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꾼 무명의 선원들: 대항해 시대 숨은 주역들
1. 대항해 시대의 진짜 주역은 누구였는가?
대항해 시대(Age of Discovery), 우리는 이 시기를 떠올릴 때 보통 유명한 이름들부터 떠올린다.
콜럼버스, 마젤란, 바스코 다 가마, 프랜시스 드레이크…
이들은 바다를 가르며 신항로를 개척한 위대한 탐험가로 불린다.
하지만 묻자.
과연 한 명의 탐험가가 혼자 배를 움직이고 항로를 개척할 수 있었을까?
정답은 '절대 아니다'이다.
거대한 범선은 수십 명에서 많게는 200명이 넘는 선원들이 협력하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었다.
나침반을 읽고, 돛을 조정하고, 갑판을 청소하고, 물과 식량을 관리하고, 밤에는 별을 읽던 이들.
그들이 있었기에 대항해 시대는 가능했고, 항해는 이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은 남아 있지 않다.
이름 없이 사라졌고, 역사책에는 단 한 줄조차 허락되지 않은 이들이 바로 진짜 바다의 주인들이었다.
2. 무명의 선원들: 배를 움직인 손과 발들
대항해 시대의 상징적 순간 중 하나는 콜럼버스가 1492년, 산타마리아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넌 사건이다.
이 항해를 떠난 선원은 약 40명 남짓. 오늘날 대부분은 선장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이름만을 기억하지만,
사실상 그 배를 움직이고 생존 가능하게 만든 사람들은 기록되지 않은 수십 명의 선원들이었다.
이들 선원은 조타수, 돛 조작자, 배의 균형을 잡는 발란스 조정자, 수리공, 목수, 의무병, 물 담당, 보급 관리자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배가 파손되면 즉석에서 목재를 자르고 배를 꿰매야 했으며,
폭풍 속에서는 로프를 껴안고 수 시간 동안 돛을 잡아 매는 고된 육체노동이 뒤따랐다.
항해 중 가장 두려운 적 중 하나였던 괴혈병이 돌면, 서로를 간호하며 상처에 소금물을 붓고 낙후된 의술로 생명을 지켰다.
뿐만 아니라 선원들은 단지 ‘노’만 저은 노동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경험으로 항해 노선을 기억하고, 별자리를 통해 위치를 추정하며,
가장 앞에서 낯선 육지를 탐색하고 원주민과의 첫 접촉을 담당하기도 했다.
대양 한가운데서 싸운 진짜 전사들
당시의 항해는 절대 낭만적이지 않았다.
바람과 파도는 생명을 위협했고, 대부분의 선박은 **목선(木船)**에 불과해 금방이라도 물이 차오를 위험이 있었다.
도구도 빈약했다. 나침반, 육분의, 간단한 해도, 그리고 무릎으로 감 잡은 경험이 전부였다.
이런 현실에서 선원들은 그야말로 ‘살아 있는 항해 컴퓨터’였고, 항해학의 실천자이자 기록자였다.
심지어 어떤 배에는 정식 항해사가 없었고, 오랜 항해 경험을 지닌 선원 하나가 항로 전체를 도맡아 관리하기도 했다.
무역품과 금은 실었지만, 정작 자신들의 음식은 썩은 고기, 곰팡이 핀 빵, 벌레 낀 말린 콩이 전부였다.
생수는 며칠만 지나면 부패했고, 술은 희석해 먹어야 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선원들은 배를 움직였고, 생존했고, 때로는 바다에 스러졌다.
마젤란의 항해: 단지 18명이 돌아왔다
**마젤란의 세계일주 항해(1519~1522)**는 대항해 시대의 상징이자, 인간 의지의 극한을 시험한 사건이었다.
5척의 배, 약 270명의 선원이 스페인 세비야를 출발해, 대서양을 거쳐 남미 대륙을 돌고 태평양을 건넜다.
이 과정에서 굶주림, 폭풍, 원주민과의 충돌, 질병, 내분이 이어졌고,
결국 마젤란 본인도 필리핀 막탄 섬에서 전사했다.
놀라운 것은, 이 항해를 마친 배는 단 하나 ‘빅토리아호(Victoria)’뿐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배를 이끈 사람은 **선장이 아닌, 무명의 선원 후안 세바스티안 엘카노(Juan Sebastián Elcano)**였다.
엘카노는 선장이 아니었다. 항해 중반까지 그의 이름은 기록조차 되지 않았지만,
지휘 체계가 붕괴된 뒤 선원들의 지지를 받아 마지막 구간을 이끌었고,
스페인으로 돌아온 뒤 마젤란보다도 먼저 ‘지구 일주를 완수한 최초의 인물’이라는 역사적 타이틀을 얻게 된다.
하지만 그의 뒤에 있던 수많은 동료들은 바다에 수장되었고, 기록에서조차 지워졌다.
이들은 당시로서는 “어차피 죽을 사람들”이라는 취급을 받았고, 그들의 헌신은 전리품이나 성공의 배경음으로만 소비되었다.
이처럼 대항해 시대를 진정으로 ‘움직인’ 이들은 항해 일지를 쓸 수 없었던 사람들,
그러나 풍랑과 폭력, 질병과 생존의 경계에서 몸으로 역사를 완성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손이 없었다면, 콜럼버스도 마젤란도 신항로를 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잡았던 돛줄과 지운 흔적은 바다 위에 여전히 남아 있다.
3. 탐험 아닌 노동: 항해의 현실은 어땠는가?
‘탐험’이라는 단어는 귀를 간질이는 모험과 낭만의 뉘앙스를 담고 있다.
하지만 대항해 시대 선원들에게 항해란, 절대 그런 이상적인 단어로 포장할 수 없는 혹독한 생존의 연속이었다.
‘탐험’은 선장과 귀족 탐험가의 언어였고, 선원에게 그것은 ‘노동’ 그 자체였다.
당시 범선은 하루 24시간, 쉼 없이 움직이는 거대한 공장과도 같았다.
돛을 펴고 접고, 돛대 위에서 바람을 읽고, 키를 잡고 조타하며, 끊임없이 닦고 조이고 조율하는 일은
보통 **4시간 교대(Watch system)**로 진행되었으며, 한 번 근무를 마치면 단 두세 시간 쪽잠을 자고 다시 작업에 투입되었다.
잠을 자는 공간은 별도로 존재하지 않았다.
갑판 아래 축축한 나무 바닥 위에 바람막이도 없이 눕는 것이 전부였으며, 폭우가 쏟아질 땐 그대로 젖은 채 버텨야 했다.
끊임없는 병과 불결, 그리고 죽음
배 위에서 가장 흔한 사망 원인은 **괴혈병(Scurvy)**이었다.
신선한 과일이나 채소를 구할 수 없는 환경에서 장기 항해를 하면, 비타민 C 부족으로 치아가 빠지고 피가 흐르며, 온몸이 붓고 결국 장기가 괴사해 죽음에 이르렀다.
이질, 장티푸스, 피부병, 곰팡이 감염도 흔했고, 특히 물이 섞인 썩은 빵과 부패한 건어물은 식중독의 원인이 되었다.
물은 몇 주만 지나면 썩기 시작했고, 악취와 부유물이 떠다니는 물을 걸러 마셔야 했다.
해충도 문제였다. 바퀴벌레, 벼룩, 이, 심지어 쥐가 선원들과 함께 배 위를 누볐고,
선원들은 다리를 긁어 피가 나도 내버려두거나, 날카로운 조각으로 긁어내는 식으로 대응했다.
의료 담당자가 있는 경우도 드물었으며, 수술은 무취마취도 없이 칼로 절단하고, 술 한 모금으로 고통을 견뎌야 했다.
철권 위계와 처벌, 폭동의 위험
항해 중 선장은 절대 권력자였다.
그의 명령에 불복하면 바로 태형, 수갑, 감금, 심하면 처형까지 이뤄졌다.
선원들 사이의 다툼도 잦았고, 음식 배급을 두고 벌어지는 암투와 폭력은 일상이었으며,
심지어 **선장을 상대로 한 폭동(뮤테니)**도 여러 차례 발생했다.
예컨대, 바르톨로메우 디아스의 희망봉 항해 중 일부 선원은 귀환을 요구하며 반기를 들었고,
마젤란 항해 중에도 한 척의 배에서 선장이 마젤란의 명령에 불복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당했다.
그만큼 바다 위에서의 삶은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긴장 상태였고,
항해 중 한 명의 자살이 전염병보다도 더 큰 충격을 주기도 했다.
그래도 배에 올랐던 이유: 절박한 생존 본능
이런 조건에도 불구하고 왜 수많은 이들이 다시 배에 올랐을까?
그 이유는 단순하다. 육지에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은 기근, 실업, 농노제 붕괴, 종교 탄압, 절대왕정의 강화 속에서 하층민들에게 생존의 기회가 극히 제한된 사회였다.
많은 선원들이 감옥을 대체한 노동력으로 징집되거나, 노역을 면제받기 위한 조건부 항해 참가자였다.
또 일부는 ‘신대륙’이라는 말에 속아 부를 꿈꾸며 모험에 나선 무지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신대륙은 황금이 아닌, 지옥 같은 열대와 죽음의 바다, 이해할 수 없는 타인과의 충돌이었다.
생존자들조차 항해가 끝나고 돌아오면 병들어 있었고,
“육지로 돌아왔다 해도 다시는 바다를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말만 남겼다.
결국 대항해 시대란, 몇몇 탐험가의 업적이 아닌 수천 명 선원들의 피와 노동, 희생 위에 만들어진 기록이었다.
바다 위의 삶은 그 어떤 신화나 전설보다 현실적이고 잔혹한 이야기였고,
그 속에서 무명의 선원들은 역사를 이루었지만, 그 역사에 쓰이지는 못한 이름들이었다.
4. 식민지 개척의 앞잡이였나, 생존자였나?
대항해 시대는 인간의 지리적 상상력을 넓힌 ‘위대한 발견의 시대’로 불린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단순한 ‘탐험’이나 ‘모험’이 아니라,
유럽 중심 제국주의의 본격적인 출발선이었다.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유럽 열강은 새로운 항로를 찾은 직후
곧장 상륙지를 영토화하고, 원주민 사회를 파괴하며, 식민지 지배 체계를 구축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선원들은 최전선의 병력으로 활용되었다.
배에서 내리는 첫 사람들, 미지의 땅을 밟고 원주민과 최초로 접촉하며, 낯선 환경과 언어, 질병과 무력 충돌 속에 놓인 존재들이었다.
지도자는 배에 남고, 명령을 수행한 이들은 언제나 선원들이었다.
그들은 ‘탐험가의 그림자’로, ‘제국의 도구’로, ‘수탈의 첨병’으로 움직였지만,
실상 그들 자신도 그 구조의 희생자이며 소모품이었다.
식민지 개척의 현장에 내던져진 사람들
대부분의 선원들은 ‘정복’이라는 명분 속에서도
지시를 수행하는 하위 노동자로 존재했을 뿐, 정치적 결정권이나 이익과는 거리가 먼 계층이었다.
그들은 현지 원주민과 가장 먼저 마주치며, 종종 대화조차 통하지 않는 상태에서
오해와 충돌, 무력 충돌, 죽음의 위협을 먼저 맞닥뜨렸다.
심지어 병에 걸려 쓰러진 선원을 ‘유물’처럼 두고 떠나는 사례도 있었다.
몇몇은 현지 부족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거나, 혹은 귀화하여 토착민 사회의 일원이 되기도 했으며,
일부는 원주민 여성과 가정을 이루며 섞여 살게 되었다.
그들은 더 이상 스페인인도, 포르투갈인도 아닌, **‘바다 너머에서 온 외지인’**이라는 모호한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
라틴아메리카, 동남아, 아프리카에 남겨진 혼혈과 항구 문화
대항해 시대의 선원들이 남긴 혼혈 공동체와 항구 도시의 문화는 오늘날에도 살아 있다.
브라질의 동부 해안, 필리핀의 루손 섬, 인도 고아, 인도네시아 말루쿠 제도, 서아프리카의 세인트루이스 등지에는
당시 선원들과 현지인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들이 지금도 존재하며, 그들만의 복합 문화, 언어, 식생활, 음악, 종교를 형성했다.
이 문화는 종종 ‘혼혈적 잔재’로 불리며 무시당하거나 삭제되었지만,
사실상 그것은 정복과 저항, 정착과 생존이 뒤엉킨 역사의 증거다.
그 지역의 항구 시장, 민속 의례, 음식 이름, 항해 노래에는
무명의 선원들과 그들의 가정이 만든 소박하고 복잡한 유산이 배어 있다.
제국주의의 앞잡이였나, 구조적 피해자였나?
역사적 평가에서 선원들은 오랫동안 제국주의의 선봉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구조 속에 던져진 노동자이자, 제국주의가 만든 피라미드 구조의 하단부였다.
그들은 지시를 이행했을 뿐이고, 지배자의 정책에 따라 움직였다.
현지 민중에게는 침입자였지만, 본국 귀환자에게는 잊혀진 존재였다.
식민지 수탈로 인한 이익은 대부분 지배계급과 조국 정부, 상인, 군사관료들에게 집중되었으며,
선원들은 최저의 보수와 최악의 조건 속에서 **‘정복의 공범’이 아니라 ‘정복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대항해 시대의 빛나는 영웅 서사 뒤에 가려진,
이처럼 불완전하고 모순적인 삶의 층위에 놓인 선원들을 다시 바라봐야 한다.
그들은 무기를 들기도 했고, 칼에 쓰러지기도 했으며, 가정을 꾸리기도 하고,
종종 그 땅에 뿌리를 내린 잊힌 존재들이었다.
‘앞잡이’라는 단어는 간단하지만,
그 이면엔 복잡한 인간의 생존 조건과 사회 구조, 그리고 기억되지 않은 희생의 역사가 숨어 있다.
5. 왜 이들의 이름은 역사에서 사라졌는가?
대항해 시대의 기록은 철저히 ‘명령하는 자’ 중심의 시선으로 기록되었다.
항해 일지, 보고서, 역사서는 대부분 선장, 총독, 황제, 종교인의 이름으로 작성되었으며,
노동자, 선원, 통역가, 토착 안내인, 노예 선원들의 존재는 '등장하지 않는 존재'로 설정되었다.
기록이 사라지면 기억도 사라진다.
그리고 그렇게 수많은 이름 없는 뱃사람들은 역사로부터 잊히는 선택을 강요당한 것이다.
그들은 역사에 참여했지만, 역사로 남지 못했다.
6. 우리가 기억해야 할 ‘작은 영웅들’의 유산
오늘날 항해 기술, 항구 설계, 해양지도, 해양문화는
당시 무명의 선원들이 남긴 손의 흔적, 땀의 축적, 삶의 기술에 뿌리를 두고 있다.
GPS 이전의 별자리 해석, 대양에서 생존하는 법, 돛과 바람을 다루는 기술,
이 모든 것은 책이 아닌 경험과 몸으로 이어진 지식이었다.
그리고 이 지식은 다시 현대 해양운송, 해양 과학, 조선 기술의 바탕이 되었다.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모른다.
하지만 오늘 바다 위를 움직이는 모든 것에는,
그 이름 없는 뱃사람들의 손끝이 깃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