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제국주의에 저항한 여성 전사들, 아프리카의 딸들
1. 아프리카 식민화와 여성의 저항은 왜 중요한가?
19세기, 아프리카는 유럽 열강의 침략과 식민화로 거대한 격변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베를린 회의(1884~1885)를 통해 아프리카 대륙이 강대국들 사이에서 **‘분할’**되며, 수많은 국가와 공동체가 강제 해체되거나 종속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이 단순한 일방적 정복만은 아니었다. 아프리카 곳곳에서는 격렬한 저항과 전투, 외교적 협상과 민중 조직 운동이 병행되었고,
그 중심에는 놀랍도록 강인한 여성 리더들이 존재했다.
아프리카 여성들은 단지 남성 전사들의 배후가 아니었다.
그들은 직접 전장에 나섰고, 군대를 이끌었으며, 외교적 전략을 짜고, 민중을 이끌었다.
그동안 역사 속에서 ‘조력자’로만 간주되던 여성들이 자신의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중심에 섰던 수많은 기록들은, 이제야 빛을 보기 시작했다.
2. 전사로 싸운 여성 지도자들
아프리카 해방운동에서 ‘전사’라는 단어는 더 이상 남성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19세기 아프리카에서 유럽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수많은 전선에는 여성 지휘관, 여왕, 전사, 전략가가 실질적인 리더로 존재했다.
그들은 공동체의 어머니이자 방패였고, 때로는 왕좌를 넘겨받은 정치가였으며, 전쟁터 한가운데에서 창을 들고 명령을 내리던 지휘관이었다.
이들은 단순히 ‘남성 부재의 대체자’가 아니라, 그 자체로 독립적인 권력과 통찰, 용기를 지닌 지도자였다.
은징가 음반데(Nzinga Mbande) – 앙골라의 전설적인 전사 여왕
비록 17세기의 인물이지만, 은징가 여왕은 19세기 아프리카 해방운동의 ‘정신적 아이콘’으로 되살아났다.
그녀는 당시 포르투갈 식민세력의 노예 무역과 군사 침략에 맞서, 앙골라의 은도(Ndongo) 왕국과 마타바(Matamba) 왕국을 통합하고 지속적인 저항을 이끌어낸 전사형 군주였다.
은징가는 외교 협상 중 포르투갈 대표가 자리에 앉고 자신에게는 자리를 주지 않자, 시녀의 등에 앉아 절대 굴복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주며 강인함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녀는 남성 복장을 하고 군대를 직접 지휘했으며, 무기 훈련과 진형 설계에도 개입하며 전략가의 면모를 보였다.
그녀의 치세 동안 앙골라는 끝까지 포르투갈의 속국이 되지 않았고, 이는 19세기 반식민 세력에게 “여성도 저항의 선봉에 설 수 있다”는 실질적 전례를 남겼다.
19세기 초반, 앙골라와 콩고 지역의 여성 리더들은 그녀를 “어머니 장군(Mãe General)”이라 부르며, 은징가의 이름으로 반식민 게릴라 조직을 결성하기도 했다.
야 아산테와(Yaa Asantewaa) – 아샨티 왕국의 여왕 어머니
야 아산테와는 1900년, 가나 아샨티 왕국의 여왕 어머니(Nana)로서 전면에 나선 지도자였다.
영국이 아샨티족의 **정신적·정치적 상징인 황금 의자(Golden Stool)**를 강제로 빼앗으려 하자, 남성 귀족들과 장군들이 망설이는 사이,
야 아산테와는 전통회의에서 **“남자들이 싸우지 않으면 여자인 내가 나서겠다”**고 선언하며 봉기의 불씨를 지폈다.
그녀는 단지 선동자가 아니었다.
야 아산테와는 실제로 5,000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해 전략적 요충지를 점령하고, 보급로를 확보하고, 방어선을 구축하는 전술적 지휘관이었다.
그녀가 지휘한 **야 아산테와 전쟁(Yaa Asantewaa War, 또는 제5차 아샨티 전쟁)**은 영국 식민 역사에서도 가장 치열하고 조직적인 저항 중 하나로 기록된다.
전쟁은 결국 영국의 압도적 화력 앞에 패배로 끝났고, 야 아산테와는 세이셸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살아 있다.
가나에서는 매년 그녀를 기리는 기념행사가 열리며, 그녀는 **“서아프리카 여성 저항의 상징”**으로 교과서, 영화, 시, 음악에 등장한다.
네제이 여왕(Queen Ndate Yalla Mbodj) – 세네갈의 마지막 자르 여왕
19세기 중반 세네갈의 왈로 왕국(Waalo Kingdom)은 프랑스 식민세력의 침략과 내분 속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이때 왕국의 마지막 군주로 즉위한 인물이 바로 **네제이 얄라 음보즈(Queen Ndate Yalla Mbodj)**였다.
그녀는 여왕이라는 지위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전쟁의 총사령관이자 외교 책임자로 국가를 지켰다.
네제이는 프랑스군의 군사적 압박에 대해 반식민 연맹을 구축하고, 주변 부족과의 결속을 강화하는 데 힘썼다.
그녀는 협상과 전투를 병행하며 수년간 프랑스의 진격을 지연시켰으며, 심지어 무기 조달, 항구 통제, 통신망 운영까지 직접 관장했다.
프랑스 기록에서는 그녀를 “위험한 여왕”, “정치적 지능이 높은 전사 여성”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끝내 세네갈은 프랑스 식민지로 전락했지만, 네제이 여왕은 프랑스에 끝까지 굴복하지 않은 독립왕국의 마지막 지도자로 기억되며,
그녀의 외교 전략과 군사 지도력은 아프리카 여성 정치사에서 보기 드문 사례로 남아 있다.
이 여성들은 단순히 ‘예외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의 공동체가 침략당할 때, 단 한 사람이라도 나서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전장에 나선 리더였고,
그들의 존재는 19세기 아프리카 해방운동의 ‘보이지 않는 절반’을 역사 위로 끌어올리는 강력한 증거다.
3. 협상가이자 외교관이었던 여성들
아프리카 해방운동의 역사를 전쟁 중심으로만 보는 것은 매우 협소한 관점이다.
모든 저항이 창과 총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특히 여성 지도자들은 정치적 유연성과 외교적 수완, 문화적 설득력을 기반으로 공동체를 보호하고 지배 세력에 맞서 싸우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들의 무기는 무력이 아니라 말, 신념, 연대, 그리고 전통의 힘이었다.
외세와의 전면전을 피하면서도 공동체의 자율성과 존엄을 지켜내려는 이들의 활동은 전사와는 또 다른 형태의 리더십이었다.
이들은 단순한 협상자가 아니라, 민중의 통합을 이끌고 문화와 종교를 활용해 저항 의식을 고양시키는 문화 정치가였다.
루추웨 여왕(Mmantatise) – 남부 아프리카의 외교 전략가
루추웨 여왕은 19세기 초 남아프리카의 바수토(Basotho)족의 일부인 ‘바타와나(Batwana)’ 계열 부족을 이끌었던 실질적 지도자로,
당시 지역 전쟁과 유럽 세력의 확장 사이에서 피난민 공동체와 분산된 부족들을 통합하고 보호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녀는 무기를 들기보다는 이주 공동체 간 평화 협정 체결, 전통 의례와 민속 조약을 활용한 문화 중재,
그리고 서구 선교사들과의 조건부 협력을 통해 공동체의 자율권을 확보하는 데 집중했다.
당시 남부 아프리카는 줄루 제국의 확장과 백인 식민개척의 충돌 속에 깊은 혼란을 겪었고, 수많은 소수 부족이 사라지거나 병합되었다.
그러나 루추웨는 폭력의 도미노를 막기 위해 여성의 리더십으로 지역 간 외교적 버퍼를 형성했다.
그녀는 종종 회담을 주재하며 젊은 족장들에게 무력 대신 말로 문제를 풀 것을 강하게 설득했고, 그의 이름은 남부 아프리카 구술사에서 ‘화해의 여왕’으로 회자된다.
그녀는 또한 여성으로 구성된 내각 조직을 활용하여, 여성 고위 참모들이 직접 외교 교섭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여성 정치 네트워크를 구축한 인물이었다.
아마지야 여왕(Maji Maji 여성 연합) – 종교를 통한 초부족 연대의 상징
아마지야 여왕은 하나의 실존 인물이라기보다, 1905~1907년 독일 식민 지배에 저항한 탄자니아의 마지마지(Maji Maji) 항쟁에 참여한 여성 지도자들의 총칭적 존재에 가깝다.
당시 여성들은 단순한 민중 동원이 아니라, 종교적 예언과 민속 공동체를 중심으로 민중의 정신적 결속을 주도했다.
이 여성 지도자들은 ‘마지(Maji, 물)’라 불리는 영험한 액체가 총알을 막는다는 믿음을 확산시켰고, 이는 식민 통치의 공포를 신앙으로 무력화시키는 전략이었다.
그들은 마을마다 순회하며 전통 제례를 열고, ‘마지 의식’을 통해 민중을 각성시키는 영적 지도자로 기능했다.
이 운동은 단순한 전쟁을 넘어서, 초부족적 연대를 촉진하는 공동체 중심의 문화적 반란이었다.
마지마지 여성 연합은 당시 부족 간 갈등을 잠재우고, 공통의 적에 대한 집단의식과 저항 정서를 전파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들은 군사 전략을 짜거나 무기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공동체 내부의 심리전, 정체성 강화, 의식의 공유를 통해 저항의 뿌리를 내리게 한 존재였다.
특히 그들의 활동은 전통 종교와 민족 정신을 지배 도구가 아닌 저항의 도구로 재구성했다는 점에서 식민 통치자들에게도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졌다.
이처럼 협상과 중재, 민속 문화와 신앙을 통한 지도력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정치나 군사 중심의 리더십과는 다른 차원의 힘이었다.
이 여성 리더들은 전쟁을 피하고자 했지만, 굴복하지 않았으며, 침묵 대신 공동체의 목소리를 키우는 선택을 했다.
그들의 지도 방식은 폭력이 아닌 문화와 의식을 무기로 삼았고,
이는 21세기에도 유효한 ‘평화적 저항의 모델’로 재조명받고 있다.
4. 지역 공동체를 조직한 전략가 여성들
19세기 아프리카 해방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자주 잊히는 존재는, 전장에 나서지 않은 여성들이다.
하지만 실제로 저항의 기반을 만든 것은 ‘보이지 않는’ 여성들의 조직력과 결속력이었다.
그들은 공동체를 굳건히 지탱하고, 전투를 준비하는 인프라를 운영하며, 전사들의 배후에서 저항 정신의 불씨를 지킨 전략가들이었다.
이 여성들은 군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전쟁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존재 덕분이었다.
무기를 만드는 기술자는 전투에 나가지 않았고, 식량을 재배하는 손길도 총을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없었다면 어떤 저항도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는 그 여성들을 ‘보이지 않는 실전 지휘관’, ‘전장을 설계한 설계자’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마카다 여사(Makeda of Sierra) – 여성 비밀조직 운영자
마카다 여사는 시에라리온 지역에서 활동했던 여성 중심의 지하 저항조직의 핵심 리더로 알려져 있다.
19세기 후반, 영국 식민 행정은 서아프리카 해안 지역을 통제하고 내륙으로 세력을 확대해가던 중이었고, 이에 맞서 여성들이 비밀리에 정보를 공유하고, 행정 기관의 허점을 파악하는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마카다는 여성들만으로 구성된 전령 조직과 첩보망을 운영하며, 저항 세력에게 영국군의 병력 배치, 식량 창고 위치, 행정 문서 이동 경로 등을 전달했다.
그녀는 편지를 나뭇잎에 감추거나, 머릿수건의 자수 무늬로 암호를 남기는 등 창의적인 방식으로 정보 암호화를 실현했고, 이는 영국 행정망을 교란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녀가 남긴 말, “여성이 정보를 지배하면, 제국은 무너진다”는 표현은 단지 상징이 아니라 실제 전략적 위협으로 작용했던 현실의 반영이었다.
마카다는 정치적 지도자나 전사로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만든 네트워크는 전투보다 더 정밀한 ‘정보 전쟁’의 승리를 견인한 무기였다.
그녀의 활동은 후대에 큰 영향을 주었고, 시에라리온 독립운동 초기에도 ‘마카다 그룹’이라는 여성 지하조직이 그녀의 이름을 계승한 바 있다.
나지야 칼리파(Najia Khalifa) – 수단의 민속 예술가이자 민중 조직가
수단의 나지야 칼리파는 전쟁터 대신 마을 광장에서, 군복 대신 전통 드레스를 입고 싸운 여성이었다.
그녀의 무기는 총도 칼도 아닌 민요, 시, 구술문학이었다.
그녀는 침략자에 대한 분노와 고통을 노랫말과 시로 표현하며 민중의 감정을 하나로 묶는 문화 전사였다.
나지야는 특히 수단 북부 지역에서 시장과 축제, 종교 의례 현장을 돌며 저항의 메시지를 담은 공연을 펼쳤다.
그녀의 시와 노래는 단순한 예술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동체에게 “우리는 잊지 않는다”, “우리는 항복하지 않는다”는 감정을 심어주는 심리적 결속 장치였다.
당시 여성들의 문화 활동은 종종 식민 정부로부터 감시의 대상이 되었으며, 나지야의 노래는 **‘금지된 가사 목록’**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에 굴복하지 않았고, 공연 장소를 이동하거나, 가사를 은유와 상징으로 바꿔 표현함으로써 저항을 지속했다.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노래를 부르면 마을 전체가 움직였고, 그 울림은 전쟁보다 더 강한 연대를 만들어냈다.
그녀의 예술은 단지 문화적 저항이 아니라, 정체성과 주체성, 역사 기억의 계승을 위한 실천이었다.
이 여성들의 활동은 조용했지만, 지대했다.
그들은 전장 밖에서 공동체를 재정비하고, 무너지지 않도록 다독이며, 저항의 물결이 멈추지 않도록 에너지를 공급했다.
이러한 활동 없이는 해방운동도 없었다.
그리고 이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아프리카가 존재한다.
5. 왜 우리는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과거를 묻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이야기가 역사로 남고, 누구의 이야기는 지워지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아프리카 여성 리더들의 이름이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서구 중심의 역사 서술 방식과 식민주의적 시각이 기록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또한 전통 아프리카 사회 자체가 구술 중심 문화였고, 여성의 정치적 영향력을 '비공식적 권위'로 간주한 경우가 많아
공식 문서나 연대기에 이들의 이름이 등장할 기회가 적었던 것이다.
하지만 최근 아프리카 역사학자들과 여성학 연구자들은 구술사, 민속자료, 민화, 음악, 종교의식 속에서 여성 리더들의 존재를 복원하고 있다.
이제는 이들을 단순한 부차적 존재가 아닌, 당당한 역사의 주체로 기억해야 할 때다.
6. 오늘날의 여성 리더십에 주는 역사적 의미
19세기 아프리카 여성 리더들은 단순히 ‘남성의 대타’가 아니었다.
그들은 전통과 신념, 공동체와 정의를 위해 스스로 나섰고, 저항의 언어를 새로 쓰고, 리더십의 전형을 확장한 존재였다.
오늘날 아프리카를 비롯한 전 세계의 여성 정치인, 운동가, 사회 활동가들은 이들의 유산 위에서 활동하고 있다.
정치, 사회, 문화, 군사, 외교까지 모두 아우르는 여성 리더십의 역사는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그들의 이야기는 단지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어떤 리더십을 상상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질적인 영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