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역사 속 인물 탐구

중세를 밝힌 여성들, 이슬람 과학계의 숨은 별들

지아니13 2025. 5. 10. 15:25

1. 중세 이슬람, 왜 과학의 황금기였을까?

중세 유럽이 암흑기를 지나던 시기, 이슬람 세계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었다. 8세기부터 13세기까지, 바그다드에서 코르도바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서 과학, 의학, 수학, 철학, 천문학이 눈부시게 발전했다.
이 시기는 흔히 ‘이슬람의 황금기(Golden Age of Islam)’로 불리며, 알-카와리즈미의 대수학, 이븐 시나의 의학 백과, 알하이탐의 광학 이론 등이 바로 이 시기의 산물이다.

이러한 학문적 도약은 지식에 대한 개방성다양한 출신의 학자들을 포용한 사회 구조 덕분이었다.
무슬림이든, 유대인이든, 기독교인이든 학문을 위한 연구와 번역, 교육은 사회적으로 장려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 속에서 조용히 등장한 이들이 바로 여성 과학자와 의사들이었다.

2. 여성도 지식의 장에 참여할 수 있었던 사회

중세를 밝힌 여성들, 이슬람 과학계의 숨은 별들

중세 이슬람 사회는 흔히 남성 중심 사회로만 인식되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유연하고 포용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이슬람교 초기에는 여성의 학문 활동에 대한 명확한 금지 규정이 없었고, 오히려 **예언자 무함마드(PBUH)**가 남녀 모두에게 지식 습득을 장려한 기록이 꾸란과 하디스에 다수 남아 있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아내였던 **아이샤 빈트 아부 바크르(Aisha bint Abu Bakr)**는 대표적인 여성 학자이자 하디스 전승자였으며, 그녀를 통해 전해진 지식은 수백 가지에 달한다.
뿐만 아니라, 8세기부터 11세기까지의 기록에서는 문학, 법학, 의학, 종교, 천문학 분야에서 활동한 여성 학자들이 존재했다는 증거가 일부 지역 문헌과 전승을 통해 확인된다.

병원에서의 여성 참여: 공간과 역할의 분리 아닌 확장

당시 중동 전역에서 운영되던 **바마리스탄(Bimaristan)**이라는 공공병원에는 여성을 위한 독립 진료 공간과 병동이 존재했다.
이 병동에서는 여성 간호사와 여성 의사가 함께 배치되어, 남성과 여성 환자가 구분된 채 진료를 받는 시스템이 운영되었다.

이슬람 사회는 남녀 접촉에 대한 종교적 민감성이 있었기 때문에, 여성 환자의 진료를 위해 여성 의료인의 존재가 더욱 필요했고, 이는 자연스럽게 여성 의사와 의료인의 육성을 촉진하는 환경을 제공했다.

특히 바그다드, 다마스쿠스, 카이로, 코르도바 등 대도시의 병원에서는 여성 의료인이 출산, 소아 질환, 부인과, 간호, 외상 처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으며, 이들을 지도하고 교육하는 여성 선배들도 존재했다.
이러한 시스템은 단순한 예외가 아니라, 제도화된 여성 의료인력의 역사적 기초였다.

마드라사와 여성 학자들: 지식 생산의 동등한 주체

당시의 이슬람 교육 기관인 **마드라사(madrasa)**는 일반적으로 남성 중심이었으나, 일부 지역에서는 여성도 특정 과목이나 분야에 한해 참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여성이 마드라사 밖에서도 비공식적으로 ‘지식인 공동체’를 형성하고 활동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중세 다마스쿠스의 학문가문에서는 여성들이 자택에서 하디스와 문학을 가르치는 ‘여성 학술 모임’을 주도하기도 했으며, 이집트와 북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는 여성 이슬람 법학자가 공개강연을 열기도 했다.

또한 이슬람 세계에는 **다언어 번역을 지원하는 번역국(Bayt al-Hikma)**과 같은 기관이 있었는데, 이곳의 활동에 여성 번역자와 필경사가 참여했다는 단편적인 문헌도 존재한다.
특히 아랍어-페르시아어, 히브리어-아랍어 번역 작업에는 여성 유대인과 무슬림 여성 학자가 협업한 사례도 전해진다.

여성의 학문 활동, 유럽과의 비교에서 더욱 돋보이다

같은 시기 유럽에서는 여성의 공식적인 교육이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다.
교회 중심의 지식 체계에서는 여성의 교육은 거의 금기였으며, 의학이나 천문학, 수학 등 자연과학에 여성이 접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반면 중세 이슬람 사회는 여성에게 제도권 외부이긴 하지만 일정 수준의 학문 활동과 지식 습득을 허용하고, 실제로 여성 의료인과 학자를 배출한 사회였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이슬람 사회는 당시 기준으로 상대적으로 진보된 지식문화와 유연한 교육 태도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남녀 완전 평등의 시대였다는 뜻은 아니지만, 최소한 여성이 능력과 의지를 갖고 있으면 지식의 장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가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후대 이슬람 사회가 점차 보수화되며 사라진 기회였고, 동시에 우리가 재조명해야 할 문화적 자산이다.

3. 여성 의사들의 실제 활동 기록들

중세 이슬람 문명은 단지 철학과 수학에서만 우수했던 것이 아니다.
당시 이슬람권은 의학 분야에서도 매우 선진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었으며, 특히 병원(Bimaristan)의 개념과 공공 의료 시스템을 확립한 문명으로 손꼽힌다.
그리고 이 체계 속에서 여성 의사들의 존재는 실질적이면서도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바마리스탄(Bimaristan)**은 단순한 치료소를 넘어서 현대적인 의미의 병원 기능을 수행했던 기관이었다.
이곳에는 의학 교육, 약제 조제, 장기 입원, 수술실, 진단실, 정신과 병동까지 존재했으며, 특히 일부 바마리스탄은 여성 병동과 여성 전담 의료진을 별도로 두는 운영 방식을 도입했다.

이는 이슬람의 사회문화적 규범과 의료적 필요성이 맞물린 결과였으며,
그로 인해 여성 의사와 조산사, 간호인의 필요성이 제도적으로 인정되고 육성될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되었다.

바그다드 병원의 외과의사, 알라 알-샤이자니

10세기 바그다드에 위치한 대형 병원에서 활동했던 **알라 알-샤이자니(Al-Shayzani)**는 여성 의사 중에서도 매우 드물게 외과 분야에서 활동한 사례로 기록에 남아 있는 인물이다.
그녀는 단순한 진료가 아니라 수술 보조는 물론, 직접 외과적 처치까지 수행한 능력을 갖춘 전문가였으며, 특히 산과 수술과 관련한 절차에서 높은 숙련도를 보였다.

그녀의 이름이 남아 있는 이유는, 당시 병원을 후원하던 왕실이나 귀족 가문과의 관련성 덕분으로 보이며, 그녀는 바그다드 병원 내에 여성만을 위한 독립 진료소를 운영하며 의료 자문과 교육도 병행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단순히 예외적 사례가 아니라, 여성이 실제 의료현장에서 책임 있는 역할을 맡았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근거다.
중세 여성 과학자나 의학자의 이름이 역사에 드러나는 경우가 거의 없음을 고려할 때, 그녀의 존재는 더욱 귀중하다.

페르시아의 ‘라지아’와 궁중 여성 진료 시스템

또 다른 기록은 **페르시아 지역에서 활동한 여성 의사 '라지아(Raziya)'**에 대한 언급이다.
당시 왕실 내 여성을 진료할 수 있는 이는 남성 의사가 아닌, 신분이 보장된 여성 의료인이어야 했기에, 왕실 여성들의 건강을 담당하는 전속 여성 의사가 존재했다.

라지아는 왕비와 궁녀들의 건강관리, 출산 관리, 허약 질환, 심신 안정을 위한 처방 등을 전담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녀의 이름은 한 왕실 의학 기록에 간략히 언급되어 있다.

그 외에도 일부 여성들은 남성 의사의 지도를 받아 조산, 유산 후 처치, 산욕기 관리 등 특화 분야에서 진료를 수행하며,
때로는 자녀나 여동생에게 의술을 전수하는 구술 교육 시스템을 통해 여성 의료 지식의 지속적 전승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여성들이 주력한 분야: 산과, 부인과, 소아과, 외상

기록상 중세 이슬람 여성 의사들은 특정 분야에 강세를 보인다.
이들이 활동했던 대표적 영역은 다음과 같다.

  • 산과 및 조산: 출산과 관련한 모든 진료, 조산 및 산후 처치
  • 부인과 질환: 생리불순, 생식기 질환, 여성 호르몬 장애 등
  • 소아과 및 육아 관련 질환: 유아기 발열, 장염, 기침, 간질 등
  • 외상 및 골절: 농촌 지역에서 주로 활동한 여성 외상 치료자들이 존재

당시 의학 문헌에서 여성 의료인을 언급한 부분은 비록 많지 않지만, **"섬세하고 손재주가 좋으며, 환자의 감정 상태를 잘 살핀다"**는 평이 자주 등장한다.
특히 여성 환자들이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느끼고 더 정확한 진술을 했다는 점에서, 여성 의사의 존재는 치료의 질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존재 자체가 가진 상징적 의미

그 수는 적고, 기록은 희박하지만, 중세 이슬람 사회에서 여성 의사가 활동했다는 사실 자체는 중요한 문화적 의미를 지닌다.
이는 단순한 이례적 사건이 아닌, 체계 안에서 여성도 의료 전문가로 활동할 수 있었던 구조와 시도가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중세 유럽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앞선 여성 의료 활동의 기록은, 이슬람 문명 속에서 지식과 실천의 균형을 추구한 결과물이자, 여성의 전문직 진출 가능성을 입증한 역사적 단서다.

이제 우리는 이들의 이름을 더 많이 찾아내야 한다.
기록되지 않은 이들까지 포함해, 중세 이슬람의 병원 곳곳에는 여성의 지성과 손끝이 남겨놓은 흔적이 지금도 숨 쉬고 있다.

4. 여성 천문학자, 번역가, 수학자의 흔적

중세 이슬람 세계는 단순히 의학에만 능했던 문명이 아니다.
당시의 지식 체계는 철학, 수학, 천문학, 광학, 기하학, 번역학 등 다양한 학문이 서로 얽혀 유기적으로 성장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다학제적 분위기 속에서 여성 또한 단순한 학습자에 그치지 않고, 창조자이자 전달자, 실무자, 후원자로서의 역할을 조용히 수행하고 있었다.

물론 당시 여성의 이름이 공식 과학사에 길이 남는 일은 드물었다.
하지만 중세 이슬람 문헌과 지방 기록, 유럽 및 히브리어 문서의 부차적 기술을 통해 우리는 여성 과학자들의 조각난 흔적들을 추적할 수 있다.

카라우인 대학교를 설립한 여성, 파티마 알-피흐리

9세기 모로코 페즈에서 활동한 **파티마 알-피흐리(Fatima al-Fihri)**는 중세 이슬람 여성 지성의 상징적 존재다.
그녀는 부유한 상인의 딸로 태어나, 아버지의 유산을 바탕으로 세계 최초의 학위 수여형 대학 중 하나인 ‘카라우인 대학교(University of al-Qarawiyyin)’를 설립했다.

직접적으로 과학 연구를 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그녀가 설립한 이 교육기관은 천문학, 수학, 철학, 의학 등을 포함한 종합 교육기관으로 성장했고,
이는 중세 이슬람 과학 교육의 중심축이자 유럽 르네상스의 사상적 기반이 된 번역운동의 거점 중 하나로 기능했다.

그녀는 자신이 교육을 받지 못했던 구조 속에서 **‘다른 여성들도 지식을 향유할 수 있도록 문을 연 선구자’**로 평가되며,
그 존재만으로도 중세 여성의 지성사에서 유례없는 상징성을 지닌 인물이다.

천문학 도구 제작에 참여한 여성 장인과 기록자들

12세기 이집트 카이로 지역에서는 천문 관측 도구인 아스트롤라베(astrolabe) 제작에 관여한 여성 장인의 이름이 남은 기록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알-우르파니야(Maryam al-‘Urfaniyya)’로, 동시대 유명한 아스트롤라베 제작자인 바누 무사의 제작서에 주석으로 언급된다.

그녀는 관측 도구 제작에 있어 정밀한 기하학 계산, 금속 가공, 숫자 눈금 조정 등의 기술적 공정에 관여했으며,
이는 단순한 기술 보조 수준이 아닌 당대 첨단 기기의 설계와 제작에 실질적으로 참여한 과학 실무자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비슷한 시기, 시리아에서는 천문 관측 기록을 필사하고 정리하는 여성 필경사들의 활동도 존재했으며, 일부 문헌에서는 “남성보다 정확하고 꾸준한 필사 솜씨”로 찬사를 받은 사례도 있다.

번역 운동의 숨은 주역, 여성 번역가들

이슬람 황금기의 지식 확산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건은 **‘번역 운동’**이었다.
그리스어, 라틴어, 시리아어, 산스크리트어, 히브리어로 된 고전 문서를 아랍어로 번역하는 이 작업은 학문 전반의 토대를 닦는 작업이었으며,
여기에도 여성의 이름 없는 기여가 존재했다.

특히 **알 안달루스(스페인 무슬림 지역)**에서는 유대계 여성, 무슬림 여성, 기독교 여성들이 다언어 번역 능력자로 고용되어 학문 전파에 실질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은 의학서, 수학서, 천문서, 철학서를 번역하거나, 원문 대조 검수를 맡는 등의 역할을 수행했다.

일부 문서에는 “라일라(Layla)라는 여성 서기관이 번역 과정에서 수학 용어를 보완했다”는 식의 간단한 기술이 남아 있으며,
공식 필경사가 아닌 ‘검토자’나 ‘도움 준 자’라는 명목으로만 등장하지만, 이는 당시 여성들이 지식 생산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활동하고 있었음을 방증한다.

과학의 전달자, 실무자, 후원자로서의 여성

중세 이슬람 사회에서 여성은 단순히 수학과 천문학을 배우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남성 학자의 작업을 정리하고 기록하며, 관측을 보조하고, 수업을 들으며, 나아가 딸과 제자에게 지식을 전수했다.

또한 귀족 여성이나 상류층 여성들은 도서관, 관측소, 학교 설립에 자금을 기부하거나, 특정 학자나 유파를 후원하는 후견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는 단순한 문화 후원이 아니라, 지식 전파와 보급에 있어 여성이 결정적인 인프라를 구축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그들의 존재는 학문 생태계의 필수 요소였다

비록 그들이 중심 무대에 서지는 않았지만, 과학 연구의 주변부에서 실질적인 움직임을 이끈 이들이 바로 중세 이슬람의 여성들이었다.
직접 이름을 남긴 사례는 적지만, 그들이 없었다면 아랍어 과학 문명이 유럽으로 건너가는 다리도, 학문이 뿌리내릴 교육 환경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이름은 작고 희미하게 남아 있지만, 그 손끝의 기록과 보조, 설계와 후원은 오늘날 우리가 서양 중심의 과학사에서 간과했던 중요한 균형추다.

5. 왜 우리는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왜 이 여성 과학자들의 이름은 대부분 낯설까?
그 이유는 단순하다. 기록의 왜곡과 선택적인 역사 서술, 그리고 근대 이후 학문사가 유럽 중심으로 재편되며 이슬람 여성 지식인의 자취가 지워졌기 때문이다.

또한 중세 이슬람 사회 자체도 점차 보수적 종교 해석으로 회귀하면서, 여성의 공적 참여가 줄어들었고, 남성 중심의 학문체계가 강화되면서 기록에서 여성의 이름은 점점 사라졌다.

한편으로는, 여성 과학자들 스스로가 집단 안에서 ‘이름 없는 전문가’로 남기를 선택했거나, 문헌에 자신의 공을 드러내는 것을 꺼렸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기에 현대의 학문사는 기록되지 않은 여성들의 공백을 채우는 작업을 시도해야 한다.

6. 이슬람 여성 지성사, 오늘날에 주는 의미

중세 이슬람의 여성 과학자와 의사들은 단지 역사적 인물 그 이상이다.
그들은 오늘날 여성의 STEM(과학, 기술, 공학, 수학) 진출을 장려하는 상징, 그리고 이슬람 문화권에서 여성 교육과 연구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전통을 증명하는 존재다.

그들의 이름은 낯설고 희미하지만, 그들이 남긴 학문과 실천은 수백 년을 거쳐 지금 우리에게 도달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 이름 없는 과학자들을 다시 호명해야 한다.
그들의 자취는, 오늘의 여성 과학자들이 딛고 선 오래된 바닥이자, 우리가 복원해야 할 지성의 또 다른 역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