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역사 속 인물 탐구

과학은 혼자 이루어지지 않았다: 실험실 조수들의 숨은 기여

지아니13 2025. 5. 15. 10:30

1. 과학자 신화와 실험실의 실제 구조

우리는 위대한 과학자를 말할 때 ‘혼자 힘으로 세상을 바꾼 천재’처럼 묘사하곤 한다.
뉴턴, 갈릴레오, 마리 퀴리, 아인슈타인, 왓슨과 크릭…
그러나 실제 과학 연구의 현장은 철저하게 집단 작업이었다.
특히 19세기 후반 이후 과학이 실험 기반으로 전환되면서,
**실험실(Laboratory)**은 단독 연구자가 아닌,
수많은 조수와 조력자들이 함께 움직이는 조직으로 발전했다.

그 속에서 조수는 단순 보조 역할에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실험 기계를 세팅하고, 재료를 조제하며,
데이터를 수집하고 실험 일지를 정리했다.
때로는 실험자의 의도를 넘어서 독자적인 관찰과 해석을 기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대부분 연구 책임자, 교수, 수석 연구원의 이름으로만 발표되었다.
그들의 기여는 실험 노트, 기입된 표, 손때 묻은 시약병 속에만 남아 있을 뿐이다.

2. 19~20세기 과학 연구실의 조수 시스템

과학이 집약적이고 체계적인 **‘실험 기반 학문’**으로 전환되면서,
19세기 후반부터 조수는 단순한 기술 보조자가 아닌
과학 연구의 핵심 구성원이자 지식 생산의 현장 실천자로 등장했다.
특히 물리학, 화학, 생물학, 의학 등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복잡한 실험 장비와 정밀 측정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조수의 기술적 숙련도와 판단력이 연구 성패를 좌우했다.

연구실의 체계화: 조수 없이는 불가능했던 실험

18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많은 과학자들은
자택이나 소규모 공간에서 혼자 실험을 하던 개인 연구자였다.
하지만 산업혁명과 함께 ‘과학의 산업화’가 본격화되면서,

  • 국립 연구소
  • 대학의 과학부
  • 군사 기술 연구기관
    등이 설립되었고, 이에 따라 **전문 조수(Professional Assistant)**의 수요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주요 역할:

  • 실험 기기 세팅 및 유지보수
  • 시약 조제와 혼합 비율 조절
  • 실험 기록 정리 및 수치 분석
  • 표준 시료 제작 및 보관
  • 실험실 안전 관리 및 기기 운용 일지 작성

조수는 단순히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현장 경험으로 축적된 노하우를 통해
오류를 예방하고, 장비를 직접 수정하며,
때로는 연구자의 지적 실수를 바로잡는 실전 전문가였다.

과학은 혼자 이루어지지 않았다: 실험실 조수들의 숨은 기여

유럽 주요 연구기관의 조수 시스템

🇩🇪 독일 –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 (1911년 설립)

독일은 가장 일찍 전문 조수 체계를 구축한 나라 중 하나다.
특히 이 연구소에서는

  • 상근 조수(laborant)
  • 임시 조수(volontär)
  • 박사과정 기술조교
    의 역할이 명확히 나뉘어 있었고,
    조수 교육 매뉴얼과 승급 기준까지 존재했다.

🇫🇷 프랑스 – 파스퇴르 연구소 (1887년 설립)

루이 파스퇴르 이후 조수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조수 학교(École des préparateurs)’가 운영되어
화학 실험 조수, 병리조수, 현미경 조수 등으로 세분화되었다.

🇬🇧 영국 – 케임브리지 캐번디시 연구소 (1874년 설립)

이 연구소는 연구 주도 교수–1급 조수–기술 조교–학생으로 이어지는
철저한 위계 시스템을 가졌으며,
전기물리·광학·자기장 실험에서 조수는
‘장비를 다루는 기술자’이자, ‘데이터 정리자’로 핵심 역할을 했다.

조수의 훈련과 직업적 성장

조수는 대부분 도제 형식의 훈련 과정을 거쳤다.

  • 대학 내 실험 수업 조교 → 비공식 실험 조수 → 전임 조수 → 연구 보조원 → 연구원
    이라는 단계적 승급을 통해
    단순한 노동자에서 독립 연구자로 성장하는 경로도 있었다.

그러나 상당수 조수는

  • 학위 취득 기회 제한
  • 논문 발표 불가
  • 정규직 이탈자 취급
    등의 한계에 직면해 평생 ‘조력자’로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 조수의 경우는 더욱 불리했다.

  • 교육 기관 출입 제한
  • 실험기록은 남기되 발표 기회는 제한
  • 기혼 후 연구활동 불가 등
    당시 사회구조 속에서 과학계 ‘보이지 않는 손’으로만 존재했다.

사회적 인식: ‘과학의 기능인’ vs ‘지식 공동체의 일원’

이 시기 조수의 사회적 위상은 이중적이었다.

  • 한편으로는 없으면 실험 자체가 불가능한 전문가였지만,
  • 동시에 결과물에는 이름이 남지 않는 존재였다.

 “실험은 조수가 하고, 이론은 교수가 한다”
라는 말은 당시 연구실 문화를 잘 보여주는 풍자였다.
조수는 과학자라는 타이틀을 가질 수는 없었지만,
사실상 실험실의 ‘척추’였던 셈이다.

정리하며

19~20세기 과학 실험실은
연구자의 머리와 조수의 손이 함께 움직이는 집단 지성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 구조는 상명하복식이었고,
기록과 명성은 위로 향하며, 손의 기여는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과학이 거대한 건물을 짓는 일이라면,
조수는 그 바닥을 평탄하게 다진 보이지 않는 기술자들이었다.
우리는 지금, 그 이름 없는 벽돌 하나하나에 새겨진 땀과 기억을
다시 되새길 필요가 있다.

3. 역사를 바꾼 조수들의 숨은 기여 사례

과학사의 큰 발견은 항상 누군가의 이름으로만 기록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늘 이름 없는 손들, 즉 조수들이 있었다.
그들은 단순히 실험을 보조한 것이 아니라, 관측, 기록, 계산, 재현이라는 과학의 본질적 과정에 깊이 개입했고, 때로는 발견의 실질적 주인공이기도 했다.
아래는 과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몇 가지 대표 사례들이다.

1) 로잘린드 프랭클린과 조수들 – DNA 구조의 실제 기반

DNA 이중나선 구조의 발견은 20세기 생물학 최대의 사건으로 평가된다.
왓슨과 크릭이 1953년 <네이처>에 발표한 이론은 이후 노벨상 수상으로 이어졌지만,
그들의 기반이 된 결정적 데이터는 바로 로잘린드 프랭클린과 그녀의 조수들이 촬영한 X선 회절 이미지였다.

특히 결정적이었던 '사진 51'은
프랭클린의 실험을 도운 **레이먼드 고슬링(Raymond Gosling)**이라는 대학원생 조수가 직접 촬영하고 현상한 이미지였다.

  • 고슬링은 프랭클린의 정밀 측정 방식을 따라 X선 회절 조건을 조정했고,
  • 수많은 오류와 실패 속에서 '51번 사진'을 확보했다.
  • 이 사진은 프랜시스 크릭에게 무단 전달되었고, 결정적 분석 기반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고슬링은 공동 저자에서 배제됐고,
프랭클린은 37세의 나이에 사망해 노벨상 수상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조수의 기록은 역사에서 ‘참조자료’로만 남게 되었다.

2) 피에르 퀴리 연구실의 실험기록자 – 안드레 드비에른

방사능 연구로 노벨상을 받은 퀴리 부부는 프랑스 과학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라듐의 결정 추출이라는 고위험 실험을 가능케 한 조력자 중 하나는
화학 실험실 조수였던 **안드레 드비에른(André Debierne)**이었다.

  • 그는 오랜 시간에 걸쳐 오염된 시료를 농축하고,
  • 반복 실험을 통해 방사선 감쇠 곡선을 계산하며,
  • 추출 장비의 제작과 조정을 담당했다.
  • 무엇보다 퀴리 실험실의 방사능 일지 전체를 필사하고 재구성한 것도 그의 역할이었다.

그는 나중에 독자적인 연구를 통해 ‘악티늄’을 발견했지만,
여전히 ‘퀴리 부부의 보조자’라는 틀 안에 갇혀 평가되었다.

3) 밀리컨의 기름방울 실험 – 하비 플레처의 고요한 손

전자 하나의 전하량을 계산한 **로버트 밀리컨(Robert Millikan)**의 ‘기름방울 실험’은
현대 물리학에서 가장 정밀한 실험 중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이 실험을 실제로 수행하고 데이터를 수집한 사람은
조수였던 **하비 플레처(Harvey Fletcher)**였다.

  • 플레처는 실험 장비의 오작동을 잡고,
  • 실험 조건별 수천 개의 데이터를 정리해 평균값을 구했으며,
  • 밀리컨의 초기 실험 설계 오류를 지적하고 수정하기도 했다.

밀리컨은 플레처의 이름을 논문에서 고의로 제외했고,
뒤늦게 회고록에서 그 사실을 “나의 실험이 아니라 우리 실험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공식 인정은 없었고, 플레처는 조용히 교육계로 진출했다.

4) 파스퇴르 연구소의 미생물 실험자들 – 기록되지 않은 여성 조수들

루이 파스퇴르의 실험은 ‘무균 이론’과 백신 개발로 이어지며
의학사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하지만 그의 실험실에는 다수의 무명 여성 조수들이 존재했다.

  • 세균 배양과 희석, 체온 유지, 실험동물 접종과 관찰,
  • 그리고 실험 일지 작성과 감염 관리 등은 모두 그들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 특히 ‘광견병 백신’ 개발 과정에서
    여성 조수들은 감염 위험을 무릅쓰고 실험 동물을 직접 관리했다.

그러나 이들은 연구 논문은커녕,
실험실 명단에서도 자주 생략되었다.
이유는 단지 ‘기록의 필요성이 없었다’는 관리자들의 결정 때문이었다.

5) 천문학의 그림자 계산자들 – 하버드 천문대의 여성 조수들

19세기 말, 미국 하버드 천문대에서는 수천 장의 유리 건판(사진)을 분석해
별의 밝기, 분광, 거리 등을 계산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 고된 작업을 수행한 건 **‘하버드 계산자들(Harvard Computers)’**이라 불린 여성 조수들이었다.

대표 인물:

  • 애니 점프 캐넌: 별의 분광형을 기준별로 체계화
  • 헨리에타 스완 리빗: 세페이드 변광성을 통해 우주의 거리 척도 개념 확립

그녀들의 발견은 허블 우주망원경, 빅뱅 우주론의 근거가 되었지만,
실제 논문에선 총 책임자는 남성 천문학자의 이름이었다.
캐넌과 리빗은 생전에는 미미한 평가를 받았고,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정리하며

과학의 모든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은 기여자, 조용한 관찰자, 침묵의 기록자들이 있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실험은 지속되지 않았고,
발견은 축적되지 않았으며,
이론은 증명되지 않았을 것이다.

조수는 더 이상 단순한 ‘보조자’가 아니다.
그들은 과학의 실질적 공동 창작자이며,
이제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과학의 역사 속에 정당하게 복원해야 한다.

4. ‘발견의 이름’은 누구에게 돌아갔는가?

과학사에서 ‘발견’은 보통 하나의 이름으로 요약된다.
하지만 그 발견을 실험으로 증명하고, 데이터를 축적하며, 위험을 감수하고, 수많은 실패를 견딘 이들은 대부분 조수이거나 실험 보조 인력이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누구의 이름이 과학의 역사에 남았을까?

과학계의 명명 관습: 오직 '지도자'만 남는다

현대 과학 논문은 보통 **제1저자(first author)**와 교신저자(corresponding author) 중심으로 작성된다.

  • 제1저자는 실험과 논문 작성을 주도한 사람
  • 교신저자는 프로젝트의 책임자이자 자금, 장비, 인력 관리 총괄자

하지만 실제 실험에 관여한 조수나 연구보조원은

  • **감사의 글(acknowledgements)**에만 이름이 언급되거나
  • 공동저자 명단에서 누락되기도 한다.

이로 인해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상황조수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는 이유
교수의 일방적 결정 ‘직접 지시한 아이디어이기 때문에’
논문 기여도 평가의 불명확성 데이터 수집과 해석의 분리가 모호함
예산 지원자의 영향 후원기관 또는 PI(수석연구자) 우선 명기
소속 제한 비정규직, 계약직, 외부 조력자 등 제도 외 인물로 간주
 

저자권 구조와 ‘과학 권력’의 문제

저자권(authorship)은 단지 이름을 남기는 문제가 아니다.
과학계에서 저자 이름은 연구자의 생애와 명성을 좌우하는 자산이다.

  • 논문 수 → 연구실적
  • 인용 수 → 학문적 영향력
  • 교신저자 여부 → 학술지에의 신뢰도
  • 공동 저자 → 이후 독립 연구자의 평가 기준

조수들이 저자 명단에 빠지게 되면:

  • 자신의 연구 커리어를 증명할 근거가 사라지고
  • 대학원 진학, 연구소 지원, 학계 진입에서 밀리게 되며
  • 결국 과학계에 입문조차 할 수 없는 구조적 배제가 발생한다.

성차별과 계급차별: 배제의 반복

실험실 조수들 중에는 여성, 비서, 실무 보조자, 청년 노동자 등
사회적으로 취약한 계층이 많았고,
이들의 기여는 ‘노동’이지 ‘창작’이 아니라고 규정되어 왔다.

  • 여성 조수들은 실험 설계, 측정, 자료 정리에 참여하고도
    ‘보조 행정직’으로 처리되었고,
  • 기술직 남성 조수는 수십 년 경력을 가졌음에도
    학문적으로는 ‘기술자’ 이상 인정받지 못했다.

예를 들어:

  •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여성이라서’ 실험실의 서브 역할만 허용되었고
  • 캐서린 존슨(NASA 수학자)는 우주항법 계산의 핵심이었지만
    ‘색인 파일 관리자’로 취급되었다.

이러한 성별과 계급 기반의 구조적 배제
과학을 남성 중심 엘리트의 공간으로 고착시키는 데 일조했다.

과학의 발견, 누구의 것인가?

발견이란 무엇인가?

  • 아이디어를 처음 제시한 자?
  • 실험을 성공시킨 자?
  • 데이터를 해석한 자?
  • 논문을 써서 발표한 자?

이 질문은 단순한 이름 문제가 아니다.
지식의 창작자란 누구인가라는, 과학의 존재 방식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다.

최근 학계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제기가 활발하다:

  • “조수 없이 실험이 가능했는가?”
  • “데이터의 신뢰성은 누가 확보했는가?”
  • “발견의 설계와 수행은 동일한 지식 노동인가?”

세계 과학계의 변화 조짐

일부 기관과 학회는 조수의 기여를 재평가하는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미국 과학진흥협회(AAAS)

  • CRediT 저자 기여도 시스템 도입
  • 저자별로 ‘개념 제안’, ‘데이터 수집’, ‘분석’, ‘논문 작성’ 등 역할을 세분화해 명시

유럽연합 과학펀드(EU Horizon)

  • 기술 스태프도 공동 저자 가능
  • 보고서 및 기술 문서에 조수의 실명 표기 권장

일본 리켄(RIKEN)

  • 연구 지원 인력도 특허 등록에 포함
  • 실험기기 설계·개발 참여 시 연구자 명단에 기재 의무화

이러한 시도는 단순한 정치적 올바름을 넘어,
과학을 진짜 협력적 지식 생산 시스템으로 정비하자는 움직임이다.

정리하며

과학은 언제나 팀워크였다.
그러나 역사는 그 중 단 하나의 이름만을 기록해왔다.
그 이름 뒤에 있던 수많은 ‘공동 창작자’들의 목소리는,
이제 질문을 던진다.

"발견의 이름, 그건 누구의 것이었는가?"

그리고 이 질문은 단지 과거를 향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과학이 어떤 윤리 위에 서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5. 조수의 기록을 복원하는 과학사의 움직임

최근 과학사 연구자들은
‘실험실 노트’, ‘조수의 일기’, ‘기기 작동 일지’ 등을 통해
잊힌 기여자들을 복원하려는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CNRS)는
    여성 조수들의 실험 기록을 디지털화해 공개하고 있으며,
  • 영국 왕립학회는 ‘과학노동의 역사’ 전시를 통해
    기록되지 않은 실험실 조력자들을 조명하고 있다.
  • 한국에서도 광복 이전 물리학 실험실에서 활동한
    조선인 조수들의 기록이 발굴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단지 ‘감사의 의미’만은 아니다.
과학은 집단적 생산물이며,
그 생태계를 구성한 모든 손길의 지식적 권리와 윤리적 복권이 필요하다는 자각에서 출발한다.

정리하며

우리는 흔히 과학을 천재의 영역으로만 기억하지만,
실험실의 현장은 언제나 조수와 조력자의 시간이었다.
그들이 정확한 눈으로 데이터를 기록하고,
침묵 속에서 기계와 시료를 다루며
과학은 현실 위에 쌓여왔다.

이제는 과학의 이름을 나눠야 할 때다.
조수의 기록을 지우지 않는 과학사,
이름 없는 손을 기억하는 연구 문화가
진짜 ‘진보’의 방향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