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니의 잊혀진 역사 속 인물 탐구

잊혀진 역사 속 인물 탐구에 대해서 글을 작성합니다.

  • 2025. 5. 27.

    by. 지아니13

    목차

      “정약용만 아십니까?”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말할 때 대부분 정약용, 정약전, 박지원, 홍대용 같은 양반 학자들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그 시기, 계급의 벽을 넘어서 ‘생각’으로 시대를 흔들었던 평민 출신 사상가들이 존재했습니다.
      이들은 양반 중심의 질서 속에서 배움과 기록으로 저항했고, ‘글’로서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숨은 철학자들이었습니다.
      오늘은 역사책에서 잘 다뤄지지 않았던 조선 후기의 평민·천민 출신 지식인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신분보다 지혜가 앞섰던 조선의 ‘밑바닥 철학자’들

      1. 이익섭 – “종이 위에서 양반과 싸운 자”

      **이익섭(李益燮, 생몰년 미상)**은 정식 역사서에 이름 하나 남기지 못한 조선 후기의 무명 지식인이지만,
      그의 글은 당시 조정의 사대부들 사이에서 불편한 진실을 찌르는 **“불온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경고장”**처럼 여겨졌습니다.
      경상도 산골에서 태어난 그는, 양반이 아닌 천민에 가까운 하층 신분 출신으로,
      제도권 교육은 물론 서당조차 다닐 수 없던 환경 속에서도 스스로 경서와 의서, 농서, 천문학서를 독학하며 지식인으로 성장했습니다.

      이익섭은 유교 경전과 성리학 원리를 독학한 비(非)양반 성리학자였습니다.
      그는 혼자 써 내려간 수십 편의 상소문에서 당시 조선의 토지 집중 문제, 불공정한 과세 구조, 양반의 면세 특권, 지방 관료의 수탈 구조를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그의 글은 단순한 비판이 아니라, 대안적 개혁 방안을 담은 논리적인 개혁론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한 수준이었습니다.

      특히 그의 대표적 표현인
      “양반도 밥을 먹고, 평민도 하늘을 본다.”
      라는 문장은 당시 신분사회 조선에서 매우 도발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이는 지식과 통찰은 태생이 아니라 삶의 경험과 학습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라는, 당대로서는 혁명적인 지적 평등론이었습니다.
      그는 지식의 특권화, 유학의 관료화에 강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사서삼경은 궁궐의 언어가 아니라 백성의 언어로 다시 읽혀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익섭의 글은 한 번도 조정의 공식 회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가 올린 상소는 대부분 ‘하급자 신분’이라는 이유로 반송되거나, 기록조차 되지 않은 채 문서 더미 속에 사라졌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대부는 그의 글을 읽고 “사대부의 말을 흉내 낸 천인의 장광설”이라며 불경죄를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배제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장은 지방 아전, 향리, 서얼 출신 관료들 사이에서 비밀리에 필사되고 회람되며 전해졌습니다.
      특히 당시 사회적 제약 속에서도 지식의 자율성과 현실 개혁을 고민하던 ‘하층 지식 공동체’의 상징으로 그의 이름은 구전되었고,
      후대의 실학자와 개화 지식인들 중 일부는 그의 상소문을 필사본으로 접한 뒤
      **“제도 밖에서 제도를 흔든 자”, “종이 위에서 싸운 사람”**으로 그를 기리기도 했습니다.

      이익섭은 직접 칼을 들고 싸우지는 않았지만,
      종이와 붓으로 조선의 허위를 찢고자 했던 저항자였습니다.
      그의 삶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누가 지식인이었고, 누구의 언어가 진실을 말했는가?”

      오늘날까지도 그의 이름은 공식 역사에 남아 있지 않지만,
      그가 남긴 말 한 줄, 그가 쓴 문장 한 편은
      ‘지식이 신분을 뛰어넘는 시대’를 상상하게 한 조선 후기의 작은 혁명이었습니다.

      2. 장길산 – 도적이자 사상가로 남은 인물

      **장길산(張吉山, 생몰년 미상)**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의적(義賊)’**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삶과 활동을 단지 ‘도적’이라는 범주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는 단순한 생계형 산적이 아니라, 명확한 정치적 신념과 민중 철학, 공동체 운영 사상을 실천한 인물로,
      오늘날에는 도적이자 사상가로서 재조명되고 있는 역사 속 인물입니다.

      장길산은 본래 노비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억울한 일을 겪은 후 산속으로 들어가 반관(反官) 조직을 결성합니다.
      그의 무리는 단순히 약탈을 목적으로 한 도적 집단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양반과 부유층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의적'의 전형적인 형태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하층민 중심의 자치 공동체를 구성하고, 그 안에서 나름의 질서와 운영 원칙을 세운 ‘실험적인 공동체주의자’**였습니다.

      그가 이끈 산속 공동체는 단순한 은신처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신분의 구분 없이 공동 노동, 공동 분배, 집단 의사 결정이 이루어졌고,
      장길산은 이를 통해 당시의 계급 구조와 국가 권력의 폭력성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현실 정치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관리는 백성의 배를 채우지 못하고, 양반은 입으로만 예를 말한다"**는 말을 자주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특히 그가 남긴 것으로 전해지는 말 중
      **“배운 자는 정의를 말하지 않고, 가진 자는 법을 말한다”**는 구절은,
      오늘날까지도 통찰력 있는 사회 비판의 어록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체제 부정이 아니라, 기득권과 지식층의 위선, 권력의 이중성을 지적하는 날카로운 사상적 메시지였습니다.

      장길산의 존재는 당시 양반 중심의 체제에서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조정은 그의 행적을 끊임없이 추적했고,
      문헌에서도 그의 활동은 '역적', '산적', '죄인'으로 왜곡되거나 축소되어 기록되었습니다.
      하지만 민중들 사이에서는 그의 이야기가 구전 설화로 남아 전해졌고,
      특히 지방 농민들과 노비 출신 하층민들에게는 **“민중의 지도자”, “대안적 지도자상”**으로 기억되었습니다.

      근대 이후 들어와서야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이나 역사 대중서에서
      장길산은 사회 변혁을 꿈꾸었던 사상가이자 실천가로 다시 조명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공동체 실험은 비록 짧았고, 문헌으로 온전히 남아 있지는 않지만,
      그가 추구했던 가치는 오늘날의 공동체주의, 대안적 정치, 탈중심적 리더십 담론과도 통하는 지점이 많습니다.

      우리는 장길산을 단순한 ‘도적’으로만 남겨둘 수 없습니다.
      그는 조선 후기 민중의 억눌린 삶 속에서
      "누가 세상을 다스릴 자격이 있는가",
      **"진짜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를 고민하고 행동으로 옮겼던
      철학자이자 실천가였습니다.

      역사는 종종 권력의 기록이 되지만, 진짜 사상은 백성의 언어 속에서 살아남습니다.
      장길산은 그 백성의 언어로 시대를 흔들었고, 지금도 여전히 묻고 있습니다.
      “진짜 도둑은 누구였는가?”

      정약용 말고 또 누가 있었나? 조선 후기 평민 지식인의 반란

      3. 백광훈 – 양반이지만 ‘평민의 언어’를 쓴 시인

      **백광훈(白光勳, 1537~1582)**은 조선 중기의 시인이자 문인으로,
      양반 신분이었지만 **몰락한 가문 출신으로 민중의 삶에 깊이 천착했던 ‘평민의 시인’**이었습니다.
      그는 당대 주류 문학에서 흔히 다루던 풍류, 자연, 도학적 이상 대신,
      농부의 피로, 노비의 고통, 여성의 슬픔, 백성의 현실을 시로 옮긴 드문 시인이었습니다.

      한양에서 태어났지만, 집안은 이미 몰락해 실질적인 경제적 궁핍을 경험한 백광훈
      상류층의 위선적 사대부 취향과 문학 양식에 회의를 느끼고,
      자신의 시를 통해 현실을 기록하고 사회를 고발하는 도구로 문학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관직에 나아가기보다는 시를 통해 세상을 보고, 백성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일을 선택했습니다.

      그의 시는 형식상으로는 고전적이지만, 내용상으로는 매우 파격적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한 편의 시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소를 끌던 아비는 논바닥에 누웠고,
      젖을 물리던 여인은 울음을 멈추지 못했네.
      저기 마을 끝 외양간 뒤에는
      세금 쌀 걷어가는 장부가 벽처럼 세워졌네.”

      이처럼 백광훈은 삶의 밑바닥에서 일어나는 작고 잔인한 현실들을 시어로 승화시켰습니다.
      그가 남긴 많은 시에는 노비의 눈물,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탄식, 배를 곯는 농민의 분노가 담겨 있었고,
      이는 당대 상류층에게 매우 불편한 감정적 자극을 주는 **‘문학적 정치 선언’**과도 같았습니다.

      그는 단지 시를 쓰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시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고, ‘시는 곧 정치’라는 철학을 공공연히 밝혔습니다.
      그의 시편은 문집으로 간행되지 못하고 사적으로 필사되어 유통되었으며,
      후일 몇몇 농민 봉기나 지방 반란에서 그의 시구절이 전단지나 선동문에 인용되기도 했습니다.
      이는 백광훈의 시가 단순한 감성적 위로를 넘어서, 현실에 문제를 제기하는 무기로 기능했음을 보여줍니다.

      당연히 조정과 기득권 계층은 그를 ‘불온한 인물’로 간주했습니다.
      그는 과거 시험에서 여러 차례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끝내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고,
      “풍속을 해치는 글을 쓰는 자”라는 이유로 지방으로 유배되거나 문단에서 배제당하는 일도 겪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시는 당대 민중들 사이에서 구전과 필사를 통해 오래도록 살아남았습니다.
      그의 시는 문학이 어떻게 민중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현실에 발붙이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오늘날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특히 조선 후기 실학자들과 개화기 문인들은 그를 ‘시의 사상가’, ‘문학 속 실천가’로 평가했습니다.

      백광훈은 양반이었지만, 양반의 언어가 아닌 백성의 말, 하층민의 눈물, 여성의 고통을 시에 담아낸 드문 지식인이었습니다.
      그의 문학은 독서의 대상이 아니라, 저항과 공감의 언어였고,
      그가 남긴 시는 이념이 아니라, 인간을 향한 가장 근본적인 애정과 분노의 기록이었습니다.

      오늘날 그를 기억한다는 것은
      단지 오래된 시인을 다시 읽는 것이 아니라,
      문학이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지식인이 누구를 바라봐야 하는가에 대한 성찰을 다시 시작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4. 김우옹 – 노비 출신 천문학자

      **김우옹(金祐翁, 생몰년 미상)**은 정식 역사서나 학계 문헌에서 자주 등장하지 않지만,
      조선 후기 ‘하늘을 기록한 사람’ 중 유일하게 노비 출신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인물입니다.
      그는 평민도 아닌 천민 신분, 즉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천문에 깊이 매료되어 스스로 별을 관측하고 기록하며, 자연과학의 영역에서 이름을 남긴 보기 드문 존재였습니다.

      김우옹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공식 자료는 거의 없지만,
      그의 활동은 일부 지역 사족의 문집, 민간 필사본, 후대 역관들의 주석 속에서 **‘은밀하게 전해지는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밤하늘의 별자리를 관찰하며 절기의 변화를 민감하게 기록하기 시작했고,
      그러한 기록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기이하지만 정확하다’**는 입소문을 타며 점차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김우옹은 조선 후기 정밀한 달력 작성과 농업 생산 주기 설정에 영향을 준 비공식 천문 자료를 다수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그가 작성한 **‘농사절후기’(농사 시기에 따른 별자리 관측기록)**는,
      지방의 아전이나 역관들 사이에서 농민들에게 계절 예측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보조 자료로 활용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 자료는 공식 조정의 천문기록과는 달리 **‘하늘을 사람의 눈으로 직접 본 결과’**였기에
      실제 농사 현장에서는 더 유용하다는 평가도 있었습니다.

      그는 높은 산에 올라 별자리를 관측하고, 강과 들판의 기온, 습도, 바람의 흐름과 별의 움직임을 대응시키는 방식으로
      자연과 인간 사이의 상관관계를 탐구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관측 결과를 시가나 운문 형식으로 정리하여 문맹인 농민들도 쉽게 기억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는 그가 단지 과학자로서가 아니라, 지식을 나누는 실천가로도 활동했다는 증거입니다.

      김우옹은 어느 기록에서 이렇게 썼다고 전해집니다.

      “하늘은 신분을 나누지 않고,
      사람은 그것을 보지 않으려 한다.”
      이 문장은 과학과 관측, 자연의 원리는 누구에게나 평등하다는 신념,
      그리고 신분제 사회가 그 평등을 가리는 방식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습니다.

      비록 그의 이름은 『조선왕조실록』에도, 『승정원일기』에도 등장하지 않지만,
      그의 천문 기록 일부는 후대 천문관, 역관, 지방 관상감 직속 학도들이 교재처럼 베껴 본 자료로 언급됩니다.
      그는 비공식이었지만 실용적이고 정확한 데이터를 남긴 사람, 즉 **‘공식 기록이 배제한 과학자’**였습니다.

      김우옹의 존재는 조선 사회에서 매우 이질적이었습니다.
      노비 출신이 별을 본다는 것, 그것을 글로 남긴다는 것,
      더 나아가 그 지식이 국가 권력에 의해 참고된다는 사실 자체가 제도의 한계를 드러내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인정은 받았지만, 드러날 수는 없었던 인물,
      ‘기록되었지만 문헌에 없고, 사용되었지만 공로는 말해지지 않은 과학자’로 남았습니다.

      그의 삶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지식이란 누구의 것인가?”,
      “과학은 계급과 신분 위에 존재할 수 있는가?”

      김우옹은 하늘을 통해 사회를 비판했고,
      별자리를 통해 인간의 평등을 말한,
      조선 후기 가장 조용한 과학 혁명가였습니다.

      왜 우리는 그들을 몰랐을까?

      우리는 조선 후기 사상사와 지식인을 이야기할 때 대부분 정약용, 박지원, 홍대용과 같은 양반 출신의 실학자를 먼저 떠올립니다.
      그들의 사상과 글은 『열하일기』, 『목민심서』, 『의산문답』처럼 정식 문집으로 간행되었고,
      오늘날까지도 교육 현장과 대중 콘텐츠에서 널리 인용되고 있습니다.
      반면, 이익섭, 김우옹, 장길산 같은 평민 혹은 천민 출신의 사상가와 실천가들
      대부분 그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거나, 알려졌더라도 ‘야사’나 ‘전설’, ‘비공식 필사본’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왜 우리는 이들의 이름을 제대로 알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는 단순히 그들의 활동이 미미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실제로 이들은 자신이 처한 사회적 제약 속에서, 시대 구조를 꿰뚫는 통찰력과 실천력을 발휘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는 ‘출신 성분’이라는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혀
      공식 기록 속으로 진입조차 하지 못한 채, 역사로부터 배제되고 지워졌습니다.

      조선 후기의 역사 기록과 문헌 제작은 철저히 양반 계층이 주도하는 구조로 되어 있었습니다.
      문집을 간행하거나 공적 인물로 편입되기 위해선 과거에 급제해 벼슬을 하거나,
      국가 혹은 사대부 집안의 후원 아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평민·천민 출신 지식인은 제도적 한계로 인해 관직에 오를 수 없었고,
      그들의 글과 말은 정식 문헌이 아닌 사설 기록, 지방의 개인 필사본, 구전 설화로만 간신히 살아남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의 언어 구조와 사고방식 자체가 이들의 사유를 배제했습니다.
      양반이 쓰는 문어체, 한문 중심의 문학 양식은 글을 통한 표현 자체가 특권화된 영역이었고,
      평민이 자신의 생각을 ‘기록’하거나 ‘문장화’한다는 것 자체가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시도였습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신분을 뛰어넘어 지식이나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처벌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생각, 철학, 문제 제기는 ‘사상의 중심’이 아닌 ‘그늘’로 밀려났습니다.
      이름은 불분명하거나, 의도적으로 지워졌고,
      그들이 남긴 흔적은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취급되었습니다.
      기록과 권력, 기억과 계급이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었던 조선 후기의 사회구조 속에서,
      진짜 삶의 바닥을 살아간 사람들의 지식은 역사에서 ‘주변부의 이야기’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배제는 단지 과거의 일이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누가 말할 자격이 있는가?”, “무엇이 기록할 가치가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여전히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누군가의 삶을 기억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록되지 않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사회’,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이들 이름 없는 사상가들을 되살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제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역사는 누구의 손으로 쓰였고, 우리는 누구의 언어로 그것을 배우고 있는가?
      진짜 시대를 말했던 사람들, 그리고 그 목소리를 외면했던 구조에 대해 다시 돌아봐야 할 때입니다.
      잊힌 이름을 되살리는 것은 단지 과거를 복원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기억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역사 속에 이름 없이 사라진 평민·천민 출신 지식인들의 이야기를 되살리는 일은 단순한 추모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지식 구조와 사회적 서열, 기억의 방식을 되돌아보는 일입니다.
      그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내고, 그들이 남긴 흔적을 따라가 보는 일은
      과거를 정리하는 동시에 오늘의 불평등한 기억 구조에 저항하는 실천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잊힌 인물들을 ‘찾아 읽고, 콘텐츠로 만드는 일’**입니다.
      이제는 꼭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개인 블로그, SNS, 유튜브, 뉴스레터 등을 통해
      잊힌 사람들의 이름과 삶을 소개하고 알릴 수 있는 시대입니다.
      기록을 찾고 요약하고 재해석하는 작은 콘텐츠 하나가
      그동안 드러나지 못했던 인물을 새로운 독자들에게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검색어 하나, 클릭 한 번이 이름 없는 사람을 다시 역사 속으로 끌어올리는 작은 기적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지역 박물관과 기록관에서 이루어지는 ‘풀뿌리 기록운동’을 지지하고 참여할 수 있습니다.
      지방의 향토사 연구소, 민속자료관, 시민단체들이 진행하는 구술사 프로젝트나
      소규모 마을 아카이브 사업은 대개 지역 내 이름 없는 이들의 삶과 기록을 복원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런 움직임에 관심을 갖고 직접 발걸음을 하거나,
      온라인 후원, 자원봉사, 공유 캠페인 등을 통해 함께할 수 있습니다.
      기록은 혼자 쓸 수 있지만, 기억은 공동체가 함께 지켜야 살아남습니다.

      세 번째로는, 학교와 교육 콘텐츠 속에 비(非)주류 지식인의 이름을 함께 말하는 일입니다.
      교육 현장은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게 만들지’, 그리고 무엇을 ‘기억하지 않게 만들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공간입니다.
      교사라면 수업 중 보조 자료로, 강연자라면 서브 예시로,
      콘텐츠 제작자라면 기사나 영상의 인용 문장으로라도
      정약용·퇴계·율곡만큼은 아니더라도,
      이익섭, 김우옹, 장길산, 백광훈 같은 이름도 언급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억은 반복을 통해 정착되고, 호명되지 않은 이름은 영원히 배제된 채 남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들의 삶을 통해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지식의 장벽’을 되묻는 일을 해야 합니다.
      누가 말할 수 있고, 누가 주목받으며, 누가 ‘공식적인 지식인’으로 인정받는가?
      학벌, 계층, 출신 지역, 언어 방식, 표현 도구에 따라
      우리는 오늘날에도 누군가의 목소리를 더 높이 평가하거나,
      누군가의 통찰을 더 낮게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잊힌 사상가들은 이 질문에 대해 가장 먼저 응답을 요청하는 존재들입니다.
      "지식은 누구의 것인가?"
      그 질문에 답하려는 우리의 태도 자체가, 바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실천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잊지 않고,
      함께 기억하고, 말하고, 기록하고, 나누는 일을 해야 할 시간입니다.
      지금, 당신의 블로그 한 편, 카드뉴스 한 장, 말 한 마디가
      그들을 다시 이 땅 위에 존재하게 만드는 첫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역사는 그 자체로 기록이 아니라, 기억을 선택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