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역사 속 인물 탐구

프랑스 혁명의 숨은 영웅들, 평범한 농민들의 저항 기록

지아니13 2025. 5. 13. 07:47

1. 프랑스 혁명의 민중적 배경: 왜 농민이 들고 일어났는가

1789년, 파리의 바스티유 감옥이 함락된 순간이 프랑스 혁명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은 단지 도시의 정치 운동이 아니었다.
혁명을 움직인 진짜 원동력은 전국 곳곳에서 분노를 터뜨린 수많은 농민들의 힘이었다.

18세기 말 프랑스는 귀족과 성직자에게 면세 특권이 주어지고,
국가의 재정은 제3신분, 즉 평민과 농민에게 가혹하게 전가되던 사회였다.
세금은 늘어났고, 곡물 가격은 치솟았으며, 기후 악화로 인한 흉작까지 겹치면서
농민들의 삶은 점점 파탄으로 향하고 있었다.

농민들에게 프랑스 혁명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그들은 더 이상 **‘가만히 있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에 직면해 있었다.

2. 세금과 봉건적 착취, 그들이 견딘 고통의 일상

프랑스 혁명 이전, 농민의 삶은 단순한 빈곤을 넘어선 제도적 억압과 착취의 일상 그 자체였다.
그들이 마주한 현실은 단지 가난한 것이 아니라, 가난을 강요당한 구조였다.

당시 프랑스 사회는 '세 계급 체제(Three Estates)'로 구성되어 있었고,
성직자(1계급)와 귀족(2계급)은 막대한 부를 누리면서도 세금을 면제받는 특권층이었다.
반면 전체 인구의 약 97%를 차지하는 평민, 그중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은
모든 세금과 봉건적 부담을 떠맡아야 했다.

농민을 짓눌렀던 조세 체계

1 10분의 1세(Tithe):
가장 대표적인 부담 중 하나는 성직자에게 바치는 곡물세였다.
생산한 곡물의 10%를 의무적으로 납부해야 했고,
이는 주로 가톨릭 교회가 소유한 곳에 쌓였다.
기근이 들든, 수확이 줄든 관계없이 수확량이 아닌 기대량 기준으로 징수되었기에
실질적으로는 전체 생산의 20~30% 이상을 빼앗기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2 지방세와 염세(Gabelle):
소금은 필수품이었지만, 프랑스에서는 소금세가 지역마다 다르게 책정되었고
어떤 지역은 주변보다 6배 이상 비싼 가격을 강요받았다.
게다가 소금을 사지도 않았는데 사야 하는 할당제까지 존재해
소금 밀수가 대대적으로 성행했으며,
적발 시 강제노역 또는 사형에 처해지는 등 세금이 범죄를 낳는 구조였다.

3 공납(Corvée):
이것은 명백한 봉건적 착취의 상징이었다.
농민들은 해마다 지주나 귀족에게
곡물, 가축, 장작, 천, 수작업품 등 지역마다 다양한 형태로 ‘관습적 헌납’을 해야 했으며
그 규모와 형식은 지역마다 달라 불투명하고 자의적이었다.
일종의 ‘세금 아닌 세금’이었던 셈이다.

4 노동봉사(La corvée royale):
공공도로, 궁정, 성곽, 농장, 귀족의 사유지 건설 등에 무보수로 동원되었다.
지방 행정관이 필요에 따라 인력을 징발할 수 있었고,
농사철과 겹치든 말든 ‘국왕의 명령’이라는 명분 아래 생업을 멈추고 끌려가야 했다.

고통의 일상, ‘이중 착취 구조’의 현실

이 모든 제도는 귀족과 성직자에게 면세 특권을 부여한 동시에,
농민에게만 모든 부담을 전가하는 이중 구조
였다.
국가를 위한 세금도, 지주의 사적 요구도, 교회의 성스러운 명분도
모두 농민의 등에 올라탄 상태였다.

연중 내내 일하고도 자신의 식량을 온전히 확보하기 어려웠고,
기근이 들면 첫 번째로 굶어야 했고,
세금이 밀리면 가축과 농기구를 빼앗겼고,
공납이 부족하면 자녀가 대신 끌려갔다.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 견뎌야 했던 침묵

무엇보다 절망적인 것은 이 불합리한 현실에 대해 항의하거나, 바꿀 방법조차 없었다는 사실이다.

  • 대부분의 농민은 문맹이었다. 글을 쓸 줄 몰랐다.
  • 마을에는 대표도, 변호인도 없었고, 법정은 귀족의 손에 있었다.
  • 선거권은 없었고,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도 없었다.
  • 항의는 곧 체포와 투옥, 추방, 혹은 교수형으로 이어졌다.

그렇기에 이들은 오랫동안 말 대신 침묵으로 버티는 삶을 살아야 했다.
“태어나면 고된 노동, 죽기 전까지 착취, 그리고 불만은 말할 수 없다.”
이런 삶의 조건은 시간이 지날수록 분노와 절망을 ‘내면화’시킨 억압된 에너지로 축적되었다.

그 침묵을 깬 것이 바로 혁명이었다

하지만 역사는 끝없는 억압 속에서 침묵이 깨지는 순간을 마주한다.
프랑스 혁명은 귀족의 오만함과 왕정의 몰락 이전에,
바로 이 ‘말할 수 없던 사람들’의 몸짓과 저항, 봉기의 시작이었다.

수백 년간 견뎌온 억압을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들은 무기를 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되찾기 위해,
고통을 고발하기 위해, 인간다운 존엄을 회복하기 위해 일어선 것
이다.

그 혁명의 진짜 시작점은 ‘바스티유’ 이전,
바로 이 조세와 착취의 고통에서 깨어난 민중의 분노였다.

프랑스 혁명의 숨은 영웅들, 평범한 농민들의 저항 기록

3. 무기를 들다: 각지에서 벌어진 농민 봉기 사례들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이 무너진 날은 프랑스 혁명의 상징적 서막이었지만,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전국 곳곳에서는 농민들의 분노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었다.
그리고 바스티유 습격 이후, 그 분노는 공공연한 봉기로 확산되며
왕정과 봉건 질서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이 무명 농민들의 저항은 단지 분노의 폭발이 아니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실전 전투이자, 역사상 최초의 농민 주도형 체제 거부 운동이었다.

'대공포(La Grande Peur)'—공포가 낳은 전국적 봉기

1789년 여름, 프랑스 농촌은 정체불명의 공포에 휩싸였다.
‘귀족들이 외국 용병을 고용해 농민을 학살하려 한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지면서,
이는 전국적인 불안을 유발했고 곧바로 자발적인 무장 봉기로 이어졌다.
역사는 이 시기를 **‘대공포(La Grande Peur, Great Fear)’**라고 부른다.

이 공포는 단지 감정이 아니라, 행동의 도화선이었다.
농민들은 지체 없이 지주의 성을 습격하고, 조세 기록을 불태우고,
봉건 계약서를 찢으며 실제 권력 구조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

각 지역의 농민 봉기 사례들

부르고뉴(Bourgogne)
프랑스 동부의 농업 지역인 부르고뉴에서는
농민들이 밤마다 지주의 저택을 급습했다.
창고에 쌓여 있던 곡물을 가져와 마을에 재분배하고,
귀족과 관련된 모든 문서—납세 장부, 소작 계약서, 형벌 기록 등을 태웠다.

노르망디(Normandie)
서북부의 노르망디 지역에서는 농민들이 징세관과 경찰을 마을 밖으로 쫓아내고,
스스로 마을 방위대를 조직
했다.
이들은 산림에서 무기를 자급했고, 사냥을 금지한 법을 폐기하고
자연 자원을 ‘공유재산’으로 재정의했다.

프로방스(Provence)
남부 지방의 프로방스에서는 상인들과 연계한 농민 조직이 등장했다.
곡물 매점 행위를 하는 상인들을 몰아내고, 시장 가격을 스스로 정하며
식량의 공정 분배를 시도했다.
특히 여성 농민들의 참여율이 높았으며, 이들은 ‘빵과 자유’를 외치며
시가지를 행진하거나 수확량 점검에 동참했다.

브르타뉴(Bretagne)
독립적 문화가 강한 이 지역에선 수도원 소유지를 점령하고,
교회세 납부를 거부하는 운동
이 펼쳐졌다.
농민들은 사제와 마주 앉아 협상을 요구하며
‘하늘이 주는 땅은 모두의 것’이라는 공동체 논리를 펼치기도 했다.

무기는 농기구였다, 그러나 투지는 군인보다 강했다

이들 농민에게는 총도 없고, 훈련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가진 도구를 곧 무기로 삼았다.

  • 낫은 칼이 되었고
  • 쇠스랑은 창이 되었으며
  • 짚더미는 불화살이 되었다.

그들의 전략은 ‘유격전’에 가까웠다.
밤을 틈타 움직였고, 기습과 화형, 문서 파기, 징세 방해, 건물 점령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마치 하나의 자발적 레지스탕스 조직처럼 움직였다.

조직 없는 조직, 계획 없는 계획

흥미로운 점은 대부분의 봉기가 중앙 조직이나 명령 없이 자생적으로 발생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혁명가가 아니었고, 이념도 없었지만
‘더 이상은 안 된다’는 감정 하나로 마을 전체가 연대했다.

각 마을마다 봉기 방식은 달랐지만,
공통점은 “지금의 권력은 정당하지 않다”는 집단적 인식이었다.
이 인식은 어떤 이념보다 강력한 무기였고,
그것이 바로 프랑스 혁명을 전역으로 확산시킨 결정적 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름 없이 사라졌다

이 수많은 농민 전사들, 그들의 이름은 거의 기록되지 않았다.
그들은 일기장을 남기지도, 연설을 하지도, 선언문을 쓰지도 않았다.
대신 자신의 손으로 부순 것, 지운 문서, 태운 기록이 그들의 언어였다.

하지만 그들이 없었다면, 파리의 혁명은 도심의 소요로만 남았을 것이다.
그들은 진정한 민중 혁명의 불씨였고, 행동으로 시대를 바꾼 무명의 창조자들이었다.

4. 이름 없는 영웅들의 저항 방식과 생존 전략

프랑스 혁명기를 살아낸 농민들은, 교과서에 등장하는 명문가 출신의 혁명가들과는 달랐다.
그들은 책상 앞이 아니라, 밭과 창고, 시장통과 공동 우물 앞에서 조용한 혁명을 실행한 무명의 실천가들이었다.

이들이 선택한 저항의 방식은 단순히 ‘봉기’에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일상 속에서 체제의 균열을 일으키는 방법,
그리고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전략을 동반한 정교한 실천의 기술이었다.

비폭력, 그러나 강력했던 납세 거부 운동

무기를 들지 않고도 그들은 ‘저항’할 수 있었다.
가장 강력한 수단은 바로 조세 거부였다.

마을 공동체는 서로 입을 맞춰 징세관을 외면하거나,
지주의 요구를 무시하며, 세금 납부를 집단으로 거절
했다.
특히 여성 농민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징세인의 행렬을 막거나,
세금 납부 명단을 찢고 불태우는 행위도 자주 벌어졌다.

이러한 소극적이지만 조직된 행동은 권력 구조를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시골 민심’이라는 거대한 저항의 흐름으로 이어졌다.

문서 파괴: 종이 한 장이 운명을 결정했던 시대

프랑스 농촌에서 가장 무서운 ‘무기’는 총칼이 아니라 계약서와 장부였다.
소작 계약, 노역 기록, 세금 장부, 봉건권리 문서—
이 모든 종이들은 농민의 삶을 얽매는 사슬이었다.

이 때문에 많은 농민들은 귀족 저택을 습격할 때,
가장 먼저 서류보관소부터 찾았다.

불은 계약서에 붙었고, 농민의 자유는 그 잿더미 위에서 되살아났다.

문서를 불태우는 행위는 단지 행정적 파괴가 아니었다.
그것은 수백 년간 지속된 계급 관계를 상징적으로, 물리적으로 해체하는 정치적 행동이었다.

감시와 협박 속에서 이루어진 비밀 결사

많은 농민 마을에서는 외부로부터의 감시가 점점 강화되자
마을 단위의 비밀 회의가 늘어났다.
밤이 되면 낡은 헛간이나 숲 근처에 모여
“다음 주에 세금을 내지 말자”
“성직자가 오는 날에는 문을 닫자”
“징세관이 오면 소를 몰고 숲에 숨기자” 같은
실질적 저항 계획을 세우는 자율 공동체가 생겨났다.

어떤 지역에서는 자체 ‘농민 협의회’가 등장하여
세금 분담, 식량 분배, 공동 방어 등을 결정하기도 했으며,
이는 훗날 지방 자치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농기구는 무기이자 상징이었다

전투에 나설 수 없던 많은 농민들에게
쇠스랑, 괭이, 낫, 도리깨
단지 생계의 도구가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무장’이었다.

이 농기구들은 때로는 성문을 부수고,
때로는 귀족 창고를 개방하는 데 쓰였으며,
때로는 ‘우리는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시위의 상징물이 되었다.

저항과 생존, 동시에 추구해야 했던 이중 전략

농민들은 단순히 싸우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과 가족, 공동체의 생존을 동시에 지켜야 했기에
항상 두 개의 현실 속에서 균형을 잡아야 했다.

  • 한쪽 손에는 낫을, 다른 손에는 곡식을 들고
  • 한 발은 가마솥에, 다른 발은 마을 회의에
  • 오늘은 밭을 갈고, 내일은 권력을 흔들고

이러한 이중의 삶과 전략 속에서,
그들은 끝내 자신들의 존재를 역사 속에 조용히 새겨 넣었다.

그들의 저항은 위대한 연설이 아니었다.
그들의 무기는 철학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분명히 역사를 바꿨고,
그들이 흘린 땀과 침묵 속 외침은
오늘날 ‘프랑스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5. 혁명 이후 그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혁명이 성공한 뒤에도 농민의 이름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혁명 정부는 귀족을 처단했고, 왕정을 무너뜨렸지만
농민의 삶은 당장의 해방보다 조금씩 개혁되는 현실 속에서 천천히 변했다.

  • 봉건 의무는 폐지되었지만, 토지 개혁은 충분하지 않았다.
  • 많은 농민은 여전히 땅을 갖지 못한 채, 새로운 공화국 하의 세금 구조 속에 살아갔다.
  • 일부는 나폴레옹 전쟁에 징집되어 전장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그들이 혁명에 남긴 정치적 목소리와 행동의 경험
이후 프랑스 사회운동, 유럽 민중 반란, 농민 정치운동의 뿌리가 된다.
그들은 더 이상 ‘복종하는 백성’이 아니었다.

6. 오늘날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역사는 주로 승자와 이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채워진다.
그러나 진정한 변화를 만든 것은 늘 이름 없는 사람들의 행동과 용기였다.
프랑스 혁명도 마찬가지다.

화려한 연설, 선언문, 법령 뒤에는
한 줌의 빵을 위해 싸운 농민들, 밤새 문서를 불태우던 손,
조용히 거부하고 생존을 지켜낸 무명의 삶들
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았다.
그들이 없었다면 프랑스 혁명은 단지 파리의 소요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총을 들지는 않았지만,
가장 무거운 고통을 행동으로 바꾼 진짜 혁명가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