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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오늘날의 자유와 권리는 누군가의 이름 없는 헌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들을 기억할 차례입니다.
왜 ‘잊혀진 역사 속 인물’을 알아야 할까?
오늘날 우리가 학교나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역사 속 인물은 대부분 몇몇 유명한 이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순신, 세종대왕, 유관순, 안중근 같은 영웅들은 분명 기억할 가치가 있는 인물들이지만,
그 이름들 뒤에는 수많은 무명의 인물들, 숨겨진 영웅들, 목소리를 내지 못한 이들이 존재합니다.특히 대한민국의 공교육 시스템은 수능 중심의 정답형 역사 교육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교과 과정에서 역사의 다양성과 복합성을 담아내는 데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역사를 단순한 ‘사건-결과-주요 인물’의 공식처럼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해지고,
수많은 ‘잊혀진 인물들’은 존재 자체가 가려지거나 축소되어 버리기 일쑤입니다.문제는 이것이 단순히 과거를 잊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역사를 특정 인물이나 승자의 관점으로만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사회 구조의 다면성, 다양한 계층의 목소리, 시대의 변화를 주도한 주변적 존재들을 놓치게 됩니다.
그리고 이는 결국, 현재를 바라보는 시야에도 편견과 단순화를 낳습니다.특히 **MZ세대(밀레니얼 + Z세대)**에게 이런 편향된 역사 교육은 더욱 심각한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MZ세대는 SNS와 디지털 콘텐츠를 통해 정보를 빠르게 습득하고,
다양성과 포용, 정의, 인권, 평등 같은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세대입니다.
그렇기에 이 세대야말로 기존의 영웅 중심 서사를 넘어, 소외된 인물들의 삶과 목소리에 더욱 공감할 수 있는 감수성을 갖추고 있습니다.‘잊혀진 인물’을 아는 것은 단순한 역사 공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이 사회의 구조를 더 깊이 이해하고,
지금의 가치관과 문제의식을 과거의 연속선상에서 해석하는 능력, 즉 역사적 통찰력을 기르는 과정입니다.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여성 독립운동가의 삶을 접했을 때,
그것은 단지 독립운동의 한 조각을 아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여성의 사회 참여와 그에 따른 제약, 차별, 저항을 통찰하는 기회가 됩니다.
또한 식민지 시절 좌우 이념을 넘나든 인물들을 이해하면,
현대 정치의 분열 구조를 단순한 진영 논리로 보지 않고, 복합적 배경을 고려할 수 있는 안목도 갖게 됩니다.<strong>역사는 승자의 기록이 아닙니다.
역사는 다양한 층위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집단 기억’이며,
그 속에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수많은 이름들이 존재합니다.</strong>지금 우리가 그들을 찾아 나서고, 다시 불러주는 행위는
단순한 과거 되새김이 아니라,
현재를 더 정확히 이해하고 미래를 더 깊이 준비하는 힘이 됩니다.잊혀진 인물들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 그들의 이야기에는 오늘날에도 유효한 가치가 담겨 있고,
- 그들의 고통과 선택은 지금의 민주주의, 인권, 자유, 평등의 기초가 되었으며,
- 그들의 이름 없는 헌신은 우리가 누리는 평범한 일상의 밑바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strong>이제는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들이 살아낸 시대와 선택을 되새기며
우리 삶의 방향을 비추는 ‘역사적 거울’로 삼아야 할 때입니다.</strong>MZ세대를 위한 잊혀진 역사 속 인물 10인
이름 시대 주요 업적/의미 추천 이유나혜석 일제강점기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여성운동가 MZ세대 여성 인권 감수성과 연결됨 김상옥 일제강점기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 의열단원 불의에 맞선 청년 정신 이관술 일제강점기~해방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조직적 항일운동 주도 이념을 넘은 독립운동의 다양성 이해 조명희 일제강점기 작가이자 사회운동가, ‘낙동강’ 작가 문학을 통한 저항정신 김마리아 일제강점기 3.1운동 여성 지도자, 비밀결사 ‘대한민국애국부인회’ 결성 여성 독립운동의 주체성 상기 이상설 대한제국 헤이그 특사, 국제사회에 항일 외교 시도 외교의 중요성과 초국적 의식 안중근의 형 안명근 대한제국~일제 형제 독립운동가, 교사로 교육운동 전개 교육과 민족의식 연결 장지연 대한제국~일제 ‘시일야방성대곡’ 저자, 언론인 펜의 힘으로 시대를 저항한 언론인 남자현 일제강점기 여성 독립운동가, 망명지에서 폭탄 거사 시도 여성의 용기, 투쟁 정신 상징 서재필 개화기 갑신정변 주도, 독립신문 창간 개혁과 언론 자유의 출발점 이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유: 각 인물별 조명
1. 나혜석 – 시대를 앞선 ‘페미니스트’
**나혜석(1896~1948?)**은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근대 여성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평가받는 예술가이자 사상가입니다.
그녀는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의 억압 속에서도 “나는 아내이기 전에 인간이다”,
“나는 나로서 살겠다”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펼친 한국 최초의 선언적 페미니스트였습니다.여성에게 ‘개인의 삶’이나 ‘자기 결정권’이라는 개념조차 희미했던 시절,
나혜석은 자신의 작품과 글, 행동을 통해 그 당시 사회가 강요했던 여성상에 도전했습니다.
정혼자 없이 유학을 떠났고, 남성과 대등한 연애를 했으며, 결혼과 이혼을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한 최초의 여성 중 한 명이었습니다.그녀가 1920년대에 발표한 수필 「이혼 고백서」는 지금 읽어도 놀라울 정도로 급진적이고 솔직한 페미니즘 선언문입니다.
이 글에서 그녀는 이혼을 ‘여자의 책임’으로만 돌리는 사회 구조를 비판하고,
결혼 제도 안에서의 여성 억압, 성별 이중잣대, 자유와 자아의 상실 등을 논리적으로 짚어냈습니다.“나는 왜 아내가 된 후에도 화가가 되지 못해야 하는가.”
“왜 결혼이 여자의 꿈을 앗아가는 제도가 되어야 하는가.”
— 나혜석, 「이혼 고백서」 중그녀의 사상은 단순히 페미니즘에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개인의 자유, 자아의 실현, 삶의 주체성 등 오늘날 MZ세대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을
그 시대 누구보다 먼저 탐구하고, 실천한 인물이었습니다.또한 나혜석은 미술 교육자이자 비평가로서도 활약했으며,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서 근대 미술사의 흐름 속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녀의 대표작 <자화상>, <고적> 등은 단순한 그림을 넘어 한 인간이 시대와 맞서 싸운 증거이자 기록입니다.그녀는 생애 후반, 이혼과 사상 탄압, 사회적 배척으로 인해 빈곤과 외면 속에서 쓸쓸히 생을 마쳤지만,
오늘날 그녀의 삶과 작업은 여성 인권, 표현의 자유, 창조적 독립성을 상징하는 유산으로 재조명되고 있습니다.왜 나혜석을 MZ세대가 꼭 기억해야 할까?
- **"나는 나로서 산다"**는 선언은 지금의 자기 정체성, 다양성 존중, 삶의 주체성과 완벽히 맞닿아 있습니다.
- 사회적 기준보다 자신의 감정과 신념을 따라 사는 삶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날 개인의 목소리를 중시하는 MZ세대 정체성과 완벽히 공감되는 지점입니다. - 또한,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는 여성 차별, 사회적 편견, 예술가의 정체성 논란과 연결되며,
나혜석이라는 이름은 과거의 여성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나혜석은 단순히 ‘여성 화가’나 ‘이혼한 여성’이 아닙니다.
그녀는 시대를 앞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낸 사상가이자,
오늘의 사회와 MZ세대가 함께 성찰해야 할 ‘표현의 자유와 자기 실현의 상징’입니다.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누구로 살 것인가?”
“나는 나로서 살고 있는가?”2. 김상옥 – 정의를 향해 불을 던진 청년
1923년 1월 12일 밤, 서울 종로 한복판이 흔들렸습니다.
한 청년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일제 경찰과 1시간 넘게 시가전을 벌이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이야기는 결코 소설도, 영화도 아닌 실제 역사 속 이야기,
그리고 그 주인공은 청년 독립운동가 김상옥 의사입니다.김상옥은 1890년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고,
의열단(義烈團) 소속으로 활동하며 일제의 핵심기관을 직접 타격하는 ‘의거’ 중심의 무장 독립운동을 벌였습니다.
그의 목표는 단순한 상징적 저항이 아닌,
일제 통치의 중심부를 실제로 흔들고 공포에 빠뜨리는 구체적 실천이었습니다.종로경찰서 폭파 사건은 치밀한 계획 하에 실행되었으며,
김상옥은 폭탄 투척 직후 일경과의 총격전을 벌이며 서울 시내 골목으로 이동,
1시간 이상 도심을 휘젓는 실전 게릴라 작전을 감행했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조선인뿐 아니라 일본인 사회에도 큰 충격을 안겼고,
일제의 공포와 통제에 금이 가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김상옥 의사의 ‘영화보다 극적인 최후’
그의 체포 작전은 무려 일제 경찰 1,000여 명이 투입된 대규모 수색전으로 이어졌습니다.
김상옥은 도피 중에도 끝까지 다른 동지들의 신상을 지키며 홀로 도망,
숨었던 서대문 근처 민가에서 마지막 총알 한 발로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의 나이, 고작 33세였습니다.김상옥의 최후는 단순한 ‘비극적인 죽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념을 끝까지 지킨 청년의 의지,
그리고 ‘정의는 반드시 싸워야 얻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은 젊은 저항의 상징이었습니다.왜 김상옥을 MZ세대가 기억해야 할까?
- 정의감과 실천력:
김상옥은 단순히 불의에 분노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 자신의 정의를 구현해낸 실천가였습니다.
오늘날 MZ세대가 사회 불평등, 권력 비판, 젠더 이슈, 환경 운동에 열정적으로 반응하는 모습과 통합니다. - 청년의 용기:
그는 명문가 출신도 아니었고, 특별한 후원자도 없었지만
청년의 에너지와 신념 하나만으로 역사를 움직였습니다.
이 모습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을 하자’는 청년 정신을 되새기게 합니다. - 공감과 연대의 정신:
그는 의열단의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모든 혐의를 떠안고 홀로 싸웠습니다.
그 정신은 MZ세대가 중시하는 연대, 책임, 공동체의 가치와 맞닿아 있습니다.
김상옥이 남긴 메시지
“나는 폭탄으로 저항했다. 내 한 몸을 던져서라도 이 땅의 부당함을 알리고 싶었다.”
— 의열단 항일 선언문 중에서 재구성그의 이야기는 단지 ‘멋진 항일 무장투쟁’의 사례로만 기억되어선 안 됩니다.
<strong>그는 지금도 불의한 구조에 맞서 싸우는 모든 젊은이들의 선배이자,
정의와 실천의 의미를 되묻는 물음표이기도 합니다.</strong>오늘날 김상옥을 기억하는 방식
- SNS에서 #의열단 #김상옥챌린지 같은 태그로 독립운동 콘텐츠를 공유해 보세요.
- 김상옥 관련 다큐멘터리나 연극 관람을 친구들과 함께 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경험이 됩니다.
- 학교나 단체 활동에서 청년 독립운동가 사례 탐구 발표로 그를 조명해보세요.
김상옥은 100년 전의 인물이지만,
그가 가졌던 정의감, 두려움을 넘는 용기, 청년다운 결단력은
오늘날에도 살아 있는 이야기입니다.지금 이 시대의 김상옥은 어쩌면,
당신일 수도 있고, 당신 옆자리의 누군가일 수도 있습니다.3. 이관술 – 좌우를 넘어선 독립의 신념
**이관술(1902~1950)**은 독립운동의 거대한 조류 속에서도
특히 이념을 넘어선 실천과 조직력, 냉철한 전략의 상징으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그는 흔히 알려진 의열단이나 광복군 계열과는 다른 길을 걸었고,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의 핵심 인물로서 당시로서는 금기였던 사상과 행동을 통해 조국 독립에 헌신했습니다.1919년 3.1운동 당시 고등학생이던 그는 강한 충격을 받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이후 상해로 건너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조직적 지하항일 네트워크 구축, 치밀한 문서 활동과 교육운동에 매진하며
단순 무장 투쟁이 아닌 정치-이념-교육-민중 조직화라는
복합적 전략으로 일제에 맞선 보기 드문 독립운동가였습니다.그의 독립운동은 무엇이 달랐나?
이관술의 활동은 흔히 알고 있는 감정적 항거나 일회성 무장 투쟁과는 다릅니다.
그는 조선공산당 및 사회주의 계열 조직을 통해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조직 혁신을 시도했으며,
당시 조선사회에 팽배한 계급 문제와 민중 해방, 노동운동, 농민 조직화 등을 결합해
민족 해방과 사회 해방을 동시에 추구한 전략적 실천가였습니다.또한 그는 조선독립운동의 국제화에도 기여했습니다.
중국, 소련 등과의 연계를 통해 반제국주의 전선에서 조선 문제를 제기했으며,
국내에서는 비밀결사 활동, 출판 활동, 사상 교육을 통해
자주적 사고를 가진 민중을 키워내는 데 집중했습니다.이념 논쟁 속에서 잊힌 인물
광복 이후 그는 조선로동당(북한)과의 연계,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대한 반대 입장으로 인해 남한 사회에서 정치적 사형선고를 받은 인물로 평가되곤 했습니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그는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되었습니다.그가 실제로 간첩이었는지, 아니면 냉전의 희생양이었는지는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조선의 독립을 위해, 누구보다 전략적으로, 누구보다 오래도록 싸운 독립운동가라는 점입니다.왜 이관술을 MZ세대가 기억해야 할까?
- 좌우를 넘은 실용적 독립운동 모델
이관술은 이념보다 독립과 민중의 해방을 우선시한 실천적 사상가였습니다.
지금도 한국 사회는 이념 대립과 진영 논리에 갇히기 쉬운 구조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목표를 위해 사상과 전략은 수단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줍니다. - 교육과 조직을 중시한 전략가형 운동가
단순 감정적 저항이 아닌 지속 가능한 운동 구조를 설계한 독립운동가라는 점에서
MZ세대가 관심 갖는 ‘시스템 기반의 사회 개혁’ 모델과 맞닿아 있습니다. - 비판적 사고와 독립적 판단의 아이콘
정부가 미워했던 인물이지만, 국가보다 민족과 민중의 이익을 먼저 본 인물입니다.
MZ세대가 중시하는 정의감, 비판적 시선, 구조 개선 욕구와 매우 유사한 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4. 조명희 – 펜을 든 혁명가
**조명희(1894~1938)**는 흔히 단편소설 『낙동강』의 작가로 기억되지만,
그의 삶과 사상은 단순한 문학인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는 펜을 들고 저항을 실천한 문학 혁명가이자,
가난하고 억눌린 민중의 목소리를 사회와 권력 앞에 전달하려 했던 진보적 실천가였습니다.그가 활동한 시대는 일제강점기의 한가운데였습니다.
정치적 억압은 물론,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철저히 통제되던 시기,
조명희는 문학을 무기 삼아 조선의 현실을 고발하고,
당시 민중들이 겪던 가난, 착취, 절망, 좌절의 실체를 작품 속에 정면으로 담아냈습니다.그의 대표작 『낙동강』은 단순히 강을 배경으로 한 단편이 아니라,
식민지 하에서 인간답게 살 수 없는 민중의 절망을 그린 리얼리즘 소설로 평가받습니다.
당시 조선 문단이 주로 상류층 중심의 낭만적 또는 계몽적 주제를 다루던 것에 반해,
조명희는 철저히 노동자·농민·빈민층의 삶을 관찰하고 대변하는 방식의 문학 활동을 이어갔습니다.문학과 혁명의 경계를 허문 인물
조명희는 단지 현실을 묘사하는 작가가 아니라, 문학을 통한 사회 변혁을 직접 꿈꾼 운동가였습니다.
그는 **1920년대 초반부터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 참여하며
문학의 사회적 책임과 계급 해방 기능을 주장했고,
글을 쓰는 것 그 자체가 혁명의 실천이라고 믿었습니다.이후 조명희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소련으로 망명,
그곳에서도 극동공산대학 교수, 소비에트 작가, 신문 편집인, 극작가로 활동하며
한시도 펜을 놓지 않고 조선 민중과 세계 민중의 연대를 꿈꿨습니다.하지만 1938년, 소련 내 대숙청의 광풍 속에서 ‘간첩 혐의’로 체포된 후,
정확한 재판도 없이 총살형에 처해지는 비극적 최후를 맞았습니다.
그의 무덤조차 남아 있지 않습니다.왜 조명희를 MZ세대가 기억해야 할까?
- 펜 하나로 세상을 바꾸려 한 사람
조명희는 총이 아니라 펜으로,
폭력이 아니라 문장과 서사로 세상을 움직이려 했습니다.
이는 지금의 MZ세대가 갖는 소셜 미디어를 통한 언어적 저항, 콘텐츠 기반 실천과도 닮아 있습니다. -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한 작가
그가 남긴 작품은 단 한 편도 권력자나 지배 계층의 삶을 아름답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는 언제나 눈에 잘 띄지 않던 민중의 고통과 분노, 생존의 언어를 세상 밖으로 끌어올린
문학 속의 진정한 언론인이자 투사였습니다. -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독립의 상관관계를 증명한 인물
그가 활동했던 공간과 시기는 철저히 ‘검열의 시대’였고,
그는 끝까지 글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언론 자유, 검열, 창작의 경계가 논란이 되는 가운데,
조명희는 그 경계선에서 싸운 실존적 증거로 남아 있습니다.
5. 김마리아 – 여성 독립운동의 상징
**김마리아(1892~1944)**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3.1운동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인물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까지도 ‘여성 독립운동가’라는 범주에서조차 상대적으로 조명받지 못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녀는 단순한 참여자가 아니라, 운동의 조직자이자 지도자였습니다.
남성 중심의 독립운동사 서술에서 지워진 이름 중 하나였지만, 이제는 다시 조명받아야 할 이름입니다.김마리아는 3.1운동 당시 여성 대표자로 참여해 만세 시위를 주도했고,
그 뒤에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라는 비밀결사 조직을 결성해 자금 모금, 정보 전달, 부상병 돌봄,
심지어 무기 전달까지 수행하는 등 체계적이고 실질적인 독립운동을 이끈 리더였습니다.
조직력, 결단력, 신념, 행동력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던 인물이죠.조용히 강한 리더십, 그리고 수차례의 고문과 투옥
김마리아는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수차례 고문을 당했고,
한 번은 의식을 잃을 정도로 심각한 고문 끝에 풀려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시 독립운동 현장으로 복귀했고, 이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와 연계된 활동도 이어갔습니다.그녀는 단순히 독립운동만 한 것이 아니라,
여성의 교육과 사회 참여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이화학당(이화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을 졸업한 뒤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그는,
여성도 조국을 위해 싸우고, 정치·경제·교육에 참여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사고와 실천을 겸비한 여성 리더였습니다.김마리아는 단지 ‘여성’이 아니었다
그녀를 단순히 ‘여성 독립운동가’로만 기억하면 안 됩니다.
김마리아는 성별을 넘어선 행동가이자 전략가, 조직가였고,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매우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성과를 만들어낸 중심 인물이었습니다.
그녀가 없었다면 수많은 만세운동과 비밀조직은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하지만 그녀의 이름은 대부분의 교과서에서 단 한두 줄로 언급되거나,
심지어 빠져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여성’이었기 때문입니다.왜 김마리아를 MZ세대가 기억해야 할까?
- 진짜 여성 리더십의 상징
김마리아는 말로만 권리를 외친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사람을 조직하고, 책임지고, 싸운 진짜 여성 리더였습니다.
오늘날 MZ세대가 중요시하는 젠더 평등, 여성의 사회적 기여, 구조 개선이라는 가치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 불리한 조건에서도 싸운 실천가
그녀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나약하다는 이유로 수없이 무시당했지만,
매번 현장으로 돌아가 자신의 방식으로 싸움을 계속한 실천형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이 모습은 오늘날 직장, 학교, 사회에서 차별을 겪는 청년들이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 보이지 않는 돌봄과 조직의 가치
김마리아는 총을 들고 싸우지는 않았지만,
누군가가 총을 들 수 있게 만드는 뒤의 기반을 조직하고 운영한 사람입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보이지 않는 노동, 감정 노동, 조직 내 숨은 리더십의 중요성을 되새기게 합니다.
6. 이상설 – 국제사회에 외쳤던 조선의 외교가
**이상설(1870~1917)**은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를 잇는 시기,
펜과 외교력으로 조선의 독립 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했던 대표적인 외교 독립운동가입니다.
그의 삶은 단지 국내에서의 의병 활동이나 민족 계몽에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조선을 넘어 세계로, 그 시대 외교의 무대로 나아간 국제적 감각의 선구자였죠.그가 가장 널리 알려진 사건은 바로 1907년의 헤이그 밀사 파견 사건입니다.
당시 고종 황제는 을사늑약(1905) 이후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 강제로 박탈되자,
비밀리에 세 명의 밀사—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합니다.
일제의 침략이 국제법상 부당함을 호소하고, 조선이 자주국임을 주장하기 위함이었습니다.헤이그 특사, 외교 독립운동의 상징
이상설은 헤이그에 도착하자마자 전 세계 기자단 앞에서 조선이 주권을 박탈당한 사실과 일본의 불법성을 고발하는
선언문을 낭독했고, 당시 회의에 참석한 여러 국가 대표에게 조선의 독립 의지를 담은 문서를 전달했습니다.비록 회의장에는 입장하지 못했지만, 그의 발언은 국제 언론을 통해 전 세계에 퍼졌고,
당시 동양의 작은 나라가 자신의 권리를 위해 목소리를 낸 일은 강한 인상과 동정 여론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아닌, **‘독립국으로서 국제사회에 존재감을 드러낸 첫 사례’**이기도 했습니다.“우리 조선은 스스로의 주권을 지닌 나라이며,
일제는 이 땅을 강제로 침탈했음을 세계에 고합니다.”
— 이상설, 헤이그 선언 중이후 그는 귀국하지 않고 블라디보스토크, 만주 등지에서 망명 정부 조직과 무장 항일 활동을 병행하며
외교·교육·무장 투쟁을 넘나드는 실천형 독립운동가로 살아갔습니다.‘글로벌 마인드’를 앞서 산 조선의 외교관
이상설은 단지 상징적 외교인이 아닙니다.
그는 러시아어, 영어, 한문에 능통한 국제 지식인이었으며,
교육자, 학자, 정치가, 외교관이라는 다층적인 정체성을 가진 복합형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설립에 참여한 **‘서전서숙’**은 한민족 최초의 근대식 민족학교 중 하나로,
단순한 애국 교육이 아니라 국제 감각과 독립의식, 과학 기술을 함께 교육한 미래 지향적 공간이었습니다.그는 항상 말했습니다.
“우리의 독립은 조선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질서의 정의를 묻는 문제다.”
이는 지금의 MZ세대가 지향하는 글로벌 감각, 정의감, 연대의 가치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왜 이상설을 MZ세대가 기억해야 할까?
- 글로벌 시대의 시야를 먼저 실천한 인물
단지 조선 안에서만 싸운 것이 아니라, 국제사회와의 연결을 통해 외교의 중요성을 보여준 인물입니다.
오늘날 국제 회의, 글로벌 연대, SNS 외교 등으로 대표되는 MZ세대의 국제적 감수성과 직결됩니다. - 표현력과 전략의 결합
이상설은 감정적 고발이 아니라, 문서와 언어를 기반으로 국제 질서 속에서 조선을 주장한 이성적 전략가였습니다.
이는 팩트와 논리를 중시하는 디지털 세대의 커뮤니케이션 방식과도 닮아 있습니다. - 가치 기반 실천가
이상설은 단 한 번도 ‘명분 없는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국가의 자존, 인민의 권리, 그리고 국제적 정의라는 가치를 중심에 두고 움직였고,
이념이 아닌 인간성과 주권의 논리로 세계에 다가간 실천적 외교가였습니다.
7. 안명근 – 교단에서 민족을 지킨 사람
**안명근(1861~1939)**은 위대한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의 형이자,
그 자신도 교사, 교육자, 사상가로서 조용하지만 깊은 항일 정신을 실천한 인물입니다.
무기를 들고 싸우지는 않았지만, 그는 ‘교육은 민족의 숨결을 지키는 일’이라는 신념으로 평생을 바쳤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르침’을 통해 사회를 바꾸려 한다면,
그 시작점에 안명근 같은 존재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형과는 다른 길, 하지만 같은 신념
많은 사람들이 안명근을 단지 안중근의 형으로만 기억하거나,
별다른 활동이 없는 인물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동생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더 길고 깊게 민족을 위한 길을 걸어간 실천가였습니다.그는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사립학교 설립, 민족 교육 보급, 유학 장려 활동을 꾸준히 이어갔고,
동생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총을 쏘아 정의를 외쳤다면’, 안명근은 ‘교실에서 펜을 들어 정신을 지켜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교단 위에서 실천한 항일 정신
안명근은 교육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절실하게 믿었습니다.
그는 “총칼로는 나라를 지킬 수 없지만, 교육으로는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고 말하며
교육을 통한 독립운동, 사상 계몽, 민족 자각 운동에 힘을 쏟았습니다.그가 설립하거나 후원한 학교에서는 한문과 서양문물을 병행하며 가르치되,
항상 민족 정체성과 자주 정신을 중심에 두는 교육 철학이 강조되었습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우리의 말과 글, 우리의 역사와 혼을 알아야 진짜 조선 사람”이라고 가르쳤으며,
이는 일제가 조선어와 조선사를 말살하려던 시기에는 곧 항거 행위로 간주될 만큼 대담한 교육이었습니다.왜 안명근을 MZ세대가 기억해야 할까?
- 지속 가능한 변화는 교육에서 출발한다는 믿음
MZ세대는 빠르게 변하는 디지털 사회에서 끊임없이 ‘배움’과 ‘성장’을 추구합니다.
안명근이 지닌 철학은, 즉각적인 결과보다 다음 세대를 위한 준비에 집중한 길고 깊은 저항의 방식이었습니다. - 조용하지만 강한 리더십
그는 연설가도, 군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영향력은 수많은 젊은이들의 민족 의식을 깨웠고,
항일 운동의 인적 기반을 다지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조용히 책임을 다하는 리더십, 지금도 조직과 사회 속에서 필요한 덕목이죠. - 지속가능한 민족 정체성 보존 운동
MZ세대는 다양성과 세계시민 의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서 ‘나는 누구인가’, ‘우리 문화는 무엇인가’라는 정체성의 뿌리 찾기에도 깊은 관심을 가집니다.
안명근은 교육을 통해 우리 민족의 언어, 역사, 사상을 지켜내고자 했던 진정한 문화 보존가였습니다.
8. 장지연 – 펜으로 저항한 언론 혁명가
**장지연(1864~1921)**은 일제강점기 전후를 관통한 대표적 언론인·사상가·계몽운동가입니다.
그는 무장투쟁을 하지도, 해외 망명을 하지도 않았지만,
자신의 무기는 언제나 펜이었고, 활자는 그의 총알이었습니다.
조선 말기와 식민지 초기의 위기 상황에서 ‘글’ 하나로 민중을 일깨우고,
부조리한 현실에 맞섰던 언론 혁명가 — 그것이 바로 장지연입니다.‘시일야방성대곡’ – 분노의 저널리즘
1905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박탈한 을사늑약(을사조약) 체결 직후,
장지연은 당시 황성신문(皇城新聞)의 논설주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단 하루도 지체하지 않고,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사설을 통해
민족의 울분과 비탄을 그대로 담아낸 글을 세상에 내놓습니다.“이 날에 통곡하지 않는 자는 그 부모가 없거나, 그 자식이 없는 자일 것이다.”
— 시일야방성대곡 中이 한 편의 글은 신문의 글이 아니라, 민중의 심장을 흔드는 절규였습니다.
이 글은 발행되자마자 전국으로 퍼졌고,
일제 당국은 즉시 황성신문을 폐간시키고 장지연을 탄압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대한민국 언론사에서 최초의 저항적 언론 실천 사례로 기록되며,
그는 **‘펜으로 싸운 항일 투사’**라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장지연의 ‘언론 독립운동’
장지연은 단지 ‘화려한 문장력’을 가진 논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언론이 민족의 의식을 각성시키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정보 전달이 아닌 사상 계몽과 저항의 수단으로 언론을 활용했습니다.그는 보수적인 양반 출신이었지만,
교육 계몽 운동, 문맹 퇴치, 근대적 학문 소개에 앞장서며
민중과 지식인의 경계를 허물고자 했습니다.
특히 한글 사용 확대와 국어 교육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이를 통해 언어가 곧 민족의 자존심이라는 사실을 설파했습니다.왜 장지연을 MZ세대가 기억해야 할까?
- 콘텐츠로 사회를 바꾸려 한 최초의 ‘콘텐츠 크리에이터’
지금 시대는 콘텐츠가 세상을 바꾸는 시대입니다.
장지연은 인쇄 매체가 거의 유일한 ‘SNS’이던 시절에,
한 편의 사설로 여론을 바꾸고 민심을 흔든 콘텐츠 메이커였습니다. - 표현의 자유에 목숨 건 선구자
오늘날 MZ세대는 표현의 자유, 언론의 독립성, 검열 문제에 민감합니다.
장지연은 이 모든 것을 100여 년 전 신문지 한 장으로 실현해낸 선각자입니다.
그는 글로 목숨을 걸었고, 글로 민족을 일으켰습니다. - 비판적 사고와 대중 공감의 결합
장지연의 글은 지식인의 논리적 구조를 가지면서도,
감정과 공감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는 지금도 MZ세대가 추구하는 ‘팩트 + 감성’의 공감형 커뮤니케이션과 맞닿아 있습니다.
9. 남자현 – ‘여성’으로서 싸운 독립운동가
**남자현(1872~1933)**은 독립운동사 속에서도 가장 강인한 실천력을 지닌 여성 투사 중 한 명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녀는 단순한 후방 지원이나 정보 전달을 넘어서,
직접 폭탄을 들고 암살을 시도했던 무장 독립운동가였으며,
한 여성이 그 모든 걸 단독으로 감행했다는 점에서 더욱 놀라운 인물입니다.남자현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여성 독립운동가’라는 이미지—
예를 들어 만세 운동 참가자, 간호 지원자, 자금 후원자—와는 결이 완전히 다릅니다.
그녀는 현장에서 행동했고, 계획했고, 목숨을 걸었습니다.
‘여성’이라는 정체성은 결코 그녀의 한계가 아니었고,
오히려 그녀가 선택한 실천의 방식은 시대를 초월한 저항의 상징입니다.권총과 폭탄, 그리고 결연한 신념
남자현은 평범한 농가에서 태어났지만, 일찍부터 여성의 교육권과 독립 의식에 눈을 떴습니다.
40세가 넘어서야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아나키스트 계열의 항일조직과 연계하며,
중국과 만주 등지에서 무기 운반, 정보 수집, 거사 계획 수립, 인물 암살 시도에 이르기까지
정말로 ‘현장 중심의 활동가’로 삶을 살았습니다.그녀의 대표적 활동 중 하나는
1933년 일본 육군대장 가네코 타케시 암살 시도 사건입니다.
그녀는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권총과 폭탄을 숨긴 채 접근을 시도했지만,
계획 도중 사전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끝내 순국했습니다.당시 그녀의 나이, 62세였습니다.
60대 노년의 여성이라는 사실은
오히려 그녀의 의지와 독립정신이 얼마나 단단했는지를 반증합니다.붓과 침으로도 싸운 여성
남자현은 무장 투쟁 외에도 암호 문서 작성, 의약품 제조, 독립군 치료, 비밀 회람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녀는 침을 놓을 줄 아는 한의사였고,
동료 독립군들의 몸과 마음을 동시에 치료하는 돌봄과 실천의 복합형 투사였습니다.또한, 그녀는 구속된 상태에서도 한자로 된 혈서를 작성해 상하이 임시정부로 보냈으며,
그 피로 쓴 글은 지금도 독립운동 자료관에 보관되어 있는
‘피의 편지’로 기억됩니다.“나는 이 몸을 나라에 바치기로 결심한 지 오래이며,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도 조국 해방을 위해 헌신할 것입니다.”
— 남자현, 혈서 중에서왜 남자현을 MZ세대가 기억해야 할까?
- 나이에 갇히지 않은 도전의 아이콘
60세가 넘은 나이에 폭탄을 들고 스스로 거사에 나섰다는 것은
지금의 MZ세대가 중요하게 여기는 **‘나이 중심 사고의 해체’, ‘자기 삶의 주체성’**과도 일맥상통합니다. - 젠더의 한계를 스스로 깨뜨린 실천가
남자현은 여성에게 주어진 역할이란 없다는 것을 몸으로 증명했습니다.
지금도 여성들이 구조적으로 제한받는 사회 속에서,
그녀의 실천은 성별 이분법을 넘는 존재로서의 용기를 상기시킵니다. - 단단한 신념과 다기능적 역할 수행자
그녀는 단순한 투사가 아니라, 간호사, 한의사, 정보원, 작가, 전사였습니다.
이는 다양한 정체성과 능력을 동시에 가진 MZ세대에게 롤모델이자 영감을 주는 실존형 캐릭터입니다.
10. 서재필 – 언론과 개혁의 상징
**서재필(1864~1951)**은 대한민국 최초의 언론 창간인,
실용주의 개혁 사상의 실천가, 그리고 해외에서 활동한 대표적 지식인 정치가로
조선과 대한민국의 근대화를 말로만 주장한 것이 아닌,
구체적인 시스템과 제도를 만들고 실천에 옮긴 선각자였습니다.그는 ‘독립신문’을 창간해 언론의 힘으로 민중 계몽과 개혁을 시도했으며,
자신의 말과 글, 조직 활동을 통해 민주주의, 평등, 자유, 법치의 가치를 조선 땅에 뿌리내리려 한 개화운동의 선구자였습니다.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 ‘독립신문’
서재필은 1896년, 귀국 직후 한글과 영문으로 발간된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합니다.
이 신문은 단순한 뉴스 전달 수단이 아니라,
식민 지배에 맞선 정신 무장, 공공 담론의 형성, 시민 계몽을 위한 플랫폼이었습니다.“독립신문은 조선 민중이 스스로 생각하고 말할 수 있도록 돕는, 조선 최초의 ‘생각 도구’였다.”
그는 이 신문을 통해 신문의 언어를 어렵고 권위적인 한문에서 벗어나,
한글로 쓰여 누구나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게 한 ‘대중 언론 혁명’을 선도했습니다.
또한 여성, 청년, 노동자, 농민 등 당시 글을 접하기 어려웠던 계층까지 아우르는
‘참여형 언론’의 초기 모델을 만들어냈습니다.개혁은 실천이어야 한다
서재필은 언론뿐 아니라, 제도 개혁, 교육운동, 공공 의료, 위생 개혁 등
실생활 속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 실용적 정치사상가였습니다.- 그는 **갑신정변(1884)**에 참여한 개화파로서 조선의 봉건적 신분제와 부패 관료 체제에 반기를 든 개혁 운동가였으며,
- 망명 이후 미국에서 의사 면허를 취득하고, 의사이자 정치가로 활동하며 조선의 미래를 준비했습니다.
그는 “정치란 백성을 위하는 것이며, 백성이 이해할 수 없는 정치와 제도는 실패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철학은 그가 주장한 언론과 교육, 의료, 법제 개혁에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왜 서재필을 MZ세대가 기억해야 할까?
- 공공 담론의 출발선
MZ세대는 SNS, 유튜브, 커뮤니티 등을 통해 스스로 ‘의제’를 설정하고 의견을 공유합니다.
서재필은 지면 언론이라는 당시 유일한 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말할 권리’와 ‘생각의 자유’를 제도화한 개척자였습니다. - 실용적 이상주의자
그는 추상적 개혁이 아닌, 제도·교육·의료 등 실질적 변화를 설계한 실천가였습니다.
지금의 MZ세대가 추구하는 **‘현실을 바꾸는 가치 지향적 행동’**과 완벽히 맞닿아 있습니다. - 다양성과 국제 감각의 아이콘
조선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고, 미국 의회 내에서도 활동했던 그는
조선과 세계를 잇는 초국가적 네트워크를 가진 1세대 국제 정치인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MZ세대가 중시하는 글로벌 감각, 초연결 사회 속 시민성과 깊이 관련이 있습니다.
MZ세대가 기억해야 할 ‘잊혀진 인물’의 공통점은?
공통 키워드 설명시대를 앞선 생각 여성 인권, 평등, 국제 연대 등 지금도 유효한 가치 추구 구체적 실천 단순한 이론이 아닌 직접 행동으로 변화 시도 기록에서 소외됨 교과서와 주류 역사 담론에서 자주 누락됨 오늘의 문제와 연결됨 기후 위기, 젠더, 사회 정의 등 현재 MZ세대가 관심 갖는 이슈와 맞닿아 있음 마무리: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우리가 잊고 있는 이름을 다시 불러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역사를 살아 있게 만드는 시작입니다.MZ세대는 과거를 소비하는 세대가 아니라, 의미를 재해석하고 실천하는 세대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이 인물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정신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번역해야 할 때입니다.이름 없는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가 해야 할 역사 공부입니다.'잊혀진 역사 속 인물 탐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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