 강릉이라는 지역 공동체 안에서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다. 바로 마을 어르신들의 기억, 오래된 벽장 속 문서, 구식 신문 스크랩, 그리고 강릉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만든 지역 역사 동아리와 시민단체의 움직임 덕분이다.
이들은 단순히 누군가의 업적을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주민들의 기억을 수집하기 위해 ‘구술 인터뷰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강릉의 오래된 골목과 시장을 찾아다니며 누군가의 입에서 ‘박인복’이라는 이름이 흘러나오길 기다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어떤 이는 박인복이 운영하던 작은 잡화점에서 받았던 사탕 값을 기억했고, 또 다른 이는 일제 경찰에게 끌려가는 장면을 또렷이 떠올렸다.
또한 일부 역사 동아리 학생들은 지역 기록보관소와 도서관에서 옛날 강릉신문, 조선일보 마이크로필름 등을 뒤지며 박인복과 관련된 간접적 단서를 찾는 작업에 몰두했다. ‘옥천동 박 씨 여성, 장터서 체포’라는 짤막한 기사 한 줄에서부터 시작된 작은 단서는, 또 다른 어르신의 기억과 맞물려 그녀의 활동 시기와 장소를 좁혀나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복원 과정은 단순한 정보 채집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지역사회가 집단적으로 기억을 재구성하고, 그것을 공유하고, 전승하는 과정은 역사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학교에서 배우는 ‘위인 중심’의 획일화된 역사에서 벗어나, 마을의 기억과 일상의 조각들이 모여 역사를 형성해가는 모습은 아이들과 청소년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강릉의 중학교 역사 교사는 말한다. “학생들이 처음엔 박인복이 누군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인터뷰하고 정리하는 과정을 통해, ‘역사란 이렇게 생기는 거구나’라고 이해하게 됐죠.”
또한 박인복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소규모 지역 전시회와 마을 골목 탐방 코스가 만들어졌고, 그녀의 이름을 딴 작은 기록관이 주민자치센터 한켠에 자리 잡았다. 이 공간은 지금도 방문객에게 차를 대접하며, “이 동네에도 이런 인물이 있었답니다”라는 말을 이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이 과정은 후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기억이 ‘지역의 후손들’에 의해 복원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박인복은 혈연이 아닌 공동체적 기억의 힘으로 살아난 인물이며, 이는 앞으로 우리가 어떤 역사를 남기고, 어떻게 기억할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모델이 된다.
결국 박인복의 복원은 한 인물의 명예 회복을 넘어, 기억을 잇는 지역 공동체의 실천, 그리고 잊히지 않기 위한 역사적 책임의 상징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는 박인복 개인의 투쟁처럼 조용하지만 분명한 저항이며, 우리가 더 많은 ‘무명의 인물들’을 발굴해야 할 이유를 분명히 보여준다.
6. 오늘, 우리가 박인복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박인복의 현재적 의미, 기억을 통한 저항
박인복이라는 이름은 오랜 시간 동안 역사 속에서 지워져 있었다. 그녀는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고, 기념관에도 없다. 후손에게 전해진 족보조차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그녀를 다시 호명하는 것은 단지 과거의 인물을 추모하기 위함이 아니다. 이름 없이 사라진 수많은 사람들, 기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존재가 부정당한 이들의 역사를 되찾기 위한 시도이자, 우리 모두의 역사 감각을 되살리는 ‘기억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역사를 바라보는 방식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과거처럼 몇몇 위인들의 영웅담만으로는 이제 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다. 오히려 작은 지역에서, 평범한 일상 속에서, 비밀스럽게 저항했던 인물들의 이야기가 더 깊은 울림을 준다. 박인복은 그런 존재다. 단지 한 여성이 아닌, 이름 없이 싸운 수천, 수만의 민중을 대표하는 얼굴 없는 저항의 상징이다.
그녀의 이름은 비석에 새겨져 있지 않다. 독립유공자 명단에도 없고, 역사 기념관의 벽에도 없다. 하지만 강릉 주민들의 입에서, 시장통에서, 오래된 골목 어귀에서, 여전히 그녀의 이야기는 조용히 흘러나온다. “그 아지매는 조용했지만, 큰일을 했지.” “우리 어머니가 그분 이야기를 자주 했어요.” 이런 소박한 기억들이 지금 박인복이라는 인물을 다시 세상에 불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기억을 더 이상 입에서 입으로만 전하지 않아야 한다. 글로 남기고, 기록으로 확장하고, 영상으로 만들고, 교육으로 전해야 한다. 블로그 한 편, SNS에 남기는 글 한 줄, 마을 행사에서 울리는 낭독 한 구절이 그녀의 이름을 세상에 다시 박아 넣는 방식이 될 수 있다. 기억은 혼자 하지 않는다. 기억은 공유될 때 힘이 된다.
박인복을 기억하는 것은 과거를 다시 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어떤 사회를 원하는지를 묻는 일이기도 하다. 침묵이 강요되었던 시대에 말없이 저항한 사람을 조명하는 일은, 지금도 여전히 이름 없이 사라지는 이들을 위한 연대의 메시지가 된다. 우리는 여전히 ‘기록되지 않는 존재’를 만들어내고 있지는 않은가. 교육받지 못한 이들, 소수자, 여성, 빈곤층의 이야기는 여전히 주변부에 머물고 있다. 박인복을 기억하는 일은 그 침묵을 깨는 하나의 선언이다.
그녀의 삶은 “위대한 사건”이 아니라, 끈질긴 일상의 저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평범한 얼굴, 시장을 오가던 걸음, 조용한 말투 속에 깃든 의지. 우리는 그런 삶의 방식에서 진짜 ‘투쟁’이 무엇인지 다시 배우게 된다. 이름 없는 사람들이 역사를 만든다. 그리고 그들이 만든 역사는, 우리가 잊지 않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박인복을 기억하는 한, 그녀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녀의 투쟁도, 그가 남긴 이름도,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시작된다.
지금, 우리 모두의 손으로.'잊혀진 역사 속 인물 탐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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