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니의 잊혀진 역사 속 인물 탐구

잊혀진 역사 속 인물 탐구에 대해서 글을 작성합니다.

  • 2025. 6. 4.

    by. 지아니13

    목차

      “승전보는 울렸지만, 누가 싸웠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조선의 긴 역사 속 전쟁들.
      임진왜란, 병자호란, 여진 정벌, 이인좌의 난, 세도정치기의 민란까지.
      기록에는 늘 ‘총사령관’의 이름이 등장하지만,
      정작 승리를 만든 현장의 인물들,
      이름 없는 장군들, 무명의 지휘관들의 이야기는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조선을 지켰습니다.

      이름 없이 지휘하던 ‘현장 장군’들

      조선시대의 전쟁 기록을 살펴보면, 전투의 승패를 좌우했던 ‘현장 지휘자’의 이름은 놀라울 정도로 자주 생략되어 있습니다.
      역사책에는 왕과 대장급 장수, 즉 총지휘관과 주요 공신들의 이름만이 선명히 기록되어 있을 뿐,
      정작 실제로 적과 칼을 맞대고 싸우고, 병사들을 이끌며 성을 지키고, 피를 흘리던 이들—즉, ‘현장 장군’들의 이름은 대부분 가려져 있습니다.

      조선의 군사 조직은 중앙군(훈련도감·금위영 등)과 지방의 진영군, 향병, 의병 등으로 구성돼 있었으며,
      전쟁이 벌어졌을 때는 각 지역의 병마절도사나 수군절도사 휘하에 수많은 부장(副將), 종사관, 방어사, 권관, 첨사들이 실전을 지휘했습니다.

      이들은 전투 전 정찰과 병력 편성, 군량 확보, 전투 중에는 방어선 배치, 함정 설치, 화포 조작, 전술 지시, 전투 후에는 포로 심문, 전사자 처리, 마을 복구까지 맡았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역사 기록 체계는 이들을 ‘정식 사관의 기록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에서 김시민 장군과 함께 싸운 수많은 지방 군관들의 이름은 지방 사찰의 비문이나 족보에만 간략히 남아 있을 뿐,
      실록이나 공신록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또한,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방어선 곳곳에서 활약했던 진무장, 포수 지휘관, 성문 수비대장들도
      그들의 공로보다는 ‘총사령관이 승리를 거두었다’는 요약된 문장으로 덮였습니다.

      왜 이름이 지워졌을까?

      첫째, 조선의 기록 체계는 철저히 계급 중심, 관직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장수들의 이름이 역사에 남으려면 정3품 이상의 문관 혹은 무관 관직자여야 했으며,
      그 외 대부분의 중간·하급 지휘자들은 종사관, 보좌관, 또는 **‘무명 부장’**이라는 표현으로 뭉뚱그려졌습니다.

      둘째, 공신 책봉 제도 자체가 일부 인물에게 전공을 집중시키는 방식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실제 전투 공로가 있었던 다수의 지휘자나 병사들은 의도적으로 평가에서 배제되었고,
      주요 정치 세력에 속하지 않았던 이들은 공신 품계에서 누락되기 일쑤였습니다.

      셋째, 당시의 ‘충성 서사’는 왕에게 충성한 몇몇 영웅을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쓰였기 때문에
      전투 현장의 집단 지휘 시스템은 평가받기 어려운 구조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명의 현장 장수들은 전공을 세우고도 침묵해야 하는 위치에 놓였던 것입니다.

      묻혔지만 잊히지 않은 그들

      하지만 그들의 공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흔적은 아직도 지방 문중에서 전해오는 족보의 뒷장,
      향리의 고택 안에 걸린 빛 바랜 현판,
      성곽 아래 작은 비석,
      혹은 구술로 내려오는 전쟁 이야기 속에 살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라 좌수영에서 왜적의 배를 기습 공격해 침몰시킨 이름 없는 수군 장교는
      이순신의 일기 속 “모든 병졸이 힘을 다했다”는 문장 뒤편에 숨어 있었고,
      경상도 김해의 한 포졸 부대장은 3일 밤낮을 쉬지 않고 방어진을 구축해 마을을 지켰지만,
      공식 기록에서는 “해당 지역은 무사 통과”로만 언급됩니다.

      이름이 없다고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이름이 지워졌다고 전공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다만, 역사라는 무대에 초대받지 못한 장수들이었을 뿐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무명의 장수들, ‘전투의 손’이자 ‘지휘의 눈’이었던 이들
      다시 무대 위로 불러내는 일입니다.
      기록이 침묵한 그들의 이름을 복원하고,
      그들이 세운 승리의 무게를 다시 나누는 일—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지만 깊은 역사 복원의 시작입니다.

      이순신 장군도 그들을 잊지 않았다

      역사 속 ‘이름 없는 장군들’의 전공이 기록에서 지워졌던 시대,
      그런 흐름에 맞서 “절대 잊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기록을 남긴 인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조선 수군의 중심, 충무공 이순신입니다.

      《난중일기》를 펼쳐 보면,
      그 속은 단순한 전투 일지가 아닙니다.
      그 안에는 전쟁터의 피와 땀, 병사들의 두려움과 용기, 그리고 현장을 지탱한 ‘이름 없는 이들’의 기록이 살아 숨 쉽니다.

      한 줄이라도 이름을 남기려 했던 지휘관

      《난중일기》 속 이순신 장군은
      "○○가 화살을 맞고도 물러서지 않았다",
      "○○는 밤새 목책을 보수하였다",
      "○○가 목숨을 걸고 적선에 올라 불을 질렀다"
      와 같은 구절들을 남기며,
      전투에서 직접 활약한 병졸과 하급 장수들의 공을 하나하나 기록합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정규 무관도 아니었고,
      공신 책봉은커녕 이름조차 실록에 남지 않은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그들의 이름, 나이, 심지어 출신 지역까지 메모하며
      “함께 싸운 사람은 절대 잊지 않겠다”는 지휘관으로서의 깊은 윤리와 인간적 존중을 보여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1597년 7월 17일자 난중일기에는

      “포졸 정윤생이 사력을 다해 수군 노를 젓고, 적선에 불을 붙이니 큰 불꽃이 일었다.”
      는 문장이 등장합니다.
      정윤생은 관직도 없고, 어떤 공식 군사기록에도 등장하지 않지만,
      그의 현장의 전공은 이순신의 손에 의해 역사의 한 자리에 새겨졌습니다.

      이순신의 기록 철학 – "싸운 자는 모두 기억되어야 한다"

      이순신은 단순한 무장이 아니라 철저한 기록자였습니다.
      그는 장계(공식 보고서)에는 군략과 전황만을 보고했지만,
      자신의 일기장에는 철저히 현장의 사소한 공과 이름들을 남겼습니다.

      • 죽은 병사의 이름을 한 명씩 기록하며 장례까지 챙겼고,
      • 전투 중 기지를 발휘한 부하의 행동을 그날 그날 일기로 남겼으며,
      • 공을 세운 이가 보상을 받지 못할까 봐, 별도로 명단을 작성하여 후일에 대비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감성의 문제나 인간미의 차원이 아닙니다.
      이순신은 **"전투는 총사령관이 이긴 것이 아니라, 수많은 손이 함께 이룬 것"**이라는
      현장 기반 리더십을 철학으로 실천한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는 영웅이 아니라, ‘싸운 사람들의 연합’이 승리의 주체라고 믿었고,
      그렇기에 자신의 일기에 그들의 이름을 새기고, 기억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름 없이 죽어간 자들에게 바친 기록

      임진왜란 당시 전사자 수는 약 20만 명.
      이 중 대부분은 향병, 의병, 정규군 하급 병사들이었으며,
      그들의 이름은 종종 "군졸 몇 명 전사"라는 문장으로만 남았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의 기록에서는
      그 이름이 ‘숫자’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이야기’로 복원됩니다.

      그는 병사의 죽음을 단지 ‘손실’로 여기지 않았고,
      전사자 한 명 한 명의 죽음에 대해 애도의 문장을 남기고,
      가족에게 연락할 수 있도록 관청에 통보하며 정당한 명예와 배려를 실천했습니다.

      《난중일기》의 구절 중

      “서생 정운, 사졸 김득삼이 함께 죽었으니, 충의가 죽지 않았도다.”
      라는 문장은,
      단 한 줄로도 이름 없는 자의 죽음을 ‘의로운 역사’로 되살리는 힘을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기록의 윤리

      이순신의 방식은
      단지 영웅의 인간미를 드러내는 미담이 아니라,
      누가 역사에 이름을 남길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깊은 성찰과 실천입니다.

      • 직책이 없다고,
      • 계급이 낮다고,
      • 문벌이 없다고 해서
        그들의 전공이 묻혀서는 안 된다는 것.
        **‘함께 싸운 자를 기록하는 것 자체가 정의’**라는 믿음.

      이순신은 그것을 행동으로 남겼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역사 속 무명 장군들의 이름을 복원하고,
      기록되지 않은 전공을 다시 말하려 한다면
      ,
      그 출발점에는 이순신 장군의 이런 철학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역사책에 실리지 않은 장수들, 조선의 이름 없는 영웅들을 찾아서

      이름을 지우는 방식, 역사 기록의 정치성

      “이긴 자는 남고, 기록된 자만 기억된다.”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나열이 아닙니다.
      특히 조선과 같은 중앙 집권적 유교 국가에서는 ‘기록’이 곧 권력이었고,
      무엇을 쓸지, 누구를 지울지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당대 권력의 가장 정교한 정치 행위였습니다.

      조선의 기록 체계 – 권력 중심 서사의 구조

      조선은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기록 국가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의정부등록》 등 정무·군무·일상까지 상세히 남긴 방대한 문서 체계는
      그 자체로 조선의 통치 능력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 기록은 철저히 ‘중앙 관료’, ‘왕권’, ‘정식 관직자’ 중심으로 이뤄졌습니다.
      정3품 이상의 문·무관, 유력 가문의 인물, 국왕의 눈에 든 이들이 아니라면,
      전쟁에서 어떤 공을 세웠든,
      재난을 막았든,
      민란을 진압했든
      그 공로는 기록되지 않거나, 다른 이의 이름으로 대체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특히 무명의 군인, 중하위 무관, 향병 대장, 의병장 등은
      공적이 있었어도 단지 “부장들이 잘 따랐다”는 식의 문장 하나로 축약되었고,
      그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사관은 누구의 이름을 남기고, 누구를 지웠는가

      조선의 사관은 겉으로는 중립을 표방했지만,
      사실상 **당대 권력 구조와 학문 이념의 통제 아래 활동한 ‘선택적 기록자’**였습니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지방 관료와 민간 의병장이 실제 전투를 지휘했음에도,
      공신록에 오르지 못한 경우는 부지기수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출신 성분이 낮았거나 향반(鄕班)에 속한 지방 인사였을 경우
        → 중앙에서 ‘공을 세운 자’로 보기 어려워 배제됨
      2. 정규군 체계 외의 활동(예: 의병, 향군)일 경우
        → 비공식 전투로 간주되어 사관 기록 대상 아님
      3. 기존 공신 가문과의 정치적 충돌 가능성
        → 공로를 드러내는 것이 오히려 ‘질서 위협’으로 받아들여짐

      이처럼 기록의 삭제는 정치적 판단에 따라 이뤄졌고,
      그 결과 수많은 전공자들이 이름 없는 존재로 사라졌습니다.

      공신록은 공로의 기록이 아닌, 권력의 보상 수단이었다

      조선은 전쟁 후 **‘공신 책봉’**이라는 포상 제도를 통해 유공자를 선정했습니다.
      이 제도는 전공에 대한 보상이자, 왕권에 충성한 자를 우대하는 장치였으며,
      따라서 단순히 ‘전투에서 용맹을 보인 자’보다는
      ‘왕과 권력에 가까운 자’, ‘기록에 이름이 남은 자’가 책봉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현상이 발생합니다:

      • 실제 전투를 지휘했던 부장 대신, 보고서를 제출한 상관이 공로를 가져감
      • 전투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병사보다, 군량을 조달한 지방 관리가 더 높은 공신으로 인정됨
      • 무관보다 문관이 더 높은 지위를 받아, 전투의 주역이 문서상 보좌자 또는 익명 처리

      결과적으로, 기록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현장 장군들이
      역사 속에서 이름을 잃게 되는 구조적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이름은 지워졌지만, 존재는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흔히 “기록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무명의 전공자들은 분명히 존재했고,
      조선을 지켜냈으며,
      그 자취는 공식 기록의 바깥, 즉 지방 문중 기록, 사당 현판, 구술 전통, 야사 속에 조용히 남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남 해남에서는 “울돌목 옆 적선을 기습해 불태운 정체불명의 수군 장교” 이야기가
      지금도 민간 구술 전승으로 남아 있으며,
      경북 상주의 한 작은 향교에는 “1594년 경 왜군을 퇴각시킨 이가 있었으나, 성명을 알지 못함”이라는
      기념비조의 목판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런 예는 수백 건에 달하며,
      공식 기록이 배제한 그들을 오늘날 우리가 ‘시민 역사학’의 방식으로 복원할 필요성이 절실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름을 지우는 것은 단순한 생략이 아니라, 역사 해석의 권력이다

      조선의 역사는 누락의 역사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누락은 우연이 아니라, 의도된 정치적 선택의 결과였습니다.

      우리가 이제 해야 할 일은
      “기록된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라는 감각으로
      기억의 사각지대에 있던 이들을 복원하는 일입니다.
      이름은 지워졌을지라도,
      그들이 남긴 전공과 존재는 지금 우리가 다시 말할 때
      비로소 역사로 귀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기억의 사각지대’

      공식 역사에 이름이 없다 해서, 그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조선을 지킨 무명의 장수들, 이름 없는 지휘관과 병사들은
      역사책 밖의 공간, 즉 우리가 흔히 지나쳤던 구석구석에서 여전히 기억되고, 전해지고, 살아 있습니다.
      이들이 기록되지 않은 이유는 앞서 언급한 정치성과 계급 구조 때문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공식 기록의 바깥,
      지역 공동체의 구술 전통, 향토 문서, 마을의 사당, 비석, 전설, 민간 신앙, 이름 없는 무덤 등을 통해
      ‘다른 방식의 역사’로 남아 있는 존재들입니다.

      1. 향토사와 족보 속 ‘비공식 전공자’들

      지방의 문중에서 간직한 족보나 향토사 자료에는
      공식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는 ‘현장 전공자’들의 이름과 행적이 드물지 않게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전라도 장흥의 한 문중 족보에는
      “임진년 왜란 때 포구에서 화살을 맞으며 적선을 불태운 자, 경사 최득명”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는 공신도 아니고, 무관직도 없었지만,
      문중과 마을 공동체는 그를 ‘의로운 조상’으로 기억하고
      지금도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경상북도 안동 지역 향토사에는
      병자호란 당시 마을을 방어한 향병 대장 김순달의 이야기가 구술 채록으로 남아 있으며,
      그가 만들었다는 목책의 흔적과 방어진 터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진 않지만
      지역 주민들의 기억 속에서는 여전히 **‘전쟁을 막은 영웅의 땅’**으로 여겨집니다.

      이처럼 공식적 보상이나 문서화 없이도,
      공동체 안에서 그들은 ‘살아 있는 역사’로 기억되어 온 것입니다.

      2. 마을 사당과 비석, ‘현장 기억의 표식’

      전국 곳곳의 작은 마을을 가보면
      입구에 낡은 비석 하나, 혹은 초라한 사당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설명이 자세하지 않거나, 이름조차 모르는 경우도 있지만
      그 중 상당수는 조선 시대 전쟁 속 이름 없는 전공자의 흔적입니다.

      충청도 예산에는 “병란 시 성을 지킨 이가 있었으나 이름은 묻지 못했다”는 문구가 새겨진
      무명의 전공비가 있으며,
      전남 해남의 한 마을에는
      “왜군을 막고 산중에서 부상자 치료를 맡은 아낙”을 모신 무명 여인당이 존재합니다.

      이런 공간들은 역사적 진위 여부를 떠나
      기억의 주체가 국가가 아닌 ‘공동체’였다는 점,
      그리고 기록되지 않아도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남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3. 야사와 전설 속 ‘다른 버전의 전쟁’

      공식 실록이나 전투 기록에는 없지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속엔 자주 등장하는 **‘이름 없는 영웅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종종 전설이나 민간 설화 속 인물로 나타나기도 하고,
      야사(野史), 혹은 지리지의 ‘잡기’ 항목에 간략히 언급되기도 합니다.

      예시:

      • 강원도 간성 지역 전설: 한 농부가 왜군의 야간 습격을 미리 감지해 마을 종을 울려
        전 주민이 산으로 피신했다는 이야기. 그 농부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지만
        매년 정월대보름마다 ‘종소리 굿’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됨.
      • 함경도의 야사 문헌: 17세기 초 여진족 침입 당시,
        “모자(母子)가 산속을 수색해 군에게 길을 안내하였다”는 기록이
        민간 의병 승전 이야기 뒤에 첨언됨.

      이런 이야기들은 사실 여부를 떠나
      역사에서 지워진 이들의 존재를 다시 묻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4. 왜 ‘사각지대’를 복원해야 할까?

      지금 우리가 이 ‘기억의 사각지대’를 복원하려는 이유
      단지 감성적 추모 때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곧 역사 해석의 민주화이고,
      기록 권력의 불균형을 되짚고 바로잡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기억되지 않으면,
      그 전공은 부정당합니다.
      기록되지 않으면,
      그 존재는 다음 세대에게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공백 속에서
      역사는 ‘누군가만의 이야기’로 좁아지고,
      우리 모두의 역사로서의 의미를 잃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실천

      •  마을 사당, 전공비, 향토사 기록 등을 함께 답사하고 기록하기
      •  구술 자료를 수집하고, 디지털로 정리해 지역 아카이브로 보존하기
      •  이름 없는 영웅들의 이야기로 교육 자료, 콘텐츠, 다큐를 제작하기
      •  공교육 내 ‘공식 기록의 한계’와 ‘민중 기억의 힘’을 함께 가르치기
      •  “기록은 권력이다”라는 감각을 역사 콘텐츠에 함께 담기

      우리가 외워야 할 이름은,
      공신록에 적힌 몇몇 영웅만이 아닙니다.
      전투의 전선 가장 앞에서, 혹은 마을의 뒤안길에서
      조선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버티고, 지휘했던 이름 없는 장수들
      지금 우리가 다시 불러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억되지 않은 전공은
      오늘 우리가 기억함으로써 역사로 복원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 역사책 밖에 있는 전쟁 이야기에도 귀 기울이기
      •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없던 전공으로 보지 않기
      • 무명의 이름을 되살리는 시민 기록 프로젝트 참여하기
      • ‘전공은 기억되어야 한다’는 감각을 교육과 콘텐츠에 담기

      그들의 이름은 지워졌지만,
      그들의 용기와 헌신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조선을 지킨 수많은 무명의 장군들,
      그 이름 없는 전공을 오늘 우리가 다시 부르고, 기록할 차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