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험가의 뒤에는 셰르파가 있었다: 히말라야의 숨은 주인공들
1. 히말라야 개척사의 그늘, 원주민은 어디에 있었나?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K2, 로체 같은 고봉들은 오랫동안 ‘미지의 영역’으로 간주되었다.
이 산들을 최초로 ‘정복’한 인물들은 대부분 유럽이나 서구 출신 탐험가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이 눈보라 속에서 길을 찾고, 텐트를 설치하고, 눈더미를 넘을 때,
그 앞을 먼저 걸은 이들이 있었다. 바로 셰르파(Sherpa)로 대표되는 히말라야 원주민 가이드들이다.
이들은 탐험기에는 ‘가이드’, ‘짐꾼’, ‘보조원’ 등으로 짧게 언급되지만,
사실상 고산 등정의 실질적인 성공 요인을 책임진 숨은 개척자들이었다.
이 글은 이름 없는 그들의 헌신과 유산을 되짚고자 한다.
2. 셰르파란 누구인가? 네팔 고산지대의 산 사람들
‘셰르파(Sherpa)’는 많은 이들이 ‘히말라야 산악 가이드’의 대명사처럼 사용하는 단어지만,
본래 하나의 민족 이름이며, 독자적인 문화와 역사를 지닌 고산 공동체를 의미한다.
그들은 단순히 고용된 조력자가 아니라, **히말라야라는 극한의 자연환경 속에서 수백 년간 삶을 이어온 ‘산의 사람들’**이다.
셰르파는 티베트어로 ‘동쪽에서 온 사람(East People)’이라는 뜻으로,
본래는 티베트 고원에서 이주해 네팔 동북부 솔루쿰부(Solukhumbu) 지역,
특히 에베레스트와 가까운 카트만두 북동쪽 산악지대에 정착한 불교 계통의 민족이다.
이들은 해발 3,000~4,000m 이상의 고산지대에서 오랜 시간 거주하며
생리학적으로 고산 환경에 뛰어난 적응력을 갖추게 되었다.
예를 들어, 평균적인 셰르파는 산소 포화도가 낮은 환경에서도 안정된 호흡과 심박수를 유지할 수 있으며,
근육 내 산소 운반 능력이 뛰어나 고산증에 상대적으로 강한 특징을 보인다.
고산 환경 속에서 자라난 생존의 민족
셰르파들의 생활은 전통적으로 농사, 목축, 무역, 불교 신앙 중심의 공동체 활동에 기반해왔다.
그러나 20세기 초, 영국과 유럽의 탐험가들이 히말라야 고봉 정복에 나서면서
셰르파들은 단지 고산의 주민이 아닌, 등반의 동반자이자 전문가로서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된다.
특히 1920~1930년대 영국 탐험대의 에베레스트 원정에 참여하면서
그들은 등반대의 베이스캠프 설치, 짐 운반, 고산 정찰, 루트 개척, 위험 지역 확인 등
거의 전 과정을 맡아 수행하게 되었고,
이후 히말라야 등반 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산악가이드라는 명칭 아래 전 세계의 고산 등반을 실질적으로 가능케 한 핵심 인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셰르파는 짐꾼이 아니다: 등반 실무자이자 생명선
등반 기록에는 흔히 ‘셰르파 5인 동행’ 또는 ‘셰르파 가이드 배치’ 등으로 단순 언급되지만,
이들은 단순한 인력보조가 아니다.
히말라야 등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빙벽 로프 설치, 사다리 배치, 크레바스 탐색, 고소캠프 확보 작업을 담당하는 주체가 바로 셰르파들이다.
- 로프가 매이지 않은 얼음 절벽에 먼저 올라가 경로를 열고,
- 고산 폭풍 속에서 무게 30kg 이상 장비를 지고 이동하며,
- 등반자들이 실신하거나 낙오하면 구조 작업도 그들이 수행한다.
셰르파들은 수십 년간의 경험으로 눈의 두께, 바람의 결, 얼음의 소리만 듣고도 위험을 감지할 수 있으며,
이는 **기계와 도구로도 대신할 수 없는 ‘생존의 감각’**이다.
히말라야는 그들에게 ‘고향’이자 ‘신성한 공간’
셰르파들에게 히말라야는 단지 직장이 아니다.
그들에게 이 산맥은 조상 대대로 이어져온 삶의 터전이며, 불교적 신앙이 깃든 영혼의 공간이다.
에베레스트는 현지어로 **“초몰룽마(Chomolungma)”, 즉 ‘세상의 어머니’**로 불린다.
셰르파들은 산에 오르기 전 반드시 산신에게 기도하는 의식을 치르고,
등반 중에도 끊임없이 ‘프레이어 깃발(룽타)’을 세우며 자연과의 조화를 빈다.
즉, 그들에게 등반은 산을 정복하는 일이 아니라, 신성한 공간을 잠시 빌리는 행위이며,
그래서 셰르파들의 등반 윤리는 항상 조심스럽고 절제되어 있다.
직업이 아닌 정체성으로서의 셰르파
오늘날 셰르파는 ‘직업명’처럼 사용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민족, 문화, 생존 방식이 융합된 정체성이다.
이들은 단순히 ‘등반을 잘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히말라야라는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공동체를 유지하고,
고객보다 앞서 길을 열고, 목숨을 걸어 안전을 확보하며, 그 어떤 명예보다 실질을 택해온 실천적 존재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그들의 이름 없는 발자국을
‘조력자’로만 남겨서는 안 된다.
그들은 히말라야 등정의 공동 창조자이며, 고산 문화의 계승자이기 때문이다.
3. 에베레스트를 열었던 진짜 주인공, 텐징 노르게이와 무명의 동료들
1953년 5월 29일, 전 세계는 한 장의 흑백 사진에 환호했다.
사진 속 인물은 에드먼드 힐러리(Sir Edmund Hillary).
그의 등 뒤에는 휘날리는 영국 국기가 있었고, 자막은 이렇게 적혔다.
“인류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다.”
하지만 정상을 함께 밟은 또 한 명의 인물,
**텐징 노르게이(Tenzing Norgay)**는 그만큼의 조명을 받지 못했다.
그는 단지 ‘보조 가이드’가 아니었다.
등정의 전 과정에서 기술적 핵심 역할을 맡은 전문 산악인이었으며,
수차례에 걸친 고산 원정 경험과, 자연과 융화된 감각으로
히말라야 등정사에 지워질 수 없는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텐징 노르게이, 산을 삶으로 삼은 사람
텐징 노르게이는 티베트 국경 근처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부터 고산지대에서 자라났다.
그가 에베레스트를 처음 오르려 했던 건 1935년, 겨우 열아홉 살 때였다.
그 후 1953년 등정 성공 전까지 총 6차례의 에베레스트 원정에 참여했다.
즉, 그에게 에베레스트는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일부이자 숙명이었다.
1953년 영국 탐험대는 에베레스트 남동릉 루트를 택했고,
최종 공격조로 힐러리와 텐징이 선정되었다.
이 결정은 단순한 ‘가이드 동행’이 아니라,
등반의 기술적 경험과 고산 생존능력, 팀워크를 기준으로 이뤄진 판단이었다.
등정 당일, 산소통의 문제가 발생했고, 힐러리가 한계에 가까운 상황에서도
텐징은 침착하게 장비를 조율하고, 동료를 독려하며 정상으로 이끌었다.
그는 등반 후 “나는 힐러리를 에베레스트 정상으로 데려다주었다”고 말했다.
기록되지 않은 수십 명의 조력자들
텐징의 뒤에는 또 다른 이름 없는 수많은 셰르파 동료들이 있었다.
1953년 에베레스트 원정대는 400명 이상의 보조 인력과 20여 명의 셰르파 가이드를 포함한 대규모 작전이었다.
이들은 산소통과 장비 수백 킬로그램을 고소까지 운반했고,
로프 설치, 캠프 구축, 고산 정찰, 낙오자 구조 등
고산 작전의 거의 모든 실무를 담당했다.
그들의 이름은 대부분 기록되지 않았다.
그들의 사진은 남지 않았고,
훈장은 커녕, 언론의 한 줄도 차지하지 못했다.
그들이 없었다면, 힐러리와 텐징은 정상까지 도달은커녕
베이스캠프에서부터 고산 지대까지의 접근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그들의 손으로 세운 텐트에서, 그들이 만든 길 위에서
탐험가들은 사진을 찍고 ‘최초의 영광’을 누렸다.
‘정복’이라는 이름의 착시
히말라야 정복이라는 말은 많은 이들에게 도전과 성취의 이미지를 준다.
하지만 그 ‘정복’의 현장에는 언제나
현지 원주민들의 노동과 지식, 생명의 리스크가 동반되었다.
텐징은 자신의 역할을 강조하지 않았고,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힐러리에게 넘겼다.
그는 단지 조용히 말했다.
“나는 산을 사랑했고, 그것이 나의 길이었다.”
그의 말에는 자부심과 동시에,
히말라야를 단지 영광의 무대로 삼지 않으려는 겸손함과 철학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움직인 무명의 셰르파들—
그들은 자신의 삶을 걸고, 그 산을 ‘올라간 사람’이 아니라 ‘지탱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공동 등정의 역사’
1953년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두 사람 중,
세상은 오랫동안 한 사람만을 기억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세계 각국의 산악인들과 인권 단체, 학자들은
텐징과 그의 동료 셰르파들이 남긴 진정한 의미를 되찾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 등정은 한 사람의 승리가 아니었다.
**수십 명의 원주민 가이드와 조력자들이 함께 만든 ‘공동 등정의 역사’**였다.
히말라야에서 진짜 먼저 길을 낸 사람들,
정상의 바람을 처음으로 맞은 사람들은
때로 말이 없고, 카메라 앞에 서지 않았던 이들이었다.
그들의 침묵은, 산만큼이나 깊고 묵직한 기록이 되었다.
4. 위험을 먼저 감수한 이들: 구조, 정찰, 로프 설치의 실무자들
히말라야 등정은 단지 ‘정상’이라는 한 점을 향해 올라가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한계와 기후의 변덕, 지형의 예측 불가능성을 견디며
수십 일에서 길게는 수 개월에 걸쳐 수행되는 고도의 생존 작전이다.
이 작전에서 가장 먼저 움직이고, 가장 깊이 산과 부딪히는 존재가 있다.
바로 **셰르파들(Sherpa)**이다.
등반대가 베이스캠프에서 고도에 적응하며 체력을 비축할 때,
셰르파들은 이미 그 위의 고소 캠프를 향해 움직인다.
수백 미터의 얼음 절벽에 로프를 고정하고,
빙하 사이의 크레바스(빙하 틈)에 철제 사다리를 설치하며,
폭설과 낙석을 감지하고 생존 경로를 만든다.
그들은 ‘등반 지원 인력’이 아니라,
**히말라야의 모든 위험을 몸으로 먼저 맞이하는 ‘개척자이자 수호자’**인 셈이다.
그들이 먼저 걷는 눈길, 가장 위험한 선두
히말라야 고봉은 눈사태, 빙하 붕괴, 낙석, 산소 부족, 저체온증, 눈먼 비탈의 복합 위협 속에 있다.
이러한 조건 아래에서 ‘등정 루트’는 매해 새롭게 설정되고
가장 위험한 경로의 안정화를 누군가는 가장 먼저 해야 한다.
- 빙벽 고정 로프 작업: 수직에 가까운 얼음 절벽에 볼트와 아이스 앵커를 박고,
로프를 설치하여 뒤따라오는 등반자들의 이동을 가능케 한다. - 빙하 정찰: 크레바스(빙하 틈)는 때로는 얇은 눈층 아래 숨겨져 있다.
셰르파는 ‘듣고, 눌러보고, 냄새 맡는’ 감각으로 그 위험을 감지한다. - 사다리 연결: 크레바스를 건너기 위해 셰르파들은 철제 사다리를 어깨에 메고
빙하 위에 직접 설치한다. 가끔은 로프 하나에 의지해 허공에 매달려 작업해야 한다.
이러한 임무는 등반대가 아직 출발하기도 전,
새벽 3시부터 진행되며, 영하 20도 이하, 풍속 50km/h 이상의 조건 속에서 이루어진다.
사고가 나면, 구조는 셰르파가 한다
고산에서의 구조 작전은 헬리콥터조차 쉽게 접근할 수 없는 환경에서 시작된다.
눈보라와 빙벽, 고도에 의한 의식 저하 속에서
셰르파들은 자신의 체온과 체력을 갈아넣으며 동료를 업고 내려온다.
2014년 에베레스트 빙하붕괴 사고 당시,
아이스폴 지역에서 로프 설치를 하던 셰르파 16명이 순식간에 사망했다.
그들은 대부분 최고 난이도의 고산 기술을 보유한 베테랑 가이드들이었지만,
사고 직후 뉴스는 ‘원정대의 생존 여부’에 초점을 맞췄고,
사망한 셰르파들의 이름은 뉴스 본문 말미에, ‘운반 인력’으로만 언급되었다.
이듬해인 2015년, 네팔 지진으로 다시 한 번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가 붕괴되었을 때도
최초 대응자이자, 마지막까지 동료를 지킨 이들은 셰르파들이었다.
그들은 목숨을 걸었고, 실제로 많은 생명을 구했지만,
구조의 이름으로는 기억되지 못했다.
"가장 먼저 오르고, 가장 늦게 내려오는 사람들"
셰르파들은 등반자보다 먼저 산을 오른다.
그들은 먼저 떠나 경로를 확보하고,
가장 마지막에 내려와 장비를 회수하고, 쓰레기를 치운다.
등반자들이 정상에서 사진을 찍고 내려오는 동안,
그들은 여전히 얼음 위에서 생명을 걸고 작업 중이다.
이들의 하루는 일반인의 수면 시간보다 긴 등반 루트에서,
산소통도 없이, 짐을 메고, 앞을 보지 못할 정도의 눈바람 속에서 계속된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새로운 팀이 오면
다시 그 길을 오른다.
이것이 셰르파들의 일상이다.
이것이 ‘정상 정복’이라는 문장의 배경이다.
존경받아야 할 이름 없는 전사들
그들의 작업은 등반자에게는 ‘코스가 잘 정비되어 있다’는 평가로 돌아오고,
탐험 기록에는 단지 ‘로프를 설치해준 셰르파팀’이라는 문장으로 남는다.
하지만 진실은 다르다.
그들의 기술, 감각, 체력, 생존 지혜 없이는
히말라야 등정이란 단 한 걸음도 시작될 수 없다.
우리는 이제, 셰르파들을 ‘보조자’로 부르기를 멈춰야 한다.
그들은 선두에서 산을 설계한 등정의 실질적 개척자이자,
다른 이의 생명을 책임지는 조용한 구조자이기 때문이다.
5. 현대 등반문화 속 셰르파의 현실: 존중인가 착취인가?
오늘날 히말라야 등반은 ‘도전과 모험’의 상징이자,
세계 각국에서 모여드는 수백 명의 등반객이 몰리는 산업이 되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여전히 셰르파들의 불균형한 처우가 존재한다.
- 대부분의 셰르파는 등반객보다 3~5배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이동하며,
- 사고 위험이 가장 높은 지점에 먼저 투입된다.
- 일부 셰르파는 2개월 간 하루 10시간 이상 노동하면서도 평균 수입은 1,000달러에 불과하다.
- 보험이나 안전장비는 부족하고, 사망해도 가족에 대한 보상은 형식적인 경우가 많다.
물론 최근에는 셰르파 출신으로 등반사를 직접 운영하거나,
전문 등반가로 세계 기록을 세우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대표적으로 **니르말 푸르자(Nirmal Purja)**는 14좌 완등 기록으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대다수 셰르파는 ‘누군가를 올려주는 존재’로만 인식되고 있다.
6. 우리는 왜 그들의 이름을 기억해야 하는가?
히말라야는 단지 자연의 장엄함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노동과 희생, 이름 없는 땀의 층위로 이루어진 공간이다.
탐험과 정복의 뒤에 숨은 원주민 가이드들은
언제나 선두에서, 그러나 이름 없이 고도를 올렸다.
그들을 단지 ‘짐꾼’이나 ‘조력자’로 기억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탐험의 윤리를 배운 것이 아니다.
이제는 등정 성공의 영광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그 여정을 함께 걸은 이들의 이름과 삶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한 때다.
히말라야의 진짜 주인은,
그 땅을 알고, 그 공기를 숨 쉬고,
그 위에서 세대를 이어 살아온 사람들이었음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