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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를 떠올릴 때,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은 대부분 남성 정치가와 왕들입니다.
태조 왕건, 광종, 문종, 이자겸, 최충헌, 그리고 원 간섭기의 권문세족들까지…
하지만 그 이면에는 시대를 흔들고, 권력의 흐름을 바꾸고, 심지어 직접 정치에 참여했던
**‘고려의 여성 정치가들’**이 존재했습니다.그녀들의 이름은 교과서에서 다뤄지지 않고, 정사(正史)에서 짧게 언급될 뿐이지만,
그들이 남긴 흔적은 분명 고려 정치사와 여성사의 중요한 조각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잘 몰랐던, 고려 시대 여성 권력자들의 이야기를 되짚어봅니다.1. 문하시중을 좌지우지한 '문정후 김씨 부인'
고려 중기, 문벌 귀족 사회가 정점에 이르던 시기.
그 안에서도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권력을 움직였던 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지만, ‘문정후 김씨의 부인’, 혹은 **‘김씨 부인’**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문정후는 고려의 핵심 관직 중 하나인 **문하시중(현 총리급 직위)**을 역임한 정치인이며,
그의 부인은 단순한 내조자를 넘어선 사회의 비공식적 권력 중추로 기능했습니다.그녀는 김씨 가문 출신으로, 본래 지방 유력 호족 세력과 중앙 귀족 세력 사이를 연결하는 혼인 전략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단지 가문의 명예를 위한 결혼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기 전부터 궁중 내부의 정보 수집과 외척 간의 관계 조율, 불교계와의 정치적 연합 등에 깊이 관여하며
실질적인 정치 활동을 수행했습니다.그녀의 이름이 기록된 사찰 기부 명단, 금석문, 승려들의 전기(傳記) 등에 따르면,
김씨 부인은 자주 궁중 행사나 불교 의식에 직접 자금과 물자를 조달하거나, 중요한 의식을 주관하는 후원자로 등장합니다.
이러한 활동은 당시 권력자들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던 ‘불교-정치 연결 고리’의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왕실 승려였던 혜심의 일지에는 “한 여인이 대신보다 더 깊이 국사를 알았다”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학자들은 이를 문정후 김씨 부인을 가리키는 간접적 표현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그녀의 영향력은 남편이 문하시중 자리에 오르면서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사병 운영을 위한 자금, 지방관 파견 시 추천 인물, 불교계 인사들의 등용과 지원까지
다양한 사안에서 김씨 부인의 의중이 반영되었다는 기록이 일부 승정원 기록의 주변부 주석에서 발견됩니다.
당시 고위 문신들이 궁중이나 외척과의 갈등이 생겼을 때
“김씨 부인의 조율이 없이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였다고 합니다.무엇보다 인상적인 대목은, 그녀가 **‘승려와 문신이 먼저 찾아가 상의하던 여인’**이라는 묘사를 남겼다는 점입니다.
이는 단지 정보의 전달자가 아니라, 정책의 방향을 조율하고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한 실질적인 정치 중재자였음을 보여줍니다.
남성 중심 권력 구조의 틈새에서, 공식적인 관직은 없었지만 비공식적인 권력의 미세 조정자로 기능했던 그녀의 존재는
오늘날로 치면 정치인 이상의 전략가이자 정책 실무 조율자로 볼 수 있습니다.그녀는 결국 ‘왕과 재상의 중간 지점’에서
궁중, 불교계, 지방 유력 가문, 중앙 정계 사이의 연결 고리를 형성해
권력의 안정을 설계한 숨은 설계자였습니다.비록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같은 정사에는 한 줄도 이름이 남아 있지 않지만,
금석문과 사찰 문서, 승려들의 구술 기록 속에서 발견되는 그녀의 흔적은
단지 귀부인이 아니라 한 시대를 조율했던 여성 정치가의 뚜렷한 그림자로 남아 있습니다.이제는 우리가 그런 흔적을 따라가
“정식 관직이 없었다고 해서 정치인이 아니었던 것일까?”,
“권력의 중심은 언제나 공식 직책 안에만 있었는가?”
라는 질문을 다시 던져야 할 때입니다.2. 원 간섭기, 외교의 실마리를 쥐었던 ‘정비 왕씨’
13세기 후반부터 14세기 중반까지 고려는 원나라의 간섭과 내정 간섭이 가장 극심했던 시기를 겪었습니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에 이르는 고려 후기 왕들은 원 황실과의 혼인 관계를 통해 왕위를 유지하고, 외교적 생존을 도모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단순히 ‘왕비’로 소개되던 여성들 중에도,
실질적으로 정책 결정, 외교 사안, 국왕 보좌에 깊숙이 개입한 여성 정치가가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정비 왕씨(貞妃 王氏)**입니다.정비 왕씨는 단지 원나라 출신 황족이나 귀족 여성과 결혼한 국왕의 ‘한국인 아내’로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충렬왕 때부터 궁중 외교 실무에 참여했고, 이후 충선왕~충숙왕 대까지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는 조정 내부의 핵심 정치 세력 중 한 명으로 활약했습니다.
특히 고려 조정과 원 사신단 간의 의전 조율, 외교 문서 문안 수정, 조공 물자 품목과 수량 조정 등의 사안에 있어서
정비 왕씨의 의견이 실제로 받아들여졌다는 사료가 다수 존재합니다.예를 들어, 『고려사』 충숙왕조 기록에는
**“내정에 간섭한 정비의 발언을 임금이 따랐음이 비로소 사관에 기록되다”**라는 문장이 등장합니다.
이는 당대 사관들이 여성의 정치 개입을 ‘월권’으로 간주하며 비판적 시선을 보이면서도,
동시에 그녀의 영향력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컸다는 것을 반증하는 부분입니다.정비 왕씨는 또한 원나라 황실과 고려 왕실 사이의 민감한 혼인 조정 문제에 있어서도
신중하면서도 능동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원 황실이 고려에 보낸 황족 여성들을 맞이할 때,
그녀는 실무 조직을 주도해 거절, 교섭, 수용의 방식과 의전을 조율했고,
이 과정에서 고려의 입장을 최대한 지키고자 노력한 것으로 보입니다.뿐만 아니라 그녀는 궁중 내부의 권력 분포에도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충렬왕 시절, 일부 외척 세력이 조정 내 주요 자리를 독점하려 할 때
그녀는 국왕에게 이를 적극적으로 제지할 것을 요청했고,
그 결과 일부 관직 개편이 이루어졌다는 내용이 사승기(史乘記)에도 남아 있습니다.
그녀는 궁 밖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궁 안에서 실질적인 조정의 조율자 역할을 했던 셈입니다.하지만 이런 역할에도 불구하고, 후대 사관들은 정비 왕씨에 대해
“왕의 뜻을 가로막고 부녀의 말을 내세움이 도를 벗어났다”는 식의 평가를 남겼습니다.
이는 남성 중심의 유교적 사관과 정치적 패러다임이 여성의 정치 개입을 원칙적으로 배제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정비 왕씨는 단순한 왕비나 후궁이 아닌,
국가의 존립과 자존을 위해 외교적 전략을 실현한 실천적 정치가로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그녀의 외교 감각, 위기 조율 능력, 조정 내 권력 간 균형 감각은
한 명의 여성 정치가가 제도 밖에서 어떻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정비 왕씨는 고려 여성의 한계를 넘은 존재였습니다.
그녀는 “왕비는 곁에서 조용히 있어야 한다”는 통념을 깨고
실질적인 외교 주체, 정치 전략가, 궁정 운영자로서 활약한 인물이었으며,
비록 이름은 역사의 가장자리에서만 언급되지만,
그녀의 흔적은 오늘날에도 ‘정치하는 여성’의 가능성과 존재 이유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인물로 남습니다.3. 고려 말기, 승려 세력을 제압한 '이씨 가문 여성'
고려 말기는 정치적으로 혼란스럽고, 경제적 불균형이 심화된 시기였습니다.
특히 원 간섭기를 지나면서 왕권은 약화되고 대신 불교 세력과 일부 문벌 귀족들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당시 전국의 국토 약 30% 이상이 사찰 소유지였고,
절과 관련된 재정 운영권을 누가 쥐느냐에 따라 사실상 지역의 권력 구도와 정치적 안정을 좌우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이러한 흐름 속에서 눈에 띄는 한 여성이 있습니다.
이름은 정식으로 기록되지 않았지만, ‘○○사 토지대장’, ‘○○이씨 장공인’, ‘재가승 ○씨 부인’ 등의 명칭으로 여러 관청 문서와
지방 행정 기록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불교 귀족가문의 이씨 여성입니다.그녀는 단지 사찰에 물자를 시주하는 후원자나, 행사를 지원하는 종교 후원자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당대 거대 사찰의 토지 관리와 세금 수납, 군역 부담 조정 업무를 총괄하며
**'사찰 운영의 실질적 총무이자 경제 관리인'**으로 기능했습니다.
그녀가 속한 이씨 가문은 고위 관직자도 여럿 배출한 불교 중심 귀족 가문이었지만,
이 여성은 가문의 명예가 아닌, 정치와 경제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데 집중했던 실무형 권력자였습니다.특히 주목할 점은 그녀가 **‘재가승’(승려 신분이지만 결혼하고 가계를 꾸리는 존재)**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곧 당시 사찰 운영과 정치 권력, 세속적 권익 사이의 경계가 이미 무너졌음을 의미하며,
그 가운데에서 여성이며 승려 신분인 그녀가 자율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점입니다.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사찰이 소유한 대규모 전답 중 일부를
재해를 입은 백성에게 임시로 빌려주고, 이자율을 조정하여 농민들이 토지를 회복하도록 유도한 적도 있습니다.
또한 군공(軍貢), 즉 사찰이 내야 할 병력 혹은 군자금 의무 부담에서
자신이 직접 관청에 협의안을 제출하고, 현실적인 병역 대체 제도 시행을 주도한 사례도 전해집니다.
이는 단순한 ‘여성 후원자’의 차원이 아니라,
**국가 행정과 군정에 실질적 의견을 낸 ‘비공식 여성 관료’**로 봐도 무방할 만큼의 정치적 참여였습니다.그녀의 실명은 사찰 회계문서와 지방 재무 문서에 여러 차례 등장하며,
지방 관청에서는 그녀를 ‘○○장공인(掌公人)’ 즉, 공적 자산을 관리하는 책임자로 인정해
공문을 보낼 때 이름을 따로 적는 형식까지 취했다고 합니다.
이는 고려 후기 여성이 실명으로 국가 공식 문서에 등장한 드문 사례 중 하나입니다.그녀는 후일 한 제자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 것으로 구전 전해집니다.
“법당은 부처를 모시되, 곡식은 백성을 살린다.”
이 말은 당대 승려들이 형식적 의례와 불경만을 좇고 있을 때,
현실적 행정과 민생 문제에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는 인식을 보여주는 말로,
종교의 본질과 정치의 역할 사이에서 균형을 찾고자 했던 그녀의 철학적 태도를 드러냅니다.고려 말은 곧 신흥 사대부 세력이 중앙 권력을 장악하며 불교 세력을 밀어내는 시기로 전환되는데,
그 과정에서 불교계 내부에서도 변화의 자각이 있었고,
이씨 여성과 같은 인물은 그 전환기에서 정치적 조율자, 경제적 실무자, 여성 행정가로 활동한 보기 드문 사례였습니다.오늘날 우리는 그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녀가 남긴 흔적은 **“여성도 종교도 정치도, 모두 민생을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는
명확한 정치철학과 실천적 행정을 증명하는 지표로서 매우 의미 있는 자취로 남아 있습니다.우리가 몰랐던 이유는 무엇일까?
고려의 여성 정치가들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단지, 기록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혹은 기록되었더라도 ‘실명’이 아닌 ‘○씨 부인’, ‘왕의 정비’, ‘누구누구의 처’라는 누군가의 그림자로만 남겨졌기 때문입니다.그녀들은 현실 정치에서 분명 영향력을 행사했고,
정책 결정, 외교 조율, 경제 통제, 사찰 재정 운영, 지방 권력 배분까지
실질적인 정치 행위를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는 ‘정치가’나 ‘실무자’가 아닌,
항상 **‘보조적인 존재’, ‘정무에 간섭한 여인’, ‘기록할 필요가 없는 인물’**로 간주되며
공식 서술에서 축소되거나 사라지게 되었습니다.이는 단순히 한두 명의 사관이 편견을 가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고려시대에도 여성의 사회 참여가 다른 시대보다 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기록하고 서술하는 주체는 언제나 남성 관료들이었고,
그들의 시선에서 여성의 정치 개입은 곧 질서 위반이며, 제도의 예외였던 것입니다.사료 속 표현들은 이를 명확히 드러냅니다.
“여인이 국정을 말하다”, “정비가 조정 일에 간여하니 도리가 어지럽다”,
“부인이 승려와 밀담을 나누다”, “풍속이 문란해짐은 여인의 개입 때문이라”…
이러한 문장은 단순한 의견이 아니라,
여성의 실질적 역할을 ‘도덕적 문제’로 치환하여 평가절하하는 서술 전략이었습니다.이처럼 여성의 권력은 실재했지만, 정당화되지 않았고,
그녀들의 영향력은 실천되었지만, 기록되지 않았습니다.게다가 여성 정치가들의 권력은 대부분 ‘비공식’ 통로를 통해 행사되었습니다.
공문을 쓰는 것도, 사찰 운영을 조정하는 것도, 외교 사신단을 맞이하는 것도
형식상으로는 남편이나 왕, 관료의 이름으로 행해졌지만,
실제로는 그 결정의 방향을 설계하고, 조율하고, 실현한 사람이 여성이었던 경우가 많았습니다.그러나 그런 ‘비공식 영향력’은 당시 정치문화에서는
인정받지 못하거나, ‘사적인 영역’으로 격하되는 방식으로 기술되었고,
이로 인해 여성은 늘 제도 밖에 존재하는 그림자 권력자로만 남았습니다.하지만 냉정히 들여다보면,
그녀들은 단지 남성 정치가의 조력자가 아니었습니다.
많은 경우, 권력의 공백을 메우고, 분열된 세력 사이에서 중재하며,
국가의 흐름을 보이지 않게 설계하는
**‘정치의 조율자’, ‘결정의 촉진자’, ‘정권 유지의 실질 운영자’**였습니다.예를 들어, 정비 왕씨는 원 간섭기의 외교 정세를 조정했고,
김씨 부인은 문하시중의 정책 추진을 설계하며 대신들과 직접 소통했으며,
이씨 가문의 여성은 사찰 경제 운영과 국방세 조율이라는 중대한 행정에 개입했습니다.이들은 조선처럼 여성의 정치가 철저히 억제되기 전,
**제도의 경계를 넘나들며 능동적으로 권력을 행사했던 고려 시대의 ‘보이지 않는 실세’**들이었습니다.오늘날 그녀들의 이름이 희미한 것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름을 불러줄 언어와 구조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그리고 바로 지금,
그 이름을 다시 말하고 기록하는 이 순간부터
우리는 역사의 빈칸을 채우고, 잊힌 권력을 복원하는 작업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고려 시대 여성 정치가들의 이야기는 단순히 ‘특이한 사례’나 ‘주변의 기록’으로 치부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들의 흔적을 다시 불러내고,
단지 과거를 복원하는 것을 넘어, 현재의 기억 구조를 다시 세우는 일에 참여해야 합니다.우리가 할 수 있는 첫 번째 일은,
그녀들의 존재를 기록으로 다시 말하고, 다시 써내려가는 일입니다.
이제 더 이상 역사는 소수 엘리트나 공식 문서만의 영역이 아닙니다.
누구나 블로그에 글을 쓰고, SNS에 스토리를 올리고, 영상으로 과거를 해석하는 시대입니다.
그녀들의 이름을 찾아내고, 그들이 남긴 언어를 다시 번역하며,
'이야기되는 것’ 자체가 역사 복원의 첫걸음이 될 수 있습니다.
“정비 왕씨”, “김씨 부인”, “이씨 장공인”이라는 모호한 이름이 아닌,
역사 속 주체로서의 여성 리더십을 말하는 명확한 서사를 오늘부터 우리가 직접 쓸 수 있습니다.두 번째는, 그녀들의 이름을 교육과 콘텐츠에 담는 작은 실천입니다.
학교 수업, 온라인 강의, 역사 유튜브 콘텐츠, 혹은 문학과 드라마 속 설정 하나라도
그 시대를 설명할 때 여성의 역할도 함께 언급되는 것,
바로 그 한 문장, 그 한 줄이 후대의 기억을 바꾸는 힘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정치가의 이름 목록에서 남성 열 명만 나열되는 것을 당연하게 넘기지 않고,
“그때 이 결정을 가능하게 만든 여성은 누구였는가?”라고 묻는 순간,
우리는 잊힌 주인공을 다시 무대로 부르는 첫 실천을 시작하는 것입니다.세 번째는, ‘여성은 정치와 권력의 중심에 있어본 적이 없다’는 통념을 정면으로 깨는 일입니다.
그녀들은 단지 왕비나 후궁이 아니었습니다.
궁궐의 이면에서 움직였고, 불교의 재정과 조직을 통제했으며,
원나라와의 외교 갈등 속에서 협상과 절충의 해법을 실현한
조율자이며 전략가, 그리고 때로는 실질적인 통치자였습니다.우리는 지금까지 그녀들의 존재를 몰랐던 것이 아니라,
기억하기를 멈췄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기록되지 않은 권력’의 존재를 인정하는 출발점에 서는 것입니다.마지막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일은
그녀들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전파하는 것입니다.
가족과 친구, 제자와 학생, 팔로워와 구독자에게
단 한 명이라도 더 고려의 여성 정치가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
그것이 바로 역사를 다시 쓰는 ‘시민 사가(史家)’로서의 첫 선언입니다.‘왕의 아내’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실세,
‘승려의 아내’이자 사찰의 경제 설계자,
‘여인의 월권’이라 평가받았던 실질 외교 전략가—
그녀들을 다시 불러내는 일은
단지 과거를 기리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사회의 정치·기억·표현의 방식을 바꾸는 작은 혁명입니다.당신의 한 문장, 한 편의 글, 한 장의 카드뉴스가
잊힌 그녀들을 다시 고려의 무대로 불러올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역사로 초대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잊혀진 역사 속 인물 탐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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