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은 있었지만 이름은 없었다: 문서 밖 역사 인물들
1. 고문서란 무엇이며, 어떻게 남겨졌는가?
고문서란 문자 그대로 오래된 문서를 뜻한다.
하지만 단순히 오래된 종이가 아니라, 과거의 사회, 제도, 사람을 직접적으로 증언하는 1차 사료다.
조선시대의 고문서는 다음과 같은 형태로 다양하게 남아 있다.
- 관청 문서: 호적, 토지대장, 소송기록, 명령문
- 개인 문서: 상속문서, 혼인서약서, 노비문기, 증명서
- 사찰 기록: 시주명단, 공양문, 불사기
- 학교 기록: 성균관, 향교의 유생 명단과 규약
고문서는 대개 신분이 있는 자, 권한 있는 자, 행정 주체의 이름을 중심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그 주변에서 움직인 수많은 사람들—하급 관리, 사환, 기입자, 증인, 하인, 여성, 노비, 백성들—은
기록의 본문엔 거의 등장하지 않거나, 단지 역할과 숫자, 약호로만 남는다.
2. 이름 없는 자들의 흔적은 어디에 남았을까?
고문서는 오랜 시간 동안 ‘기록된 자들’의 세계를 구축해왔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문서들 속에는 이름이 생략된 수많은 존재들이 그림자처럼 스며들어 있다.
그들은 주연이 아니었지만, 기록의 필연적 주변부에서 그 역할을 수행하며 ‘자취’를 남겼다.
이름은 없지만, 흔적은 분명히 존재한다.
1) 문서의 말미 – 이름 대신 직책, 소속, 역할만 남은 사람들예:
- “이 문서는 좌수 김모의 하인이 동행하였음.”
- “입회인: 현감 윤모의 서자(庶子), 이름은 생략.”
- “기록자: ○○관 서리 2인” (이름 없이 숫자로 기재됨)
그들은 문서의 사실성을 뒷받침하거나, 작성에 실질적으로 기여했지만,
'기록의 대상'이 아닌 '기록의 보조자'로만 취급되며 익명으로 처리되었다.
2) 통계·장부 속의 수량 – 이름 없는 사람들의 집합적 흔적
- “양인 3호, 남종 5명, 여종 4명”
- “노비 총 17인, 그 중 11인은 타향 출신으로 이름 불상”
- “여종 2인: 연령 미상, 아녀자로 구분됨”
이러한 숫자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집합이자 사라진 개별 생애의 흔적이다.
단 한 줄의 이름조차 남지 않았지만, 그 숫자는 인구 구조와 계층, 성별 구성을 입증하는 유일한 단서가 된다.
3) 타인의 이름에 종속된 정체 – 존재하지만 독립적 주체가 아닌 경우
- “홍길동의 처” / “김만복의 첩” / “이복만의 소생 아들”
- “○○의 노비 정씨”
- “고을 관아의 사환 1명 (무명)”
이처럼 개별 이름이 아니라 소속된 인물이나 제도에 의해 간접적으로 표상되는 경우,
그들의 존재는 부차적인 것으로 처리되며 문서상에서는 ‘부속물’로 취급된다.
4) 문서의 오류·말소·흑백처리 속에 남은 흔적
- 먹칠로 지운 인명 / 두 줄 선 긋기 / "기재 오류로 말소함"
- “처음 기재한 자는 ○○의 종, 이름 불분명하나 진술 일치함”
- “소실된 문서로 인해 추정 기재함. 당시 여종 이름은 기억 못함.”
이러한 사례는 단순한 실수나 관리상의 편의가 아니라,
기록 배제의 의도 혹은 사회적 무시의 반영일 수 있다.
정리: 이름은 없지만, 기록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결국 고문서 속 이름 없는 사람들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흔적을 남기고,
우리가 문서의 여백을 읽을 수 있다면
그 존재를 다시 불러낼 수 있다.
말미 서술 | 역할과 소속만 기재 | 비공식적 참여자의 증거 |
수량 표기 | 인원 수로 기재 | 익명 집단의 존재 증명 |
종속 구조 | 타인 명의로 표기 | 계급·성별 구조의 반영 |
오류·말소 | 의도적 생략·지움 | 배제된 기억의 흔적 |
- 즉, 문서에서 이름이 없는 것 자체가 하나의 역사적 메시지다.
‘누가 배제되었는가’는 결국 ‘누가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졌는가’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 고문서에는 간혹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이름을 지웠다’는 사실 자체가 기록된다.
- 그러나 이들은 단지 주변인이 아니라, 실제로는 생활과 생산의 핵심 주체였다.
- 조선 사회의 가족주의적 문서 구조에서는 여성, 아동, 하층민은 주체가 아닌 종속 구조로 표현된다.
- 호적대장, 호구단자, 노비장 같은 통계성 문서에는
‘이름을 가진 자’와 ‘이름 없이 숫자로만 처리된 자’가 뚜렷하게 구분된다. - 조선시대 문서 말미에는 종종 증인, 작성 보조자, 입회자 등의 이름이 아닌 소속 정보만이 기록된다.
3. 고문서 속 무명 인물 4가지 유형 분석
공식 문서는 언제나 중심 인물만을 기록한다.
그렇다면 그 기록의 가장자리에는 누가 있었을까?
고문서에는 이름 없이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핵심적인 기능을 수행했던 사람들—역사의 배후 주체들—이 존재한다.
여기서는 고문서 속에서 자주 확인되는 무명의 인물 4가지 유형을 분석하고,
그들의 존재가 지닌 의미를 다시 조명한다.
1) 서리(書吏) – 기록의 손,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이름
서리는 지방관청, 중앙부서, 군현의 각종 기록 업무를 담당했던 하급 관리였다.
그들은 문서를 초안하고, 계산하며, 때로는 명문과 도장을 조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고문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 “문서 작성자: 본관 좌수”
- “관찰사 명령문 (서리 이름 없음)”
즉, 실질적으로 문서를 만든 이들은 존재하되, 작성권한이 없다는 이유로 이름을 남길 수 없었다.
사례
- 1785년 충청감영 보고서 필체 분석 결과, 같은 문서 내에서 3인의 손글씨가 확인됨.
- 모두 관찰사 명의로 통일되어 있지만, 실제 기록자는 서리 3인으로 추정.
→ ‘기록자는 존재했지만, 기록되지 않았다.’
2) 노비(奴婢) – 경제의 척추였으나, 숫자로만 남은 사람들
조선시대 노비는 국가경제의 근간이었다.
토지를 일구고, 세곡을 운반하며, 관청의 잡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 “상속 재산: 전답 3결, 남노 2명, 여노 1명”
- “군량미 운송에 동원된 노비 15명, 이름은 생략”
노비는 사람이 아닌 ‘재산’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대부분 고문서에서는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았다.
사례
- 『호구단자』의 특정 항목에서는 “노비 전수: 총 48명, 이 중 이름 기록된 자 7명”
→ 나머지 41명은 기록에서 완전히 배제되었음.
→ 수치를 남겼지만, 주체로 기록되지는 못한 존재들.
3) 여성 – 존재는 확실하되, 이름은 부재한 정체
여성은 특히 가부장적 기록 문화에서 가장 쉽게 지워진 존재였다.
조선의 고문서에서 여성은 주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나타난다.
- “○○의 처, ○씨”
- “김만복의 딸, 이씨 집으로 출가”
- “소유 노비: 여종 2명 (이름 없음)”
이처럼 여성은 ‘누구의 것’이라는 소속 방식으로 표현될 뿐,
고유한 정체성과 독립적 명의는 주어지지 않았다.
사례
- 전라도 관찰부의 혼인 문서 중 여성 이름이 명시된 사례는 100건 중 단 5건
- 나머지는 남편이나 아버지의 이름으로 대체 표기
→ 여성은 문서 속에서 ‘존재하되 사라진 존재’였다.
4) 민간 협력자·증언자 – 일은 했지만 기록되지 않은 주체들
분쟁, 소송, 납세, 관청 민원 처리 등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 중 하나는
‘공식 사건의 주변 인물’이다.
이들은 직접 정보를 제공하거나, 사건 현장을 목격했음에도 다음과 같이 표기된다.
- “진술 참고인 2인, 성명 미상”
- “문서 전달자: 향민 1인 (현장 동행)”
- “사건 당시 관찰자 다수 있었으나 기재 생략”
사례
- 1822년 지방 관청 소송 기록: “기억을 되살려 진술한 향민 ○○” →
이후 판결문에는 향민의 이름이 삭제되고 원고·피고 이름만 남음
이들은 고문서의 흐름을 가능하게 한 사실상 필수 존재였지만,
기록 구조상 비공식적 존재로 치부되며 역사에서 밀려났다.
정리: 문서 바깥에 있었던, 그러나 역사의 한복판에 있던 사람들
서리 | 작성자 | 손글씨 유사성, 기재 생략 | 기록의 실질 창조자 |
노비 | 생산자·운반자 | 수량 표기 | 경제 기반의 무명 주체 |
여성 | 가족 구성원 | 타인 명의 표기 | 정체성의 지워진 존재 |
증언자 | 사건 보조자 | 성명 생략, 역할만 표시 | 구술 기반의 사실 전달자 |
이름 없는 인물들은 단지 주변 인물이 아니다.
그들은 고문서를 완성시킨 숨은 기둥이자,
지워진 이름 속에 묻힌 또 하나의 역사 주체였다.
4. 이름 없이 역사에 기여한 사람들의 실제 사례
문서에 이름이 없다고 해서,
그 사람이 역사의 주체가 아니었던 것은 아니다.
기록은 생략했을지 몰라도, 실천과 행위는 남았다.
고문서와 구술, 지역사 조사 등을 통해 확인된 실제 사례들을 살펴보면,
이름 없는 인물들이 어떻게 역사에 흔적을 남겼는지 드러난다.
사례 1) 전봉준 격문을 베껴 쓴 서리, ‘무명의 손’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전봉준이 발행한 격문은
“우리는 탐관오리를 몰아내고, 백성의 고통을 덜고자 한다”는 강한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문서 상으로는 전봉준이 직접 쓴 것으로 되어 있지만,
당시 그가 사용한 격문에는 서체가 다르거나 문장 구성 방식이 통일되지 않은 부분이 많다.
후속 연구에 따르면, 전주 감영에서 파직당한 서리 2~3명이 격문 초안을 대신 베껴 썼다는 지역 구술 기록이 전한다.
그들은 문서상엔 존재하지 않지만,
동학농민군이 전국적으로 격문을 유통할 수 있었던 핵심 전달자이자 기록자였다.
문서는 전봉준의 이름으로 남았고,
기록자는 이름 없이 남았다.
그러나 그들의 손이 역사를 복제하고 퍼뜨렸다.
사례 2) 시주문에 남은 ‘이씨 집 여인’
조선 후기의 한 사찰에서는 **대규모 불사(佛事)**가 진행되었고,
그 비용은 시주(施主)로 충당되었다.
불사기문에 따르면 주요 시주자는 양반과 향리였지만,
마지막 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 “이씨 집 여인, 쌀 5말 시주. 이름은 알 수 없음.”
쌀 5말은 당대 농가의 반년치 식량에 해당할 만큼 큰 금액이다.
문헌에는 이름도, 직책도 없지만,
이 여인은 불사의 한 축을 감당한 실제 후원자였다.
사찰은 그녀를 ‘시주보살’로 기억했고,
지역 불자들은 구전으로 이 여인의 존재를 계속 언급해왔다.
이 사례는 기록은 사라져도 기억은 남는 구술 전승의 힘을 보여준다.
사례 3) 호적 정리의 ‘무명 사환’
영조 연간, 지방 관아에서는 호구 조사와 문서 정리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호적부가 대량 수정·편집되었는데,
그 실무를 맡은 이는 관아에 딸린 사환(잡역부)들이었다.
한 고문서의 각주에는
- “진위고을 호적은 ○월 ○일 정리, 필사자는 ○○서리, ○○사환”이라는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실제 호적부 표지에는 그 이름들이 말소되거나 먹칠 처리되어 있다.
훗날 해당 지역에서 주민 등록제도의 초기 형식이 이 호적을 근거로 삼았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고,
그 작업의 실무 주체였던 이름 없는 사환들이 현대 인구 관리의 기초를 놓았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사례 4) 소송 증언자, 이름 없는 정의의 조력자
조선 중기의 한 토지 분쟁 기록에는
지주의 위조된 문서를 폭로한 증언이 등장한다.
“그 땅은 ○년 전부터 ○씨의 것이 아니었다”는 결정적 진술을 남긴 이의 이름은
단지 “노파 한 명, 이웃 마을 거주”라고만 표기되었다.
그러나 그 증언이 판결의 방향을 바꾸었고,
한 마을의 토지 소유 구조를 뒤집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지만,
지방 구술 자료에는 **“그 할머니 덕에 마을 땅이 지켜졌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전해진다.
정리: 이름 없는 이들이 남긴 것은 '기록'이 아니라 '결과'였다
동학 격문 베껴쓴 서리 | 없음 | 운동 문서 확산의 실무 담당자 |
시주문 속 여인 | “이씨 집 여인” | 재정 후원자, 신앙적 기둥 |
호적 정리 사환 | 먹칠로 말소 | 지방 인구 통계 체계 기초 |
토지 분쟁 증언자 | “노파 1인” | 판결의 방향 전환자 |
그들은 이름 없이 일했고, 보상도 받지 못했지만,
지워지지 않는 흔적과 변화를 만들어냈다.
오늘날 우리가 그들을 다시 불러낸다면,
그들의 역사는 ‘무명’이 아니라 ‘공로’로 남게 될 것이다.
5. 이름 없는 자들을 복원하는 새로운 역사 읽기
오늘날 역사 연구는 점점 더
기록된 이름보다, 지워진 이름을 찾는 쪽으로 진화하고 있다.
- 고문서의 주변 문구, 여백, 서체 패턴을 분석해 서리의 존재 추적
- 재산 문서 속 ‘소유 대상’으로 표기된 인물을 가계도로 재구성
- 여성 이름이 없는 문서에서 유일한 여성 필체를 식별해 정체 복원
- 지역 어르신의 구술과 문서 조합으로 실존 인물 탐색
이런 복원 작업은 단지 이름을 되찾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기억을 되찾고, 역사에서 배제된 존재를 복권시키는 행위다.
마무리하며
기록은 권력이고, 이름은 권리다.
하지만 고문서에는 수많은 사람이 이름 없이 등장하고 사라진다.
그들은 역사의 배경이 아니라, 실제 주체였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무명(無名)을 다시 이름으로 부르는 일을 시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