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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교과서에 실리지 못한 수많은 인물들, 그들은 어떻게 ‘잊힌 역사’가 되었을까? 지금 그 이유를 추적합니다.
‘잊힌 인물’은 왜 역사 교육에서 빠졌을까?
우리는 초·중·고등학교를 거치며 ‘역사’를 배운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배우는 것은 역사 전체가 아니라 ‘공식적으로 편집된 역사’의 일부일 뿐입니다.
그 ‘편집된 역사’에는 분명 기준이 존재합니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지, 어떤 사건과 인물을 넣고 뺄 것인지는 교육과정에 따라 선택됩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누가, 어떤 기준으로 그 선택을 했을까요?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 우리는 누구를 잊게 되었을까요?실제로 우리는 교과서에서 굵직하게 소개되는 몇몇 인물들—이순신, 세종대왕, 안중근, 유관순 등—만을 반복적으로 배우는 반면,
김마리아, 남자현, 조명희, 이관술처럼 실질적인 독립운동과 민중 계몽, 저항 문학과 사상 실천에 기여한 인물들은
단 한 줄 혹은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이러한 ‘선택적 기억’의 구조는 단지 우연이 아닙니다.
정치적·이념적 판단, 성별이나 계급에 대한 사회적 편견, 제한된 교육 시간과 분량,
국가가 의도한 시민성 함양의 방향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입니다.
즉, 어떤 인물은 ‘안전한 이야기’로 채택되고,
다른 인물은 ‘불편하거나 민감한 역사’로 분류되어 배제되는 구조가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예를 들어 김마리아는 3·1운동을 주도하고, 애국부인회를 조직한 여성 리더였지만
교과서에서는 보통 유관순 한 명이 여성 독립운동의 대표로 언급되며,
다른 여성 인물들은 보조적 역할이나 부차적 인물로 정리되곤 합니다.
남자현 역시 무장 투쟁을 감행한 여성 독립운동가였지만,
‘여성의 폭력성’이라는 이미지가 부담스럽게 느껴져 기억의 바깥으로 밀려난 사례입니다.조명희는 어떨까요?
그는 『낙동강』이라는 저항문학의 상징이자,
소련으로 망명해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실천한 진보 지식인이었지만,
좌익 이력 때문에 20세기 후반까지는 아예 사라져야 할 이름이었습니다.
이관술 역시 항일운동의 치밀한 전략가였음에도,
공산당 활동 경력 하나로 인해 교과서에선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하지만 지금 시대는 다릅니다.
MZ세대는 다양성, 표현의 자유, 숨겨진 이야기의 복원을 가치 있게 여기는 세대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에게는 학교 역사 교육에서 빠진 인물들을 다시 소환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바로 그 잊힌 인물들을 하나씩 들여다보며,
우리가 왜 그들을 몰랐는지, 왜 알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함께 탐색해보려 합니다.역사는 단지 과거의 기록이 아닙니다.
역사는 ‘지금’ 우리가 누구를 기억하느냐에 따라 다시 쓰이는 살아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잊힌 인물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야 할 때입니다.학교 역사 교육의 한계: ‘선별된 기억’의 구조
역사는 사실과 해석이 함께 엮여 있는 학문입니다.
하지만 공교육에서의 역사는 대부분 **정치적, 이념적, 시간적 제약 속에서 ‘선택적으로 구성’**됩니다.어떤 기준으로 인물이 교과서에 실릴까?
기준 항목 설명역사적 영향력 사회 전반에 미친 기여도, 인식의 확산 정도 정치적 중립성 현대의 정치/이념 대립에서 논쟁의 소지가 적은가 여부 대중 인지도 이미 널리 알려져 있어 교과 수용성이 높은 인물 자료 확보 가능성 실존 증거와 기록이 충분히 확보되어 있는지 여부 교육 목적 적합성 학습 성취 기준(핵심역량)과의 연관성, 학습 흐름과의 구조적 적합성 이러한 기준은 명확한 장점도 있지만, 동시에 무수한 인물과 시선들이 배제되는 구조를 고착화시키기도 합니다.
실제로 빠진 인물들, 그리고 그 이유
1. 이관술 – 좌우를 넘나든 실천가, 그러나 ‘이념 논쟁’에 갇힌 인물
이관술(1902~1950)은 독립운동사에서 보기 드문 **‘조직가형 실천가’**였습니다.
그는 단순히 무장 투쟁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전략과 구조를 설계하고 실현하는 데 앞장섰던 핵심 인물이었죠.
그러나 그의 삶과 활동은 지금까지도 공식 역사에서 애매한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하면서도 복잡합니다.
그가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였기 때문입니다.이관술은 3·1운동에 감명받은 이후, 상하이로 건너가 항일운동에 본격 참여했으며,
이후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 비밀 지하조직 구축, 사회주의 계열 지식인들과의 연대를 통해
이념적 기반을 가진 조직적 독립운동의 중심축으로 활동했습니다.
그의 전략은 ‘한 방의 거사’가 아닌 민중의식 고양, 조직화, 국제 연대, 장기적 항일 기반 조성이었고,
이는 단기성과보다는 지속가능한 해방의 토대를 설계하는 방향이었습니다.그러나 해방 이후, 남북 분단이 현실화되고
이념이 곧 사상의 죄가 되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이관술은 역사 속에서 지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결국 한국전쟁 발발 직전 체포되었고, ‘간첩’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당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수십 년간 “공산주의자”라는 단어 하나로 교과서에서 언급조차 되지 못했습니다.왜 빠졌을까?
이관술은 좌익 계열 인물이라는 이유만으로 **‘국가 정체성과 충돌할 수 있는 위험 요소’**로 간주되었고,
그 결과 교과서와 공공 교육에서 완전히 배제된 대표적 사례가 되었습니다.
그의 활동이 민족주의적 독립운동과 별개로 취급된 이유는,
그가 추구했던 사회주의적 해방관이 당시 국가서술체계의 기준과 충돌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이관술의 활동은 단지 ‘좌익’이라는 틀로 가두기엔 너무나도 복합적입니다.
그는 이념보다 현실, 분열보다 통합, 파괴보다 건설을 지향한 실용주의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오히려 이념을 실천의 도구로 활용한 전략가였으며,
당파성을 넘는 다층적 연대와 조직 능력을 발휘했던 뛰어난 실천가였습니다.왜 알아야 할까?
오늘날의 MZ세대는 진영 논리나 이념에 갇힌 사고보다,
가치 실현, 실용성, 다양성, 연대감을 중심에 두는 성향이 강합니다.
이런 시대정신 속에서 이관술은 **‘생각하는 실천가’, ‘구조를 짜는 운동가’, ‘이념을 도구로 활용한 전략가’**로서
재조명될 가치가 충분합니다.- 그는 단순한 ‘좌파 독립운동가’가 아닙니다.
- 그는 민족과 민중의 해방을 위해 자신의 신념을 일관되게 밀고 나간 사람입니다.
- 그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다른 방식의 독립운동”, **“다른 목소리의 애국”**을 대표합니다.
MZ세대에게 이관술은
“당신이 믿는 정의는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당신의 실천은 어떤 구조 위에 설 것인가?”를 묻는 깊이 있는 역사적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이제는 이념의 잣대가 아닌, 실천의 깊이로 사람을 평가해야 할 때입니다.
이관술은 잊힌 이름이 아니라,
다르게 싸운 한 사람의 역사입니다.2. 김마리아 – 여성 리더였지만 ‘조연’ 취급된 독립운동가
**김마리아(1892~1944)**는 3·1운동의 여성 대표자이자,
애국부인회라는 비밀 항일 조직을 창설한 탁월한 조직가이자 실천적 리더였습니다.
그녀는 단지 운동에 참여한 ‘여성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운동을 기획하고, 조직하고, 이끌었던 핵심 인물이었습니다.하지만 오늘날 교과서나 대중적 역사 담론에서 김마리아의 이름은 상대적으로 희미합니다.
많은 경우 여성 독립운동가는 유관순 한 사람으로 대표되고,
그 외 여성들은 ‘지원’하거나 ‘희생’하는 존재로 조연처럼 서술되곤 합니다.김마리아는 그 프레임에 갇히지 않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녀는 독립운동의 전면에서 실무를 담당했고,
여성들만의 조직을 통해 자금 모집, 정보 수집, 부상자 치료, 연설, 문서 전달에 이르기까지
당시 남성 조직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여성의 손으로 가능하게 만든 장본인이었습니다.왜 빠졌을까?
김마리아는 여성이자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역사 서술의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남성 중심의 독립운동 서사 구조에서는
여성은 대부분 ‘보조자’, ‘희생자’, ‘상징적 인물’로 분류되었습니다.
실질적 성과를 낸 여성 리더는 기존의 서사 구조를 불편하게 만드는 존재였던 셈이죠. - 유관순의 ‘순결·희생’ 이미지가 여성 독립운동의 대표 서사로 고정되면서,
김마리아 같은 ‘실천하는 여성 리더’의 서사는 비교적 소외되었습니다. - 또한 그녀는 미국 유학, 임시정부 연계, 기독교 여성단체와의 협업 등
복잡하고 국제적인 활동을 이어갔지만,
‘해외 조직 + 여성 리더십’이라는 복합 서사는
교과서에 담기엔 너무 구조적,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이야기였을 수 있습니다.
왜 알아야 할까?
김마리아는 단지 한 명의 뛰어난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오늘날 젠더 관점에서 역사를 다시 바라봐야 하는 이유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그녀는 여성이 ‘참여자’가 아니라 ‘주체자’로서 어떤 변화를 이끌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 그녀의 활동은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젠더 리더십, 포용적 조직문화, 여성 연대의 시초라 할 수 있습니다.
- MZ세대가 중시하는 성평등, 주체성, 글로벌 감각이라는 키워드 모두를 갖춘 인물이기도 합니다.
특히 김마리아는 기독교 신앙, 근대 교육, 국제 네트워크, 조직 운영 능력을 바탕으로
당대의 어떤 남성 독립운동가와 견줘도 부족하지 않은 정치적 감각과 실행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지금, 김마리아를 다시 부르며
구분 기존 인식 우리가 다시 봐야 할 관점역할 여성 독립운동 참여자 비밀결사 지도자, 전략가, 국제 연대 실천가 대표 서사 보조적/희생적 여성 이미지 주체적 리더십, 실무 능력, 연대의 중심에 선 인물 교과서 반영 정도 거의 언급되지 않음 3·1운동 및 애국부인회의 실질적 중심 인물로 반드시 포함되어야 함 MZ세대 연관 키워드 여성 리더십, 주체성, 젠더 감수성 젠더 기반 역사 해석, 다원적 독립운동 서사, 여성의 정치적 실천성과 재발견 마무리 메시지
김마리아는 조연이 아닙니다.
그녀는 독립운동이라는 무대에서 극본을 쓰고, 배우를 모아, 장면을 연출한 ‘감독’ 같은 존재였습니다.하지만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그녀를 단지 무대 뒤에서 박수치던 여성 중 한 명으로만 기억해왔습니다.“여성이 독립운동을 한다는 건,
두 번 싸우는 것이었다.
하나는 나라를 위해, 또 하나는 나 자신을 위해.”
— 김마리아의 삶이 주는 오늘의 말이제 우리는 김마리아를 역사 속에서 다시 꺼내
그녀가 설 수 있었던 무대를 진짜로 보여줄 차례입니다.3. 조명희 – 문학으로 저항한 작가, 그러나 ‘사상’이 문제였다
**조명희(1894~1938)**는 단지 소설 『낙동강』의 작가로만 기억되어선 안 되는 인물입니다.
그는 일제강점기 당시 민중의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글과 문학을 통해 시대의 억압에 저항한 대표적인 실천형 지식인이었습니다.
당대의 문학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노동자·농민·빈민층의 언어와 삶을 정면으로 묘사했으며,
그 문장에는 단순한 미학이 아니라 사회구조에 대한 날카로운 문제의식이 담겨 있었습니다.하지만 그가 남긴 문학적 유산과 사회적 실천은
한 가지 이유—‘좌익 사상’에 대한 혐의—로 인해
오랫동안 공적 기억에서 지워져야만 했던 이름이 되었습니다.문학은 그의 무기였고, 저항의 언어였다
조명희는 소설뿐 아니라 시, 희곡, 평론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으며,
그의 모든 창작 활동에는 사회 구조에 대한 문제 제기, 계급 해방에 대한 열망이 깔려 있었습니다.
그는 일제 치하에서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문학이 민중을 일깨우고 역사를 바꾸는 촉진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낙동강』은 이러한 그의 사상을 대표하는 작품입니다.
기존의 문학이 귀족·지식인의 세계를 다뤘다면,
그는 이름 없는 노동자와 농민, 빈민의 시선으로 현실을 쓰고자 했습니다.
이는 당시 문단에서도 파격적인 시도였고,
식민 권력에 의해 **“위험한 글쓰기”**로 규정되기에 충분했습니다.왜 빠졌을까?
조명희가 소련으로 망명한 뒤 소비에트 작가로 활동했으며,
결국 1938년 스탈린 대숙청 기간 중 숙청당했다는 이력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에서 그를 ‘불온한 인물’로 낙인찍는 주요 이유가 되었습니다.그는 공산주의자였고, 실제로 사회주의 문학과 민중 혁명에 긍정적인 시각을 가졌던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그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은 작가,
그리고 글을 통해 사회를 바꾸고자 했던 실천하는 지식인이었습니다.한국 전쟁 이후 반공 이데올로기가 강화되면서,
그의 이름은 교과서에서, 출판물에서, 대중 담론에서 사라졌습니다.
그의 작품은 오랫동안 출판조차 금지되었고,
그가 남긴 흔적은 문학이 아니라 ‘사상’으로만 평가되는 운명을 맞이했습니다.왜 알아야 할까?
오늘날 MZ세대는 표현의 자유, 창작의 진정성, 사회비판적 콘텐츠에 높은 민감도를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조명희는 단순한 작가가 아니라
현대 창작자와 창작자 지망생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선배 작가입니다.- 그는 창작을 위해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고,
- 사회와의 거리두기 대신 사회 한가운데로 들어간 예술가였습니다.
- 그의 글은 문학이 단순한 감정의 발현이 아닌, ‘현실의 해부도’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합니다.
MZ세대에게 조명희는
“지금 당신이 쓰는 콘텐츠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당신의 말은 누구의 침묵을 대신하는가?”**라는
아주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역사적 아이콘입니다.조명희를 다시 바라보는 관점
구분 기존 인식 우리가 다시 봐야 할 관점활동 영역 좌익 문학 작가, 소련 망명 인물 민중문학의 개척자, 실천적 창작자, 표현의 자유를 몸소 실현한 문필가 대표작 『낙동강』 단편 문학을 통한 계급 문제 고발, 민중 시선에서 서사를 구성한 다층적 작가 교과서 반영 정도 거의 언급되지 않음 저항 문학, 계몽 예술, 민중 기반 창작의 시조로서 반드시 재조명 필요 MZ세대 연관 키워드 표현의 자유, 사회참여형 콘텐츠, 창작의 사회성 창작자의 책임, 비판적 글쓰기, 예술과 현실 사이의 윤리적 균형 마무리 메시지
조명희는 펜으로 칼보다 날카로운 글을 썼고,
그 글은 지금도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당신이 외면한 삶은 누군가의 오늘이다.
당신이 침묵한 현실은 누군가의 절망이다.”
— 조명희의 문학이 전하는 오늘의 메시지이제 우리는 조명희를 ‘불온한 작가’로 볼 것이 아니라,
‘용기 있는 목소리’로 기억해야 할 시대의 기록자로 불러내야 할 때입니다.4. 남자현 – 여성 무장 독립운동가, ‘나이에’ 가려진 존재감
**남자현(1872~1933)**은 조용히 이름을 불러야 할 인물이 아닙니다.
그녀는 폭탄을 품고 적진으로 들어갔고,
총칼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던 **조선의 ‘무장한 어머니’**였습니다.
그러나 여성이고, 노년이며, ‘비정형적’이었기에
그녀는 오래도록 역사의 중심에서 밀려나 있었습니다.남자현은 60대에 접어든 나이에 일본 고관 암살을 시도한
조선의 대표적인 여성 무장 독립운동가입니다.
오늘날 독립운동을 이야기할 때 여성은 흔히 ‘만세 시위’나 ‘간호 활동’에 참여한 보조적 존재로 인식되지만,
남자현은 그 모든 프레임을 깼습니다.
그녀는 총을 들고 싸웠고, 정보를 모으고, 거사를 설계하며 실천에 나선 저항의 주체였습니다.무장을 선택한 여성, 60대의 전사
남자현은 만주와 간도 지역을 오가며
비밀 항일조직과 연계하여 폭탄 운반, 정보 전달, 인물 암살 시도 등의 고위험 임무를 도맡았습니다.
그녀는 한의학 지식으로 독립군 치료를 하면서도,
자신이 직접 무기를 들고 나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특히 1933년, 일본 관동군 대장 가네코 타케시를 암살하려다 체포된 사건은
남자현이라는 이름을 강하게 각인시킨 대표 사례입니다.
체포 당시 그녀는 이미 61세였으며,
고문을 당하면서도 어떠한 정보도 넘기지 않고, 끝까지 의연하게 저항했습니다.
결국 그녀는 옥중에서 병사했지만,
그 죽음은 누군가의 명령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항쟁의 연장선이었습니다.왜 빠졌을까?
남자현은 ‘역사 교과서의 프레임’에 잘 맞지 않는 인물입니다.
- 첫째, 여성이 무장 투쟁을 벌였다는 사실은
전통적으로 여성=비폭력, 돌봄, 상징적 존재로 규정된 서사와 충돌했습니다. - 둘째, 고령의 여성이 거사를 감행했다는 점은
역사 교육에서 흔히 부각되는 ‘청년 독립운동’ 이미지와 불일치합니다. - 셋째, 남자현은 아나키스트 및 사회주의 계열 인물들과도 연계가 있었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이념적 불편함으로도 배제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결국 그녀는 ‘교과서에 넣기엔 너무 복잡하고 불편한 인물’로 간주되었고,
그 결과 독립운동의 현장에서 가장 치열하게 싸운 인물 중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인지도는 여전히 낮은 편입니다.왜 알아야 할까?
남자현은 지금의 MZ세대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을
100년 전에 이미 온몸으로 실천한 인물입니다.- 성별, 나이, 이념의 한계를 넘은 실천
그녀는 자신을 규정짓는 모든 프레임을 깨고
‘어떤 인간이 될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한 전형적인 실천가였습니다. - 주체적이고 다기능적인 독립운동가
남자현은 한의사, 무장 투사, 정보 요원, 여성 교육가 등
다중 역할을 수행한 입체적인 인물이었으며,
이는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MZ세대에게 깊은 공감을 줄 수 있는 역사적 롤모델입니다. - 페미니즘 관점에서의 역사 복원 필요성
그녀의 이야기는 여성이 한 사회의 의사결정과 행동의 중심에 있었던 역사적 증거이며,
이는 단순한 여성 독립운동 서사를 넘어서 역사의 젠더 불균형을 교정할 수 있는 핵심 열쇠입니다.
남자현을 다시 바라보는 관점
구분 기존 인식 우리가 다시 봐야 할 관점활동 형태 여성 독립운동 참여자 (후방 지원 이미지) 실질적 무장 투쟁, 직접 암살 시도, 정보전의 핵심 주체 역사적 위치 언급 빈도가 낮거나 부차적으로 다뤄짐 여성 리더십과 실천력의 결정체, 고령의 실천가이자 다중 역할 수행자 교과서 반영 정도 대부분 빠져 있음 독립운동 서사의 다양성을 위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필수 인물 MZ세대 연결 키워드 나이 탈피, 젠더 저항, 액티비즘, 주체적 실천 프레임 파괴, 자기 정의, 사회적 실천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선구자 마무리 메시지
남자현은 시대의 경계를 넘었고,
역사가 외면한 틀마저도 스스로 깨뜨린 인물이었습니다.“나는 이 나이에, 이 몸으로, 이 정신으로
조국의 자유를 증명할 것이다.”
— 남자현, 옥중 혈서 중에서그녀를 단지 ‘특이한 여성 독립운동가’로 볼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어떤 삶을 선택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로 기억해야 합니다.왜 우리가 ‘잊힌 인물들’을 배워야 할까?
오늘날의 역사 교육은 한정된 시간과 분량으로 인해 선택과 집중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공식 역사’의 전부로 받아들여질 때, 위험은 시작됩니다.- 우리는 단일한 시선이 아닌, 다층적인 시선으로 과거를 바라봐야 합니다.
- 소외된 인물들을 기억하는 것은 단지 과거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가치관을 점검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잊힌 인물을 통해 얻게 되는 관점 확장
효과 설명역사 다층성의 이해 다양한 계급, 성별, 이념, 세대의 시선으로 역사 재구성 가능 비판적 사고력 강화 교과서 중심 사고에서 벗어나 해석과 비교를 통해 사고 확장 사회 정의 감수성 향상 배제된 인물들의 삶을 통해 소외와 차별의 구조를 비판적으로 이해할 수 있음 공공 담론 참여 활성화 ‘기억의 선택’을 고민함으로써 시민으로서 역사 서술에 참여할 수 있는 감각 형성 마무리 메시지: 우리가 ‘기억’을 선택할 차례
학교 교육이 알려주지 않는 역사 속 인물들,
그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제외된’ 것입니다.이제 우리는 단순히 주어진 내용을 암기하는 세대가 아니라,
무엇을 기억할 것인지, 왜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는지 질문할 줄 아는 세대입니다.“기억되지 않은 이름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불릴 그날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오늘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른다면,
그건 과거를 새롭게 쓰는 첫 문장이 될 수 있습니다.'잊혀진 역사 속 인물 탐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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