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니의 잊혀진 역사 속 인물 탐구

잊혀진 역사 속 인물 탐구에 대해서 글을 작성합니다.

  • 2025. 5. 21.

    by. 지아니13

    목차

      김활란은 일제강점기와 해방기를 지나며 여성 교육, 보건, 위생 문제에 꾸준히 목소리를 낸 교육자입니다. 그녀는 단지 교사가 아닌, 여성의 ‘삶 전체’를 고민한 행동하는 지식인이었습니다.

      김활란은 누구인가?

      **김활란(金活蘭, 1899~1970)**은 한국 여성 교육의 현대적 기틀을 세운 대표적인 인물이자,
      근대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에 대해 누구보다 깊이 고민하고 실천한 교육자, 여성운동가, 행동하는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녀는 한국 최초의 여성 박사 중 한 명으로,
      이화여자전문학교 초대 학장을 거쳐 해방 이후 이화여자대학교 초대 총장을 역임하며
      여성 고등교육의 제도화와 정체성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김활란이 활동하던 시기는 일제강점기로,
      조선 여성은 대부분 문맹 상태였으며, 학교 교육을 받을 기회조차 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성 교육을 ‘집안일을 잘하도록 하기 위한 부차적 과정’으로 여겼고,
      **“여성은 좋은 아내와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만 교육받아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김활란은 그 틀을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그녀는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사유하고 표현하며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주체적 존재라고 보았고,
      따라서 여성에게 학문은 선택이 아니라 권리이며,
      지적 성장과 자기 표현의 기회는 여성 인권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
      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무엇보다 김활란은 ‘교육’이라는 개념을 단지 교실 수업에 국한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삶 전반을 구성하는 요소—신체 건강, 영양, 위생, 사회활동, 법적 권리, 가정 내 권위—모두를 교육의 범주로 포함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녀가 제시한 교육의 이상은 전인 교육(全人敎育), 즉 인간의 정신·지성·육체를 통합적으로 성장시키는 교육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김활란은 1930년대부터 ‘여학생 생리 위생 교육’, ‘산모 건강 강의’, ‘여성 보건 및 가사과학’ 등을
      학교 커리큘럼 안으로 포함시키려는 시도를 주도했으며,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인 시도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이후 1960년대에 본격적으로 제기되는 성 건강, 여성 신체 주권, 생리 공결제 등 젠더 기반 복지정책 논의의 선구적 발화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활란은 또한 국제 여성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한국 여성의 현실을 세계 여성계에 알리고,
      해외의 여성 교육 모델과 보건정책을 국내에 도입하는 데도 열정을 보였습니다.
      그녀는 유엔 여성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여성 교육과 보건, 인권에 관한 국제 연대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한국 여성이 ‘국가의 국민’을 넘어서 ‘세계 시민’으로 자각할 수 있도록 시야를 넓히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을 종합해보면, 김활란은 단순한 학교 운영자가 아니라
      여성의 ‘삶 전체’를 교육이라는 틀로 해석하고 기획한 시대의 사상가이자 실천가였습니다.
      그녀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지적 독립성과 건강한 신체로부터 비롯된다’는 원칙을 기반으로,
      학문과 보건, 사회적 권리를 모두 포괄하는 여성 인권교육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김활란은 “여성이기 때문에 못하는 일”을 허무는 대신,
      “여성이기 때문에 더욱 필요한 일”을 찾아내고 그것을 실현한 교육자였습니다.
      그녀의 사상과 실천은 지금 우리가 말하는 통합 교육, 젠더 감수성, 자기 주도적 삶의 철학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자도 배워야 한다!” 김활란, 근대 여성 교육의 문을 연 인물

      시대를 앞선 여성 교육 철학

      "여성은 스스로 생각하고 배울 수 있다"

      김활란이 활동하던 시기, 조선 사회는 일제의 식민 통치 하에 있었고,
      식민 교육 정책은 조선인 전체를 피지배 계층으로 억압하는 동시에,
      특히 여성에게는 ‘배움’의 가능성조차 허용하지 않는 극단적 차별 구조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여성은 ‘가정 안의 존재’, ‘순종과 정숙의 상징’, ‘남성 뒤의 조력자’로만 규정되었고,
      교육은 여성에게 필요 없는 사치로 간주되었습니다.
      기껏해야 ‘바느질’이나 ‘가사일’을 잘 하도록 가르치는 실용 위주의 제한적 학습만이 일부 허용되었을 뿐,
      여성이 철학을 배우고, 역사와 문학을 읽고, 자신의 관점을 글로 쓰는 일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김활란은 그러한 사회 구조를 정면으로 비판하며,
      여성도 스스로 생각하고 배우며, 지식을 통해 세상과 관계 맺고 책임질 수 있는 존재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녀는 인간의 지적 능력과 도덕적 사유는 성별과 무관하게 보편적 능력이며,
      교육은 그 능력을 실현할 기회를 평등하게 제공해야 하는 기본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김활란은 **이화학당(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여학생들에게 단순히 ‘교과서 지식’을 주입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매 수업, 매 강연에서 여성 스스로가 자기 삶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반복했고,
      그 중심에는 다음과 같은 철학이 있었습니다:

      “여성은 침묵의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묻고, 의심하고, 정리하며, 책임지는 존재다.
      사회는 그런 여성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교육 철학은 매우 선진적이었으며,
      당시에는 ‘불온하다’, ‘여성을 선동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김활란은 지식이 곧 해방의 시작이며,
      여성이 세상과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스스로의 사고와 언어를 갖는 것
      이라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강조한 것은 단지 문법이나 수학 같은 지식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목소리’이며,
      그 목소리를 갖기 위한 첫걸음이 ‘질문할 수 있는 용기’**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화학당에서 그녀는 학생들에게 언제나 다음과 같은 능력을 강조했습니다:

      • 질문하는 힘: 남성 중심 지식 체계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고력
      • 기록하는 능력: 자신의 생각을 글로 정리하고 표현하는 글쓰기 훈련
      • 토론하는 자세: 사회적 사안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하고 듣는 연습
      • 행동하는 용기: 배운 것을 현실에서 실천하는 책임 있는 시민 의식

      이러한 교육은 단순한 교과 과정이 아니라,
      여성의 자존감, 판단력, 사회적 자각을 키우는 인문학적 훈련이자 주체 훈련이었습니다.

      또한 김활란은 여성 학생들에게 자신의 삶과 목소리가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일을 교육의 핵심 과제로 삼았습니다.
      그녀는 여성 교육이란 단지 결혼이나 가정생활의 준비가 아니라,
      시민으로서 세상을 이해하고, 참여하고, 책임지는 존재로 키우는 작업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여성은 스스로 생각하고 배울 수 있다”는 김활란의 선언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당시의 억압된 여성 현실을 해체하는 날카로운 시대 비판이었고,
      동시에 그 대안을 실천하려 한 교육 혁명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이 문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여전히 누군가는 말합니다—“여자는 조용해야 한다, 여자는 따져선 안 된다.”
      그럴 때 우리는 김활란의 언어를 떠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여성은 질문할 수 있다.
      그리고 배운 여성은, 결코 이전의 여성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교육은 ‘보건’에서 시작된다 – 여성 삶의 현실을 마주한 교육자

      여성의 몸, 건강, 위생을 말한 최초의 여성 교육자

      김활란은 단순히 지식만 전달하는 교사, 교과서에 나오는 정보를 가르치는 ‘교과형 교육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교육이라는 영역을 인간의 전 생애로 확장해 이해했던 통합형 교육자였으며,
      특히 여성의 삶과 직결되는 신체 건강, 위생, 영양, 출산, 생리 등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들을 교육 현장으로 끌어온 선구자였습니다.

      그녀가 활동하던 1930년대 조선 사회는, 여성의 몸과 관련된 문제—예를 들어 **생리, 임신, 출산, 산후 회복, 여성 위생 등—이
      ‘숨겨야 할 것’, ‘입 밖에 내선 안 되는 것’,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지던 시기였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여성의 건강은 공공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고,
      여학생들은 스스로의 몸에 대해 무지하거나 부정적인 태도를 내면화한 채 성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김활란은 이 문제를 단순한 개인의 위생 문제가 아니라, 여성 인권의 출발점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녀는 “여성이 자기 몸을 이해하지 못하면,
      자기 삶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여성 건강 교육을 ‘교육의 본질적 구성 요소’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김활란이 도입한 구체적 보건 교육 내용

      • 산모 건강 관리 교육: 임신 전·후 여성의 신체 변화와 필요한 영양, 위생, 정서적 관리법에 대한 수업
      • 여학생 생리 위생 교육: 초경 이후의 생리 주기 이해, 위생 처리 방법, 생리통 완화법, 부끄러움이 아닌 지식으로의 전환
      • 가정 내 보건 습관 교육: 손 씻기, 식중독 예방, 간이 구강위생법, 가족 건강 일지 쓰기 등 일상 속 실천 강조
      • 영양과 여성 건강: 철분 결핍, 빈혈, 골반통 등 여성 질환 예방을 위한 식단 교육 및 기본 생물학 강의

      이러한 교육 내용을 정규 수업 시간 안에 포함시키려 한 것 자체가 매우 획기적인 발상이었고,
      특히 그 대상이 ‘여학생’이라는 점에서 더욱 당대의 보수적 시선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김활란은 오히려 이를 공공의 담론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입장을 강하게 견지했습니다.
      그녀는 여성 위생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 건강과 사회의 근간을 지키는 핵심”이라고 강조했고,
      여성이 건강하지 않으면 사회도 건강할 수 없다는 관점을 설파했습니다.

      여성 신체를 말하는 것은 교육의 출발이자 해방의 시작

      당시 여성 보건이나 위생에 관한 문제는 거의 대부분 남성 의사들이나 식민정부 관료들의 관점에서 기술되었으며,
      여성 스스로 자신의 몸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구조는 전무하다시피 했습니다.
      그러나 김활란은 여성의 건강 문제를 여성 스스로가 인지하고 말하고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고,
      이 점에서 그녀는 단순한 교육자가 아니라 신체 해방의 인문학적 운동을 주도한 여성 실천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녀가 주장한 여성 건강 교육은
      단지 질병을 예방하거나 청결을 유지하자는 차원을 넘어서,
      자기 몸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여성 인권 감수성을 함양하는 기반이었습니다.

      “자신의 몸을 말하지 못하는 여성은,
      결국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이것이 김활란의 교육철학 속에 내재된 중요한 메시지였습니다.

      그녀는 여성의 몸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것이
      여성의 자기결정권, 자기표현권, 사회 참여 권리의 출발선이라고 보았으며,
      그런 의미에서 ‘여성 보건 교육’을 단순한 기술이나 상식이 아닌 민주시민 교육의 필수 요소로 자리매김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시도는 당시로서는 너무 앞선 생각이었기에 비판도 적지 않았지만,
      오늘날 생리 공결제, 성건강 교육, 청소년 성교육, 산모 건강복지정책 등 다양한 제도가 실현된 지금에 와서 보면,
      김활란이 던졌던 질문과 실천은 시대적 한계를 넘어서려 했던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자
      한국 여성 인권 교육의 뿌리로 재평가 받을 만한 가치 있는 노력입니다.

      김활란의 여성 교육 철학 요약

      핵심 영역                                  내용 및 실천 방식

       

      여성 고등교육 도입 이화여자전문학교 및 대학교 설립, 여성의 학문적 자율성 강조
      위생·보건 교육 강화 여성의 생리, 위생, 임신 관련 기초 지식 교육을 학제 안에 포함
      국제 여성 연대 활동 UN 여성위원회 활동 참여, 국제 여성 운동과 보건 협력 확대
      여성 자율성 철학 ‘순종하는 여성’이 아닌 ‘사유하는 시민’으로서의 여성 교육 기틀 마련
       

      윤리적 논쟁도 함께 돌아봐야 할 인물

      김활란은 분명 여성 교육의 선구자이자 한국 최초의 여성 박사로서,
      한국 여성 지식인의 지평을 연 인물로 평가받기에 충분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삶과 사상은 일제강점기 후반기라는 특수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활동한 만큼,
      그 실천이 항상 ‘순수한 저항’ 혹은 ‘윤리적 올곧음’만으로 해석되지는 않습니다.

      특히 김활란은 1940년대 초반부터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협력한 사실로 인해,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도 ‘친일 행적 논란’의 중심 인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녀는 여러 공개 강연과 신문 기고문, 라디오 연설 등을 통해
      일제의 식민 통치 정당성을 일정 부분 수용하거나, ‘충성’을 강조하는 발언을 남긴 기록이 존재하며,
      이로 인해 해방 직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조사 대상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황국신민서사와 여성 교육: 복합적인 함의

      문제가 되는 지점은, 김활란이 단순히 정치적 의도로 일제에 협력했다기보다는,
      그녀가 주장하던 **‘여성 계몽’, ‘보건 위생 향상’, ‘근대적 시민 교육’**이
      당시 식민지 근대화 정책과 일부 겹쳐지는 지점을 보였다는 데 있습니다.

      • 일제는 위생과 위생학, 보건교육 등을 식민 통치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조선 여성에게 위생 개혁을 강조했는데,
        김활란 역시 ‘위생은 여성의 기본 교양’이라는 논지를 통해
        이와 유사한 실천을 펼친 바 있습니다.
      • 이는 단순히 같은 주제를 다뤘다는 의미를 넘어서,
        김활란의 교육 철학이 일제의 근대성 담론과 불가피하게 중첩된 구조를 형성했다는 복잡한 논의로 이어집니다.

      역사적 해석의 긴장선: 도덕성과 업적의 분리 가능성

      김활란의 이러한 행적을 두고, 오늘날 역사학계와 여성사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은 분분합니다.
      일부는 그녀가 자발적 친일 인사로서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비판하며,
      공적 기념이나 업적 정당화에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다른 일부는 식민지 근대화라는 불가피한 구조 속에서
      당시 여성 교육을 지속하기 위한 현실적 타협이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고 주장합니다.

      또한 그녀가 주장한 여성 교육과 보건, 위생 개념 자체가
      식민 통치의 도구가 아니라 여성을 위한 독자적 실천이었는지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에 따라
      그 평가의 결은 크게 달라집니다.

      예컨대, 김활란이 남긴 여러 연설문에서는
      “조선 여성은 건강해야 한다”, “일본 여성 못지않게 충성스럽고 근면해야 한다”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단순한 시대적 언어 사용인지, 아니면 적극적 협조인지에 대해 맥락 중심의 분석이 여전히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가 김활란을 다시 보는 방식

      김활란을 평가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이분법적 판단을 넘어서려는 성찰적 태도입니다.
      그녀는 분명 한계가 있었고, 그 시대의 구조적 억압에 타협한 지점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그 속에서도
      여성의 권리, 지식의 힘, 교육의 필요성을 꿋꿋이 외친 실천자였음 또한 분명합니다.

      우리는 김활란이라는 인물을 통해
      ‘한 사람의 위대함과 복잡함은 공존할 수 있는가’,
      ‘도덕성과 업적은 함께 평가될 수 있는가’라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녀를 무조건 미화하거나 전면 부정하는 태도보다는,
      그녀가 활동했던 역사적 맥락 속에서
      무엇이 가능했고, 무엇이 불가능했는지를 냉정하게 분석하고,
      그 속에서 남겨진 유산을 어떻게 계승 혹은 비판할지를 고민하는 자세
      가 요구됩니다.

      김활란은 단지 “잘한 일만 한 사람”도, “나쁜 일만 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녀는 시대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고민했던 인물이었고,
      그 흔적을 우리는 지금, 더 정밀하게 바라봐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MZ세대가 김활란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

      오늘날 MZ세대는 ‘자기 결정권’과 ‘신체 주권’, ‘젠더 감수성’을 기반으로 한 통합적 삶의 기획에 큰 관심을 갖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활란은 단지 지식인의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여성의 삶이 전체적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관점을
      교육·의료·사회 구조 전반에 던진 선구적 행동가
      였습니다.

      • 지금의 생리 공결제, 여성 건강 교육, 보건의료 정보의 평등한 접근이라는 논의는
        사실상 김활란이 1930년대부터 제기한 문제의식과 구조적으로 연결됩니다.
      • 또한 그녀는 여성 스스로 말하고,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주체성 철학
        교육이라는 제도적 장치로 전환한 선례를 남긴 인물입니다.

      김활란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구분기존 평가현대적 재해석 관점
      여성 교육자 이화여대 초대 총장, 여성 고등교육 선구자 신체적·사회적 자율성을 함께 말한 입체적 지식인
      여성 보건 운동가 위생과 건강을 강조한 ‘학내 규율자’ 이미지 여성 보건권을 사회 구조 안으로 끌어올린 행동가
      친일 논란 인물 황국신민운동 가담자, 해방 후 반민특위 조사 시대적 모순 속 업적과 책임을 함께 논의해야 할 인물
      국제 여성운동가 유엔 여성위원 활동, 외교형 리더 글로벌 젠더 감수성의 초기 전파자
       

      마무리하며: 교육이란, 여성의 삶을 말하는 언어여야 한다

      김활란은 단지 ‘지식 있는 여성’이 아니라,
      ‘여성이 삶 전체를 고민할 수 있도록 사회를 바꾸는 교육자’였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때로 윤리적 물음과 함께 불리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더 치열하게 그녀를 돌아보고,
      그녀가 남긴 질문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이어가야 합니다.

      “여성도 배우고,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을 지키고,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 김활란, 1934년 여성보건강연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