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니의 잊혀진 역사 속 인물 탐구

잊혀진 역사 속 인물 탐구에 대해서 글을 작성합니다.

  • 2025. 5. 9.

    by. 지아니13

    목차

      1. 총 대신 펜을 든 언론인의 시대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병합되면서 한반도는 35년에 걸친 식민 지배를 겪게 됩니다. 무장 독립투쟁과 비밀결사만큼이나 중요한 저항의 한 축을 담당한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언론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총 대신 펜을 들었고, 총칼 대신 글로써 국민의 정신을 일깨우고 독립의 염원을 기록했습니다.

      당시 언론은 단순한 정보 전달 매체가 아니라, 민족의 눈과 귀, 그리고 입이었습니다. 언론인들은 조선 민중의 삶을 대변하고, 역사적 불의에 저항하며, 일제의 폭력적 통치에 맞서 ‘지면 위의 독립운동’을 벌였습니다.

      2. 일제의 언론 통제, 얼마나 심했나?

      일제는 조선을 점령하면서 가장 먼저 신문과 출판을 철저히 통제했습니다. 1910년대에는 언론 활동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으며, 총독부는 신문사의 인가제, 기사 사전 검열, 발행 정지 명령, 사설 금지 등을 통해 언론의 존재 자체를 장악하려 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규제가 바로 출판법과 보안법이었습니다. 이 두 법은 언론인을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하고, 불온한 표현이라 판단되는 모든 내용은 사전에 삭제하거나 관련자를 처벌했습니다. 심지어 문장 속 단어 하나, 말투의 뉘앙스만으로도 필화 사건(筆禍事件)이 발생했고, 수많은 기자와 편집자가 체포, 투옥, 고문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인들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글로 싸우고, 글로 역사를 남기며, 검열의 칼날을 피해 저항의 메시지를 지면 위에 새겨 넣었습니다.

      3. 지면 위의 저항: 백지광고, 암호 사설, 풍자 기사

      일제강점기의 언론인들에게 있어서 저항은 총칼을 드는 대신, 글 한 줄, 그림 한 장, 편집의 공백 한 칸으로 표현되는 가장 치열한 전선이었습니다. 직접적으로 “독립 만세”를 외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지면 위에 은밀한 암호와 함축의 언어로 항일 의지를 새겨 넣었습니다. 이는 언론이 정치권력의 도구가 아닌, 시대의 양심으로 기능한 대표적인 장면들입니다.

      백지 편집: 말 대신 침묵으로 외치다

      가장 상징적인 저항의 방식은 바로 **‘백지 편집’**이었습니다. 일제가 사전검열을 통해 민감하거나 불온하다고 판단한 기사를 삭제하면, 언론사들은 그 자리를 다른 기사로 채우지 않고 의도적으로 빈칸으로 남겼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공간 낭비가 아니라, "우리가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수 없었다"는 항의의 표시이자, 검열에 대한 조용한 비판이었습니다.

      백지 기사, 백지 사설, 혹은 전체 면을 백지로 발행한 사례도 있었으며, 이는 독자들에게 침묵 속의 진실을 상상하게 만드는 강력한 상징성을 띠고 있었습니다.
      신문 한 면이 아무것도 없이 발행되었을 때, 독자들은 그 여백 속에서 국가의 현실, 억압의 본질, 언론의 한계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침묵은 때로는 수천 마디의 외침보다 강렬했습니다.

      암호 사설과 은유적 기사

      검열을 피해 살아남기 위해, 언론인들은 정교한 암호와 비유의 언어를 개발했습니다. 기사 제목은 평범하지만,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진짜 메시지는 그 문맥과 구조 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조선의 현실을 ‘무릎 꿇은 독수리’, ‘길 잃은 배’, ‘잠든 사자’에 빗대거나, 불의한 정세를 ‘가시밭에 핀 꽃’, ‘끊긴 바람개비’ 등의 이미지로 표현했습니다.
      이러한 은유적 표현은 검열관이 쉽게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도록 설계되었지만, 독자들에게는 오히려 더욱 명확하고 감정적으로 전달되었습니다.

      사설에서는 반어법이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식민지 덕분에 우리는 문명을 배운다’는 식의 반어적 칭찬을 통해, 일제 통치에 대한 비판을 교묘하게 담아낸 것입니다.
      당시 사설을 꼼꼼히 읽는 일은 일종의 ‘해석의 정치’였고, 사람들은 한 문장, 한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진심을 읽어내는 훈련을 자연스럽게 받았습니다.

      풍자만화와 시, 우화 기사: 대중과 웃으며 공감한 저항

      글뿐만 아니라 시각적인 표현과 문학적 장르도 저항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신문의 한 면을 채운 풍자만화는 검열관보다 독자가 더 잘 알아보는 방식으로 일제의 모순을 비꼬았습니다. 한 예로, 일본 관리를 쥐로 표현하거나, 군국주의를 조종하는 꼭두각시 인형으로 묘사한 그림들은 독자에게 유쾌한 통쾌함을 주었지만, 정작 검열 당국은 그 의미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해 통과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또한, 풍자시와 우화 기사는 서정성과 문학성을 이용해 정치적 메시지를 우회적으로 전달했습니다.
      가령 어떤 기사에서는 "산속 토끼들이 모여 인간의 법을 이야기했다"는 설정으로 시작되지만, 읽다 보면 그 ‘토끼’는 조선 민중을, ‘인간의 법’은 일본 제국주의를 의미함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문학적 장치는 일제의 고압적인 서사에 맞서 조선 민중이 스스로의 말과 이야기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조선일보·동아일보의 상징적 저항 사례

      조선일보는 ‘민중의 신문’을 자처하며, 농민과 노동자의 삶, 도시 빈민의 현실, 조선어 교육의 필요성 등을 기사화했습니다. 동아일보는 문화, 체육, 예술 분야의 기사를 통해 민족의 자긍심을 끌어올리는 데 주력했고, 이는 점차 검열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특히 1936년 동아일보가 보도한 **손기정 선수의 금메달 기사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발행한 ‘일장기 말소 사건’**은 단연 가장 상징적인 저항입니다.
      이는 단순한 편집 실수가 아닌, 민족의 정체성과 독립의 열망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의도적인 편집 행위였으며, 이후 신문사는 정간(停刊) 처분을 받았고 관련자들이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언론인들은 펜 하나로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가며, 때로는 유머로, 때로는 눈물로, 그리고 침묵으로 민족의 고통과 독립의 열망을 전달하는 데 모든 창의력을 쏟아부었습니다.
      지면 위의 백지, 비틀린 시, 해학 가득한 그림 한 장이 바로 그 시대 최전선의 항일 무기였던 셈입니다.

      일제강점기 언론인들의 저항 기록 – 펜으로 항일한 사람들

      4. 대표적인 항일 언론인과 신문사들의 활동

      일제강점기, 조선의 언론은 단순히 소식을 전하는 매체 이상의 의미를 지녔습니다.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고, 독립의 의지를 일깨우며, 불의한 권력에 맞서 싸우는 정신적 저항의 거점이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같은 민족지와, 수많은 항일 언론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글을 쓰는 것을 넘어, 글로서 조선의 정신을 지키는 일이야말로 가장 치열한 독립운동임을 증명해냈습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 민족 언론의 쌍두마차

      1920년대, 조선총독부는 문화통치라는 이름 아래 한시적으로 민간신문 발행을 허용했지만, 이 정책은 곧 조선인의 사상을 통제하고 민심을 관리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틈을 비집고 등장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검열의 경계를 넘나들며 민족의 목소리를 지면에 담았습니다.

      조선일보는 1920년 창간 직후부터 조선 민중의 삶과 고통, 그리고 독립의 염원을 실어내는 데 주력했습니다.
      백범 김구의 항일 활동을 비중 있게 보도했으며, 문자보급운동을 통해 글을 몰랐던 대중에게 문해력과 민족의식을 함께 전하려 했습니다.
      또한 국채보상운동, 청년운동, 농민 계몽운동 등을 지면에 소개하며, 언론의 교육 기능과 각성 기능을 적극 실천한 신문이었습니다.

      동아일보는 문화와 체육, 학술 분야를 통해 항일 의식을 넓히는 전략을 택했습니다.
      특히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 금메달을 획득했을 당시, 동아일보는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실어 전 세계에 일제 통치에 대한 조선인의 저항 의지를 알렸습니다.
      이 사건은 일제의 격분을 불러일으켜 신문 정간과 관련자 체포로 이어졌지만, 동아일보는 끝까지 지면을 통해 민족의 자긍심과 역사의식을 지켜냈습니다.

      이광수 – 사상적 전환 전, 언론인으로서의 족적

      이광수는 일제강점기 초반 민족주의 문필가이자 언론인으로서 강한 영향력을 가졌습니다.
      〈독립신문〉과 〈조선일보〉의 기자로 활동하며, 특히 **‘민족개조론’**이라는 사설을 통해 조선 민족의 자각과 문명화를 촉구하는 논조를 펼쳤습니다.

      그의 글은 당대 청년층과 지식인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언론을 통한 민족계몽의 대표적 사례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1930년대 이후 친일로 전향하며 일제의 정책을 지지하게 되면서, 이후 평가에는 심각한 논란이 뒤따릅니다.
      그럼에도 초기 언론인으로서의 활동은, 당대 언론이 지니고 있던 지식인의 정치적 책임과 사명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재조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송진우 – 동아일보를 지킨 민족 언론의 수호자

      송진우는 동아일보의 사장으로 재임하면서, 신문사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수많은 위기와 탄압을 버텨낸 중심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언론이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닌, 민족정신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라 믿었고, 일제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사설, 기사, 교육 프로그램 등으로 민족 의식을 고양했습니다.

      특히 그는 항일 지식인들과의 연대, 청년층 지식 계몽 운동에 적극적이었으며, 동아일보의 문자보급 운동‘일장기 말소 사건’ 같은 저항적 편집 결정의 배경에도 송진우의 철학이 작용했습니다.

      광복 직후에는 한민당 창당을 주도하며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도 참여했지만, 1945년 12월 정치적 테러로 암살되며, 한국 언론사와 정치사에 큰 충격을 남겼습니다.
      그의 삶은 ‘펜으로 싸운 독립운동가’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전형이었습니다.

      장덕수 – 언론을 통한 지식인의 사회적 실천

      장덕수는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조선 지식인 언론의 ‘품격’을 구축한 인물입니다.
      그는 단순한 보도에 그치지 않고, 사설과 기획기사 등을 통해 **당대 사회 문제를 진단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사상형 언론인’**으로 평가받았습니다.

      민족교육, 조선어 교육, 조선사 서술 등 문화운동에도 적극 참여했으며, 신문을 통한 민족 문화 정체성 회복에 힘썼습니다.
      그는 또한 일제에 의해 금기시되었던 역사 서술의 왜곡을 비판하고, 조선 민중의 주체적 목소리를 지면에 실으려 애쓴 지식인의 모델로 남아 있습니다.

      이렇듯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비롯한 언론사, 그리고 송진우, 장덕수, 이광수 같은 언론인은 단순한 ‘보도자’가 아니라, 당대 조선 사회의 저항적 지성이었습니다.
      그들은 활자의 힘으로 시대의 불의를 고발하고, 말의 무게로 민족의 정신을 지켜냈습니다.
      그리고 그 기록은 지금도 대한민국 언론이 지켜야 할 저널리즘의 양심과 용기의 원형으로 남아 있습니다.

      5. 왜곡과 침묵 속에서 끝까지 남은 목소리

      193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문화통치’의 가면을 벗고 본격적인 민족말살 정책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조선어 사용이 금지되고,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지우려는 시도가 노골화되었으며, 언론 역시 그 칼끝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검열은 더욱 정교해지고, 언론은 일제의 군국주의 선전을 보조하는 도구로 전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면은 검열로 까맣게 지워졌고, 항일 기사는 단 한 줄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그나마 명맥을 이어가던 대표 민족지였지만, 결국 1940년 강제 폐간되며 조선 지면 언론의 시대는 사실상 종언을 맞게 됩니다.
      대부분의 언론사는 일본 정부가 주도하는 기관지로 흡수되거나,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통로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끝까지 펜을 놓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름 없이, 얼굴 없이, 조용하지만 끈질기게 '말할 수 없음 속에서도 말하는 법'을 선택한 언론인들이었습니다.

      익명의 펜, 지하 신문 – '글로 싸우는 underground'

      공식적인 신문이 사라진 시대, 일부 언론인들은 지하에서, 숨어서, 익명의 글로 저항을 이어갔습니다.
      이들은 조선 안에서 ‘underground 신문’을 제작하거나, 민족 학교나 교회, 비밀결사 내부에서 배포용 소책자나 뉴스레터 형식의 항일 문서를 만들어 유통했습니다.

      이러한 비밀 출판물은 고정된 발행일 없이 간헐적으로 발간되었고, 단속을 피하기 위해 소규모로 손으로 베껴 쓰는 방식도 활용되었습니다.
      주요 내용은 일제의 만행 폭로, 민중 생활 개선 지침, 해외 독립운동 소식 등으로 구성되었고, 이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정보와 동기를 제공하는 귀중한 매체로 기능했습니다.

      당시 underground 신문은 단순한 출판물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나누는 정신의 전달체였습니다.
      한 장의 전단지, 한 줄의 구호는 탄압의 어둠을 뚫고 민중의 의식 속에 불씨를 심었습니다.
      그들은 종이와 잉크가 아니라 신념과 연대의 의지로 글을 쓰고 전했습니다.

      국경 너머에서 이어진 언론 저항의 맥

      지상 언론이 침묵한 이후에도 언론 저항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장소만 달라졌을 뿐, 조선 밖에서 오히려 더 활발한 항일 언론 활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중국 상하이, 만주, 연해주,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등지의 한인 독립운동가들과 이주민들은 해외에서 언론의 불꽃을 이어갔습니다.

      이들이 제작한 신문들은 단지 뉴스 제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해외 독립운동 네트워크의 중심 축이자 항일 사상의 전달자 역할을 했습니다.

      • 〈대한인국민회보〉 (하와이/미주): 1909년부터 발간되었으며, 미국 내 한인들의 독립운동 조직인 대한인국민회의 공식 기관지였습니다.
        이 신문은 국내 소식을 알리고, 독립운동 자금 모집과 외교활동을 조율하는 중심 역할을 하며 지구 반대편에서 독립의지를 결집시켰습니다.
      • 〈신한민보〉 (샌프란시스코): 1913년 창간, 항일 운동 소식과 세계 정세를 분석해 국내에 몰래 유입되며 정보전의 전초기지로 활용되었습니다.
      • 〈자유신문〉 (상하이/임시정부 기관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에서 발행되며, 조선의 독립 정당성과 국제 여론전을 위한 영문·중문판 선전지를 함께 제작했습니다.
        이 신문은 국내 비밀 네트워크를 통해 조선 안으로 전달되며, 민중에게 희망과 소식을 전하는 생명선이었습니다.

      이들 신문은 국경을 초월한 펜의 독립운동이 가능함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언어와 국경의 장벽을 넘어서, 일본 제국주의의 검열을 무력화시키는 글로벌 저항의 전략이었던 셈입니다.

      침묵의 시대에 남은 소리, 지금의 우리가 들어야 할 이유

      공식적인 언론은 사라졌고, 자유로운 보도는 꿈이었으며, 글 한 줄 잘못 써도 구속과 고문이 따랐던 시대였습니다.
      그럼에도 언론인들은 자기 이름 없이, 자신이 만든 기사조차 끝내 읽지 못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글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언론은 생계 수단이 아니라 정의와 진실을 향한 실천이자, 저항의 방식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듣는 언론의 자유는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 자유는 침묵 속에서도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사람들, ‘지면이 없어도 글을 쓰겠다’는 사람들, 목숨을 걸고 진실을 외친 이들의 피와 용기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그들의 기록은, 오늘날 언론이 자기검열에 멈출 때마다, 권력 앞에 침묵할 때마다 다시 꺼내 읽어야 할 교훈이자 경고입니다.
      그들이 남긴 단 하나의 기사, 사라진 사설, 유실된 신문 한 장은 여전히 묻고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

      6. 오늘날 우리가 되새겨야 할 언론 저항의 가치

      일제강점기 언론인들은 ‘기사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걸고 진실을 기록한 투사였습니다. 그들이 남긴 기사 한 줄, 백지 편집 한 면은 지금도 언론 자유와 저널리즘 윤리에 대해 우리가 묻고 배워야 할 소중한 유산입니다.

      오늘날 언론은 보다 자유롭고, 다양한 목소리를 담을 수 있는 시대에 있지만, 그 자유가 피와 저항의 역사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은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기록했던 침묵의 저항은, 오늘날 우리가 진실을 이야기하고 비판하며 자유를 지키는 행위의 뿌리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