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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조선 후기, 과학은 어떻게 변화했나?
조선 전기, 장영실이 자격루와 앙부일구 같은 기계를 제작하며 과학기술의 상징이 되었다면, 조선 후기는 실용 중심 과학의 시대였습니다. 실학이 대두되며 ‘하늘을 관찰하는 것’에서 ‘현실을 개선하는 것’으로 과학의 초점이 이동했습니다.
조선 후기는 위로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전란의 충격, 아래로는 농업과 토지 문제 등 현실적 위기를 과학으로 풀어야 했던 시대였습니다. 즉, 이론보다 실천, 형식보다 문제 해결을 요구받았던 시기였던 셈입니다.그러나 그 시대의 과학자들은 단지 이론을 공부한 유학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천문과 수학, 농업기술, 의학, 건축, 기계공학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고, 신분이 낮거나, 당파 싸움에 휘말렸거나, 후대의 관심에서 멀어졌다는 이유로 지금껏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2. 장영실 이후에도 과학은 살아 있었다
장영실은 자격루, 앙부일구, 혼천의 등 기계 장치와 천문기기를 제작한 조선 과학기술의 아이콘으로, 조선 전기 과학의 절정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그가 사라진 이후에도 과학은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
조선 후기, 과학은 새로운 철학적 배경과 사회적 요구 속에서 실용성과 사유의 폭을 넓히며 점차 진화해 나갔습니다.조선 후기의 과학자들은 더 이상 왕실에 소속된 공인 기술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유학을 공부한 학자였고, 동시에 수학과 천문, 농업, 의학, 건축, 지리 등 다양한 분야에 통달한 실천적 지식인이었습니다. 이들은 ‘기술자’라기보다는, 지식 기반으로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실학자이자 창의적 개혁가였습니다.
이러한 과학자들은 장영실처럼 왕의 지원을 받는 대신, 오히려 정치적 견제와 사회적 한계 속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과학을 연구하고 실천했습니다. 책상 앞의 사변적 철학을 벗어나, 사람들의 삶과 사회의 구조를 바꾸는 도구로서 과학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실학(實學)**이라는 학문적 흐름이 전개되면서, 과학은 더욱 뚜렷한 실용적 지향을 가지게 됩니다. 실학자들은 공허한 주자학적 형식논리에서 벗어나,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학문, 실제로 쓸 수 있는 지식을 추구했습니다.
그 결과, 이들은 천문학, 수학, 지리학, 의학, 농업기술, 기계공학 등을 연구했고, 때로는 중국의 성리학과 병행하여 서양의 과학 지식까지 수용하며 조선의 과학을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렸습니다.이들이 주목한 과학의 핵심은 ‘관찰과 실험’, 그리고 **‘적용과 개선’**이었습니다. 자연을 이론적으로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관찰을 통해 원리를 파악하고, 그것을 실생활에 적용해 백성의 삶을 나아지게 하려는 문제 해결형 사고방식이 두드러졌습니다. 이는 장영실이 궁중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기계를 제작했던 방식과는 또 다른 결의 실천적 과학이었습니다.
이처럼 조선 후기 과학자들은 단순한 기술자를 넘어서 정신적 지도자이자 지식 혁명가로서 시대를 이끌었습니다. 그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홍대용, 김석문, 정약용, 유희 등입니다.
홍대용은 중국과 서양의 지식을 융합하여 우주론과 지구 자전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펼쳤고, 김석문은 조선에서 처음으로 수학적 사고를 과학에 도입하려 했던 선구자였습니다.
정약용은 기계와 건축을 넘어, 행정과 경제 시스템까지 과학적으로 분석해 설계한 실천적 사상가였으며, 유희는 실용 지식과 백성을 잇는 지식 보급자로 활약했습니다.이들 대부분은 정치적으로 주류가 아니었고, 신분적으로도 배제되거나 탄압을 받았으며, 일부는 당대 사회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수많은 저술, 설계도, 해설서, 실험기록은 후대가 조선 과학의 깊이와 다양성을 재발견하게 만든 소중한 유산입니다.장영실이 ‘기계를 만든 사람’이었다면, **이후의 과학자들은 ‘지식의 구조를 설계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조선이 봉건적 질서 속에서도 과학적 합리성과 창의성을 지켜나갈 수 있었던 이유였고, 우리 과학사에서 반드시 다시 조명되어야 할 주체들입니다.
3. 천문과 수학의 개혁자, 홍대용과 김석문
조선 후기, 사회는 전란과 피폐, 내부 개혁의 압력 속에서 변화의 갈림길에 서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하늘을 관찰하고 수의 질서를 탐구한 천문학자와 수학자들은 조용히 그러나 강렬하게 조선의 지식 지도를 바꾸고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 있는 두 인물이 바로 홍대용과 김석문입니다.
이들은 단지 별을 보는 사람도, 숫자를 계산하는 학자도 아니었습니다. 세계를 해석하는 틀을 바꾸고자 했던 철학자이자 과학 혁신가였습니다.홍대용 (洪大容, 1731~1783) – 우주의 중심에서 인간을 끌어내리다
홍대용은 조선 후기 실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상가이자 과학자입니다. 그는 1765년 사신단을 따라 **청나라 연경(지금의 베이징)**을 방문하며 당대 서양 과학에 직접 노출되었고, 천문학뿐 아니라 수학, 물리학, 서양 철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식 체계를 흡수했습니다.
특히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등 서양 선교사들이 번역한 과학서적을 접하며 조선의 전통적 세계관에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그 결과물이 바로 그의 대표작인 **『의산문답』(義山問答)**입니다. 이 책에서 홍대용은 지구가 자전하고 있으며, 우주는 무한하고, 지구는 그 중심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전통적인 유교 세계관, 즉 지구 중심의 정역적이고 위계적인 질서를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며, 코페르니쿠스적 사고방식을 조선 지식사에 처음으로 도입한 파격적인 발언이었습니다.뿐만 아니라, 그는 ‘하늘’의 개념 자체를 고정된 신성한 대상으로 보지 않고, 관찰과 계산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자연 법칙의 영역으로 해석했습니다. 이는 당시 유학자들에게는 대단히 낯선, 심지어 위험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하늘을 안다는 것은 인간을 아는 것이며, 인간을 아는 것은 삶을 바꾸는 일”이라며, 천문학이 철학적 성찰과 실천을 동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홍대용의 이러한 사유는 단지 과학의 확장이 아니라, 조선 지식인의 사고 틀을 확장시키는 철학적 혁신이었습니다.
그는 당대의 누구보다 과학과 사유,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깊이 고민했던 선구적 사상가였으며, 조선의 ‘하늘 보는 눈’을 새롭게 만든 진정한 지적 개척자였습니다.김석문 (金錫文, 1658~1735) – 조선 최초로 지구 자전을 이야기한 수리 천문학자
홍대용보다 약 70년 앞서 활동했던 김석문은 조선에서 가장 먼저 지구 자전 개념을 언급한 학자로 기록됩니다. 그는 사대부 가문이 아니었고, 과거시험에도 오르지 못했지만, 스스로 학문을 연마하며 과학적 사고를 펼친 인물입니다.
그가 남긴 가장 중요한 저술은 **『역학도해(易學圖解)』**로, 주역의 사상 구조를 과학적, 수리적 개념으로 재해석한 매우 독창적인 작업이었습니다.김석문은 단순히 우주의 움직임을 신화나 철학으로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관측’과 ‘도해(그림을 통한 해석)’를 중시하며, 눈에 보이는 하늘을 정밀하게 파악하고 수치로 정리하려 했습니다.
그의 방식은 후에 정약용에게까지 영향을 줄 정도로 학문적으로 깊이가 있었으며, 실제로 김석문의 저술은 수학, 천문, 역법의 교차 지점에서 조선 과학의 이론적 기반을 정비한 시도로 평가받습니다.그는 우주의 본질이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인간은 그 일부일 뿐이라는 생각을 지녔고, 지구의 운동이 자연스러운 법칙임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 했습니다. 이는 당시 대다수 유학자들이 지녔던 정체된 세계관과는 명백히 달랐습니다.
하지만 신분의 한계와 시대의 보수성 속에서 그의 이름은 널리 퍼지지 못했습니다.
그의 과학적 통찰과 사유는 몇몇 문인들에게 구전되거나 필사본으로만 남겨졌고, 생전에는 거의 조명을 받지 못한 채 잊혀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수학적 세계 해석의 초석을 놓은 조선 최초의 ‘수리 천문학자’**였습니다.이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하늘을 보는 방식과 우주를 이해하는 틀을 전환시키려 했습니다.
조선이라는 봉건 체제 안에서 이들은 단지 별을 관찰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간 중심의 사고와 권력 중심의 세계관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 철학자이자 과학 혁신가였습니다.홍대용과 김석문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했던 조선 과학사의 진정한 주역이며, 과학과 철학, 인간과 우주의 관계를 새롭게 열었던 사유의 혁명가들입니다.
이제 그들의 이름은 더 이상 ‘비주류 과학자’로 남을 수 없습니다. 이들은 바로 장영실 이후 조선 과학을 이어간 정당한 계승자이자, 근대 과학으로의 문을 연 선구자입니다.정약용, 과학기술을 실학으로 풀어낸 사상가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조선 후기 실학을 대표하는 학자이자 정치가, 유학자, 행정가, 그리고 과학기술과 공학의 영역까지 넘나든 다학제적 사유의 대가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그를 정치사상가나 개혁적 행정 철학자로 기억하지만, 그의 진정한 위대함은 학문을 삶에 연결하고, 철학을 기술로 실현하며, 사회 문제를 구조적으로 해결하려 했던 실천적 지식인의 자세에 있습니다.정약용이 남긴 방대한 저작 가운데 과학기술 관련 지식이 집약된 대표작은 『기예론(技藝論)』,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목민심서(牧民心書)』 등입니다.
이 저술들에는 천문학, 수리학, 역법, 건축공학, 기계설계, 수리시설 설계, 농업과 의학 등 과학과 기술이 통합된 다차원적 사유의 흔적이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수원화성과 ‘거중기’, ‘배다리’ – 조선판 과학공학의 실증
정약용의 과학적 실천이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난 사례는 수원화성 축조 사업입니다. 정조의 명으로 수원에 새로운 도시를 계획하고 성을 쌓는 과정에서, 정약용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과학기술을 도입했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발명품이 바로 **‘거중기(擧重機)’**입니다.거중기는 오늘날의 도르래와 지렛대 원리를 활용한 무거운 돌을 들어올리는 하역 장치로, 적은 인력으로도 효율적으로 자재를 운반할 수 있는 기계였습니다.
이를 통해 건설 현장의 노동 강도를 대폭 줄이고, 공사의 속도와 안정성을 획기적으로 높였으며, 이는 곧 공공사업에서의 과학기술 활용 가능성을 실증한 역사적 사례로 평가받습니다.또 다른 대표 사례는 **‘배다리(舟橋, 주교)’**입니다. 강을 건너기 위해 배를 연결해 만든 임시 다리로, 유사시 쉽게 설치하고 철거할 수 있으며, 물길을 방해하지 않는 친환경 구조물로 당시 매우 혁신적인 설계였습니다.
정약용은 이를 단순한 임기응변이 아닌, 과학적 구조와 수리 역학에 기반한 설계 원리로 접근했습니다. 그의 설계는 단지 기술의 문제를 넘어, 인간과 자연, 효율과 안전의 조화를 고려한 고도의 엔지니어링적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수학과 역법, 농업과 의학까지 통섭한 학문
정약용은 기계 설계 외에도 수학적 사고와 역법 계산에 뛰어났으며, 이를 통해 행정 제도, 세금 구조, 물길 관리 등 사회의 기초 구조를 과학적으로 설계하고자 했습니다.
『기예론』에서는 기술직 관료의 전문성과 과학 지식의 활용을 강조하며, 기술이야말로 국가와 백성의 생존을 위한 필수 자산임을 역설했습니다.또한 그는 농업 기술 발전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농정전서』에서는 작물 재배법, 토지 배수법, 농기구 개량안 등을 제시하였고, 이를 통해 실질적인 식량 자급과 농촌 안정 방안을 모색했습니다.
수리시설에 대한 그의 관심은 단순히 농업 생산성을 넘어, 자연 재해 예방, 지역 개발, 공공 위생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적용되었습니다.의학 분야에서도 그는 백성을 위한 기초 건강 지식과 보건 행정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약재 사용법, 질병 예방, 지역의료 체계에 대한 기록을 남기며, 공공 보건의 중요성을 선구적으로 인식한 지식인이었습니다.
"백성을 위한 학문"의 실천자, 과학의 윤리를 고민하다
정약용은 늘 말했습니다. “학문이란 백성에게 이로워야 한다.” 그는 학문이 자기만족이나 출세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사회를 바꾸고 사람을 살리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에게 과학은 실험이나 계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고통을 줄이고 공동체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실천 철학이었습니다.특히 그는 유교적 이상과 과학적 현실을 통합하여, 조선 사회에 합리성과 개혁 정신을 이식하려 한 진보적 실학자였습니다.
정치적 이유로 귀양살이를 하던 긴 시간 동안에도 그는 백성을 위한 지식, 백성을 위한 기술을 고민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수백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입니다.정약용은 조선 후기의 위대한 사상가이자, 과학기술을 윤리와 연결한 철학자였습니다. 그는 과학을 ‘문명의 상징’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도구’로 만들고자 한 진정한 실학 정신의 구현자였습니다.
5. 기술과 민중의 연결고리, 유희와 서민 과학자들
조선 후기의 과학 발전은 결코 몇몇 유학자나 정계의 중심 인물들에 의해서만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시 사회의 뿌리를 이루고 있던 민중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상의 문제를 해결하고 지식을 실용화했던 이들, 즉 ‘서민 과학자’, ‘실무 지식인’들의 기여는 우리가 충분히 주목해야 할 영역입니다.
이들은 제도권 학문에서 소외되었거나, 이름 없이 사라졌지만, 기술과 지식의 실질적 보급자로서 조선의 과학과 문화를 떠받친 핵심 존재였습니다.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유희(柳僖, 1801~?)**입니다. 그는 흔히 언어학자나 문법 연구가로 소개되지만, 실제로는 **과학·수학·기하·지도학·문자학 등 실용 지식을 포괄적으로 다룬 조선 후기의 ‘백과형 실학자’**였습니다.
유희는 단순히 학문적 업적을 쌓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지식을 어떻게 민중에게 전달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실천한 인물입니다.유희의 실용 지식 보급 운동 – 언문, 수학, 지리의 대중화
유희가 남긴 가장 상징적인 저작은 **『언문지(諺文志)』**입니다. 이 책은 한글의 문자 구조와 음운 체계를 정리한 최초의 한글 문법서이자 음운론서로, 한자 중심의 지식 독점 구조를 깨뜨리고 한글을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문자로 정립하려 한 시도였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한글을 단지 ‘여성이나 하층민이 쓰는 문자’가 아니라, 논리적 체계를 갖춘 독립된 문자 체계로서 소개하며, 지식 접근권의 평등을 주장했습니다.
이는 곧 문자 해독 능력을 가진 백성이 많아질수록 사회 전체의 지식 수준이 높아지고, 실용 기술도 함께 발전할 수 있다는 실학적 사고의 연장선이었습니다.또한 유희는 **『수리정온(數理精蘊)』**을 저술하며 수학 지식을 정리했습니다.
이 책은 계산법, 도형의 이해, 도량형의 구조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수학적 지식들을 평이한 언어로 설명하고 있으며, 복잡한 추론보다는 실용적인 문제 해결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즉, **농민이 면적을 계산하거나, 상인이 가격을 계산할 수 있도록 만든 ‘생활 속 수학서’**였습니다.지도 제작, 기하학, 수리 설계 등에서도 그는 구체적인 계산 방식과 측량법을 제시하며, 기술자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도 스스로 공간을 이해하고 측정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이는 조선 후기, 인구와 도시 구조가 점차 복잡해지던 시기에 지리와 공간 인식의 확대를 가능하게 한 실질적 과학 교육 활동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지식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 유희의 실천 철학
유희의 학문적 태도는 단연코 실천 중심이었습니다.
그는 학문이 특정 계층, 즉 양반과 문벌 중심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고, 실제로 자신의 저술 대부분을 “글을 모르는 사람도 쉽게 익힐 수 있도록” 구성했습니다.
표기와 해설, 그림, 예시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그의 글은, 당대 문헌 중에서도 가장 실용적이고 교육적인 형식을 갖춘 것으로 손꼽힙니다.그는 “배우지 못한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 학문의 본질”이라고 보았으며, 지식은 내려가야 한다는 방향성을 견지했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단순히 교육의 문제를 넘어서, 사회 전체의 구조 속에서 지식 불균형을 해소하려는 근본적 시도였습니다.그가 꿈꾼 조선은 학문을 가진 자만이 아닌, 학문이 필요한 자가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열린 사회였습니다.
이 같은 생각은 현대 사회에서도 교육 평등과 공공지식 개념과 정확히 맞닿아 있으며, 유희는 그 이념을 조선 시대에 먼저 실천해낸 인물입니다.무명의 기술자들 – 현장을 지킨 이름 없는 과학자들
유희와 같은 대표 인물 외에도, 조선 후기에는 수많은 무명의 서민 기술자들, 실무형 과학자들이 존재했습니다.
지방의 서당 훈장, 향리, 의생, 사찰의 승려, 민간 천문 관측가 등은 국가 시스템 밖에서 비공식적으로 지식과 기술을 보급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들은 나무로 별자리를 설명하고, 대나무 막대기로 물의 흐름을 예측하며, 손글씨로 만든 교본으로 사람들에게 문자를 가르쳤습니다.비록 공식 역사에서는 그들의 이름이 남지 않았지만, 그들이 있었기에 조선 후기 민중 속에서 과학적 사고의 싹이 자랄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기록되지 않은 조선의 기술 인프라, 그 자체였습니다.조선 후기의 과학은 위에서만 꽃피운 것이 아닙니다.
유희와 같은 실용 지식인, 그리고 수많은 이름 없는 민중형 과학자들 덕분에 과학은 백성의 삶에 가까워질 수 있었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과학 민주화라 할 수 있습니다.그들의 이름은 적지 않아도, 그들이 만든 변화는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과학 역시, 그처럼 삶을 향하고, 사람과 연결된 과학일 것입니다.6. 우리가 이 과학자들을 다시 기억해야 하는 이유
조선 후기 과학자들은 단지 시대를 따라간 학자들이 아니라, 앞선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우주를 새롭게 이해하고, 수학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기술로 백성의 삶을 바꾸려 한 지식 실천가들이었습니다.그러나 신분의 장벽, 당파의 배제, 정치적 낙인, 역사 서술의 편향 등으로 인해 그들의 이름과 업적은 장영실만큼 빛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들을 다시 조명하는 이유는 단지 ‘숨은 인물’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과학은 시대를 바꾸는 힘이고, 진정한 지식인은 실천하는 사람임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정신은 오늘날의 연구자, 발명가, 교육자 모두가 이어야 할 조선 과학의 유산입니다.'잊혀진 역사 속 인물 탐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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