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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고려시대 여성, 그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고려시대는 흔히 남성 중심의 무인 정권, 문벌 귀족 사회로 기억되곤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의 여성들이 단지 집 안에 머무르며 조용히 생을 마감한 존재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공식 역사 기록은 대부분 남성 중심의 활동에만 초점을 맞췄지만, 그 뒤편에는 정치, 종교, 군사, 문화의 여러 영역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던 여성들, 즉 ‘숨겨진 여걸’들이 분명 존재했습니다.이들은 때로는 왕을 조언하고, 때로는 불교와 교육을 주도하며, 때로는 전장에 나가 군을 지휘하거나 외교의 전면에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이들의 활약은 대부분 ‘비공식적 권력’, 혹은 ‘뒷이야기’로 축소되거나 사료에서 사라졌을 뿐입니다.
고려시대는 조선과 달리 비교적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유연했던 시기였습니다. 재가(再嫁)가 가능했고, 여성도 상속권과 재산권을 일부 가질 수 있었으며, 친정과의 관계도 유지하는 등 여성의 사회적 활동 공간이 넓었던 시대였기에, 그만큼 다양한 여성 리더가 등장할 수 있었습니다.
2. 왕건의 후비들, 단순한 후궁이 아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은 한 명의 군주이자, 고려라는 새로운 나라의 설계자였습니다. 그는 단지 군사력이나 전략으로만 통일을 이룬 것이 아니라, 혼인이라는 정치적 도구를 활용하여 지역 세력과 유기적인 연합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이러한 정략결혼을 통해 **무려 29명의 후비(後妃)**가 왕실로 들어왔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자신의 출신 가문과 지역을 대표하는 실질적인 정치 중개자로서 활동했습니다.왕건의 후비들은 단순히 왕의 총애를 받는 후궁의 위치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각자 출신 가문의 이해관계, 지역 기반의 권력, 궁중 정치 내에서의 영향력을 기반으로 정치적으로 유의미한 존재로 기능했습니다.
즉, 고려 초기의 정치 권력은 단일한 중앙 권력이 아니라, 후비 가문을 매개로 한 다층적 권력 구조였으며, 이는 고려 왕조의 안정적 출범과 지역 통합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신명순성왕후(神明順成王后 신씨) – 고려 초기 여성 정치의 상징
신명순성왕후는 고려 태조의 제3왕후로, 당시 명문 가문인 경주 출신 신씨 집안의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단순히 태조의 부인이라는 지위를 넘어, 외척 세력을 형성하며 정권 내부의 균형과 안정 유지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특히 왕건 사후, 궁중의 권력 다툼이 본격화되던 시기에는 태자 교육과 왕자 간의 갈등 조정에 깊이 관여했고, 그 결과 혜종과 정종 간의 권력 이양 과정에서도 일정한 조율자로 기능했습니다.
당시 여성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왕실 내부 정치의 중심에 위치한 사례이며, 그녀는 단순히 남편의 후광을 입은 인물이 아니라 자체 정치 역량을 가진 권력자였습니다.신명순성왕후는 또한 왕후로서 국왕의 제례 및 불교 행사에 참여하며 종교적 권위까지 겸비한 인물로 평가되며, 그 존재는 고려 초기 여성 정치인의 대표적 사례로 꼽힙니다.
황보씨 – 왕위를 위해 싸운 후궁, 정치 연대의 중심
또 다른 주목할 인물은 태조의 후비였던 황보씨입니다.
그녀는 후일 제2대 국왕인 혜종(惠宗)의 생모로서, 왕실 내부에서 아들의 왕위 계승을 뒷받침하기 위해 강력한 정치적 연대를 형성하고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황보씨는 자신의 아들인 혜종이 다른 후비의 자식들 사이에서 정통성을 유지하고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정치적 로비와 후원을 주도했습니다.
당시 후궁의 위치는 일반적으로 정치적 권한이 제한되었지만, 황보씨는 자신의 가문(황보씨 가문)과 왕권을 결합해 독립적인 정치 세력으로 기능했고, 그녀의 전략은 결국 혜종의 즉위라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이러한 사례는 고려 왕조 초기의 권력 구조가 단순한 왕권 중심이 아니라, 후비와 그 배경 세력의 정치적 작용으로 유지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 증거입니다.
황보씨는 비록 공식 역사서에서는 자주 등장하지 않지만, 후비의 정치 참여가 실제 역사에 얼마나 깊숙이 영향을 미쳤는지를 잘 보여주는 인물입니다.고려 초기의 권력, 여성 없이는 성립할 수 없었다
고려 초기의 정치 구조는 매우 독특했습니다. 태조 왕건이 추구한 통일 전략은 단순한 군사적 병합이 아니라, 혼인을 통한 정치적 유대 망 형성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각 지역 유력 가문의 여성들은 단지 결혼의 대상이 아니라, 정치적 연결고리, 지역 통합의 매개자, 권력 이양의 전략 파트너였던 것입니다.특히 태조의 후비들은 단순히 왕실의 내부 여성이 아닌, 지역 기반을 공유하고, 정치적 계산과 중재를 수행하며, 국가의 핵심 전략에 참여한 정치 주체였습니다.
이는 단지 왕건 시대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 고려 왕조가 수백 년 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정치 문화의 근간이 되었습니다.더불어 왕건의 후비들 중에는 종교 후원, 불교 사찰 설립, 교육과 시주 활동 등을 통해 민심을 수렴하고 국왕의 이미지를 강화하는 ‘정치 문화 후원자’의 역할도 겸비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후궁이 아닌 ‘권력자’였던 그녀들
우리는 종종 ‘후궁’이라는 단어에 ‘조용한 여인’, ‘권력 뒤의 인물’이라는 이미지를 덧씌웁니다. 그러나 고려시대, 특히 왕건 시기의 후비들은 오히려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고, 정치의 변수를 만들며, 왕조의 미래를 설계했던 실질적 정치 행위자였습니다.
그녀들은 단지 사랑받은 여인이 아닌, 정권의 안전을 설계하고 권력의 균형을 조율한 중대한 존재였고, 고려 초기의 유연한 권력 구조는 이런 여성 정치인들의 존재를 통해 가능해졌습니다.
그 이름은 사료에서 희미하게 남았지만, 그들이 남긴 영향은 왕조의 뼈대를 이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3. 고려 불교와 여성 승려의 위상
고려는 자타공인 불교 왕국이었습니다. 국왕이 불법(佛法)을 보호하고, 불교가 국가 운영과 문화의 뿌리로 자리 잡은 체제였죠. 단지 종교적 신앙을 넘어, 불교는 정치 권력, 예술 창작, 교육 제도, 심지어 대외 외교의 수단으로까지 기능한 국가적 핵심 시스템이었습니다.
이러한 국가 불교 체제 속에서 여성은 단순한 후원자나 신도가 아니라, **승려이자 조직의 운영자, 교육자, 의료인, 심지어 정치적 조언자로까지 활동한 ‘주체’**였습니다. 특히 사찰이라는 공간은 고려 여성들에게 가장 제도적이고 공식적인 활동 무대였고, 이곳에서 여성 승려들은 조용하지만 단단한 힘으로 공동체의 중심을 지켜왔습니다.
여성 승려는 존재했는가? 사료가 말하는 ‘보이지 않는 리더’
고려시대 여성 승려의 존재는 의외로 다양한 사료에 산재해 있습니다.
국사 편찬 위주의 공식 기록에서는 언급이 많지 않지만, 탑비문, 불교 사적기(事蹟記), 지방 사찰지(寺誌), 민간 전승과 발굴 자료에는 여성 승려의 이름과 활동이 간헐적으로 드러나곤 합니다.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묘희(妙喜) 스님입니다. 고려 후기 지방 사찰 관련 문헌에 따르면, 묘희 스님은 경상도 지역 사찰의 재건을 주도하고, 기도와 의료 활동, 여성 신도 교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질병으로 고통받는 농민들을 위해 약초와 침술을 활용했으며, 사찰에서 여성 신도들을 위한 법회와 교육 강좌를 열어 불교적 세계관 안에서의 여성 교양 교육을 실현했습니다.단순한 포교 활동을 넘어, 묘희는 지역 공동체의 안정을 위한 실천적 지식인으로 기능했으며, 일부 문헌에서는 ‘법회 시 수백 명이 모였다’는 기록도 전해집니다.
그녀는 불교를 통해 사회적 연대와 여성 공동체의 자립을 도왔고, 이는 당시 사찰이 여성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여성 사찰의 역할: 공동체의 거점, 여성의 대피소
고려시대 사찰은 남성 승려만의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비구니(比丘尼, 여성 승려)**를 위한 사찰이나, 여성 신도 중심의 불교 조직도 실존했습니다.
이들 공간은 당시 사회에서 여성이 공식적으로 머무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적 공간이자, 신분·출신·혼인 상태와 관계없이 누구나 받아주는 평등한 장소였습니다.고려 불교는 왕실과 귀족 여성들의 후원을 많이 받았는데, 이 후원이 단지 시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성 승려의 승계·교육·생활 기반을 보장하는 제도적 뒷받침으로 연결되기도 했습니다.
왕실 여성 중 일부는 출가 후 비구니로서 사찰을 이끌거나, 여성 불자 후원회를 조직해 복지적 불교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이들 여성 사찰은 다음과 같은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 사회적 대피소: 출가 여성뿐 아니라, 전쟁·가난·가정폭력 등으로부터 도망친 여성들이 의지할 수 있는 쉼터로 기능
- 교육 기관: 기초 한자, 불경, 예의범절, 의약 지식 등을 가르치며 여성 교육의 중심지 역할
- 복지 공간: 병자 치료, 고아 보호, 농민 계몽, 공동 식사 제공 등 지역 기반의 복지 실천
- 의례 및 예술 창작의 무대: 여성 중심의 불화, 자수 불경, 법요문 제작 등 불교 예술에서 여성의 창작적 참여도 활발
이처럼 사찰은 단순히 종교적 수행처가 아니라, 여성들이 사회 안에서 역할을 수행하고, 보호받으며, 성장할 수 있는 실질적 공간이었습니다.
여성 불교 네트워크와 공동체 리더십
불교는 중앙과 지방, 사찰과 사찰을 연결하는 강력한 네트워크였고, 여성 승려들도 이 네트워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특히 지역 여성 승려 간의 교류, 여성 신도 조직인 ‘보살단’, ‘불자 모임’ 등을 통해 자체적인 조직력을 갖춘 여성 공동체가 존재했으며, 일부는 기금 조성, 불서 간행, 시주 물품 관리까지 담당하며 실질적인 조직 운영자로 활동했습니다.이들은 불교 경전을 암송하고 토론하며, 남성 스님들과 교류하면서도 자신들만의 종교적 해석과 신앙 공동체를 형성해갔습니다.
즉, 여성 승려는 단지 종속적 수행자가 아니라, 한 명의 교화자이자 조직자, 교육자, 때로는 치유자이기도 했습니다.고려 여성 승려의 존재, 왜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할까?
고려시대 여성 승려의 활동은 오늘날 여성 리더십, 공동체 조직, 교육 복지 실천의 기원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그들은 제도 밖에 있었지만, 제도 속에서 목소리를 냈고, 비공식의 자리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여성 지도자들이었습니다.오늘날까지도 이들의 기록은 부분적으로만 전해지고 있지만, 그 흔적만으로도 조선시대 유교 이데올로기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던 여성 주체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려의 여성 승려들은 바로 그 주체성의 ‘잃어버린 고리’였고, 우리는 이제 그들의 존재를 역사 속에서 정당하게 회복해야 합니다.4. 고려 문학과 교육에 기여한 귀족 여성들
고려 문학사나 교육사에서 여성의 이름은 자주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여성의 흔적은 궁중 문집, 남성 문인의 시문, 가계 족보, 사찰 기록, 묘비명 등 곳곳에 남아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당시 귀족 여성들이 문학과 교육의 조용한 주체로 활약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특히 고려는 조선과 달리 여성의 교육과 문화 활동이 상대적으로 더 유연하게 허용되던 시기였습니다. 귀족 여성들은 유교와 불교, 도가 사상이 공존하는 문화 환경 속에서 문학을 통한 정서 표현, 가문 기록의 전승, 자녀 교육을 통한 가치관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사대부 가문의 여성이 아니라, 학문의 교류자이자 문화의 해석자, 그리고 가정 안의 교육자이자 지성의 전승자였습니다.문학 속 여성: 화자에서 창작자로
고려 문학에서 여성의 직접적 이름은 많지 않지만, 남성 문인들이 남긴 시문 속 '여성 화자'의 표현이나 여성과의 문학적 교유 흔적을 통해, 귀족 여성들이 문학을 감상하고 직접 창작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확인됩니다.
예를 들어, 고려 후기 문인 이규보의 시에서 등장하는 여성들과의 시적 교감, ‘응답형 시’ 형식은 당대 여성들이 단순한 감상의 독자가 아니라 실제로 시를 짓고 주고받던 창작의 동반자였음을 암시합니다.
이 외에도 궁중 문집에는 왕비, 후궁, 공주 등 여성들이 남긴 짧은 시가나 기문(記文)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 중 일부는 불교적 정서를 담은 명상시, 가족과의 이별을 담은 정한(情恨)의 시로서 상당한 문학적 성취를 보여줍니다.무엇보다 이러한 작품들은 여성들이 문자를 익히고, 한문을 구사하며, 시문을 통해 정서를 표현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증거이며, 이는 조선 초기 여성 문학의 기반이 고려에서 이미 형성되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최승로 가문의 여성들 – 가문을 기록한 여문(女文)의 흔적
대표적으로 최승로 가문은 고려의 대표적 문벌 귀족 가문으로, 그 일원인 여성들이 가계사(家系史)와 서간문, 불교적 시가를 남긴 사례가 문집과 족보에 부분적으로 전해집니다.
이 여성들은 남편과 아버지를 위한 기문(記文), 조상 제사문, 조의문(弔義文) 등을 작성했고, 때로는 자신의 내면 정서와 자녀에 대한 애정을 불교적 상징을 통해 시적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한문에 능통했던 이들은 당대의 교육 수준이 매우 높았던 것으로 보이며, 귀족 여성들이 단지 가사 노동을 담당한 존재가 아닌, 가문 문화의 지적 계승자였다는 사실을 입증합니다.이들의 글은 문학적으로도 일정 수준 이상이며, 형식미, 어휘 선택, 문장 구조 면에서 정통 문학 교육을 받은 흔적이 역력합니다.
비록 공식 시문집에는 실리지 못했지만, 사찰 문서, 사가 문집, 묘비와 묘지문 등에는 그들의 작품이 적지 않게 전해지고 있습니다.여성 교육의 실천 – 유교와 불교의 융합형 교육자
귀족 여성들은 단지 자녀를 돌보는 역할에 그치지 않고, 교육자로서 가정 내 문해력과 문화 전통의 핵심 축을 담당했습니다.
특히 고려 후기에는 유교적 가훈과 불교적 명상 교육이 융합된 독특한 교육 문화가 형성되었는데, 이 중심에 귀족 여성들이 있었습니다.이들은 자녀에게 한문 독해, 예절, 역사, 시문 교육은 물론이고, 불교의 윤리와 명상적 사고를 함께 가르쳤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의 도리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처의 길은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와 같은 도덕-정신 결합형 가르침은 고려 귀족 여성 교육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구절입니다.또한, 이러한 교육은 아들뿐 아니라 딸에게도 시행되었으며, 딸들에게는 시집살이 지침, 가문 예법, 여성으로서의 언행 관리뿐만 아니라, 정서적 안정과 자기 통제를 위한 불경 독송, 화엄경 사경 등이 가르쳐졌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조선시대 ‘열녀 교육’이나 ‘현모양처론’과는 달리, 지성과 신앙, 윤리와 실용을 아우른 ‘다층적 여성 교육’의 전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화 전승자’로서의 여성, 고려 여성의 또 다른 이름
고려 귀족 여성들은 단순한 가정인도, 조력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당대 문화를 이해하고 계승하며, 자녀와 지역 공동체를 통해 문화를 재생산한 ‘문화 전승자’**였습니다.
그들의 손에서 문서가 쓰이고, 가훈이 전해졌으며, 예술과 시문이 이어졌습니다.이들의 역할은 기록되지 않았기에 평가받지 못했지만, 무형의 문화 자산을 전달한 실질적 교사이자 교육자, 문학의 씨앗을 지킨 수호자였습니다.
고려의 귀족 여성들이 남긴 문학과 교육의 흔적은 조선 시대 여성 문학과 규범 교육의 뿌리가 고려에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흔적을 발굴하고, 역사의 공백 속에서 잊힌 이름들의 목소리를 다시 복원해야 할 때입니다.5. 전장에서 싸운 여인들, 승군과 여걸의 실존
기록이 많지는 않지만, 고려 시대에도 실제로 무기를 든 여성들, 즉 전투와 전략에 관여한 여성들이 존재했습니다.
특히 거란·여진 침입기나 몽골 침입기에는 **승군(僧軍, 스님들로 구성된 군사 조직)**이나 지방 민병대에서 여성들이 전투 보조, 정보 수집, 후방 지원은 물론, 직접 무기를 들고 싸운 기록이 일부 전해집니다.또한 몽골과의 항쟁 중 여성을 주축으로 한 저항 공동체가 형성되었다는 문헌적 단서도 있으며, 일부 여성들은 남장을 하고 전장에 나섰다는 구전 설화도 전해집니다.
이들은 이름조차 남지 못했지만, 전란 속에서 공동체를 지키고 생존을 도운 실질적 ‘여걸’들이었습니다.6. 고려 여성사를 다시 쓰는 이유
고려시대의 여성은 결코 조용한 배경이 아니었습니다. 정치적 동맹자로, 종교 공동체의 중심으로, 교육자와 예술가로, 때로는 병사와 전략가로, 당당히 무대 위에 올라 있었던 존재였습니다.
다만, 그들의 이름과 역할은 기록의 주류로부터 지워졌고, 우리가 기억하지 못했을 뿐입니다.이제는 여성의 역사를 ‘누락된 이야기’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역사 구성의 주체로 인정하고 다시 써야 할 때입니다.
고려시대 숨겨진 여걸들을 조명하는 일은 단지 과거를 되짚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사회가 다양성과 주체성을 어떻게 인정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작업이기도 합니다.그들이 있었기에, 고려는 지금보다 더 다채로운 역사였고, 그 기억을 되찾는 것이야말로 균형 잡힌 역사 서술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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