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보급에 기여한 무명의 학자들 – 잊혀진 지식인의 헌신을 다시 보다
1. 한글은 어떻게 전국으로 퍼졌을까?
한글, 혹은 훈민정음은 세종 28년(1446년) 반포된 이래 ‘백성을 위한 문자’라는 명분 아래 창제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자 하나를 만들었다고 해서 곧장 그 문자가 전 국민에게 보급되고, 일상어로 정착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훈민정음의 창제는 국왕 주도의 정치적·문화적 선언이었지만, 그 문자가 실제 조선 전역의 백성들에게 퍼져 나가고, 일상적으로 쓰이기까지는 수십 년, 아니 수백 년의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세종대왕은 한글이 백성을 위한 문자임을 분명히 했고, 그에 따라 농서·약서·불경·법률 문서를 한글로 번역하려는 시도를 장려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조선 사회는 엄격한 유교 질서와 사대주의 사관에 기반을 둔 철저한 한문 중심 문화였습니다. 특히 사대부 계층은 한글을 ‘언문(諺文)’이라 부르며 천한 문자로 취급했고, 공적인 문서는 물론 사적인 교육에서도 이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팽배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환경 속에서 어떻게 한글은 전국으로 퍼져나갈 수 있었을까요?
바로 국가의 제도와 권위가 미치지 못하는 곳, 즉 지방과 민간, 사찰과 서당 같은 비공식 공간에서 활동한 이름 없는 실천자들 덕분이었습니다.
훈민정음 반포 이후 왕실은 여러 책자를 간행하며 한글 사용을 장려했지만, 그것이 자연스럽게 사회 전반으로 스며드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한글은 오히려 공적인 체계 바깥에서 서민과 여성, 종교계, 하급 관리 등에 의해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사용되며 확산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사찰에서는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신도들에게 전파했고, 민간에서는 여성들이 자녀 교육이나 가정문서 작성에 한글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일부 퇴직 관료나 향리들은 서당에서 아이들에게 한글을 병행해 가르치며, 한자보다 한글이 쉽고 실용적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런 움직임은 비공식적이었기 때문에 공식 문서나 역사 기록에 잘 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실제 한글이 보급된 경로를 따라가 보면, 지방 사찰, 서당, 시전 상인 집단, 여성 공동체 등을 중심으로 한글 사용이 활발했다는 사례가 수없이 발견됩니다. 『내훈』, 『여사서』 등 여성용 교양서가 한글로 작성되었고, 불교 경전과 민간 의서, 생활지침서 등이 한글로 번역되어 실용 문헌으로 유통되기도 했습니다.
한글은 왕실이 창제했지만, 그 보급의 핵심 주체는 이름 없는 지식인들, 무명의 실천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명예나 보상을 바라지 않고, 지식이 귀족의 전유물이 아닌 ‘모두의 도구’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가르치고, 번역하고, 퍼뜨렸습니다.
훈민정음이 진정으로 민중의 글자로 자리 잡게 된 배경에는 이처럼 하층민, 여성, 비정규 교육자, 사찰 승려 등 사회의 주변부 인물들이 중심이 된 집단적 노력이 있었습니다. 공식 교육기관에서 외면받았던 한글은, 오히려 비공식 교육과 생활 속 실천을 통해 ‘실용의 문자’, ‘생활의 언어’로 성장해간 것입니다.
이처럼 훈민정음이 조선 전역에 퍼지기까지의 과정은 단지 문자 확산의 역사가 아니라, 무명의 사람들을 통한 지식 민주화의 역사입니다. 그들은 역사책 속에 이름이 남아 있지 않지만, 한글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모든 국민이 자유롭게 읽고 쓸 수 있도록 만든 진짜 숨은 주역들이었습니다.
2. 이름 없이 기록된 한글 보급의 실무자들
훈민정음 해례본이나 조선왕조실록에는 창제 과정에 참여한 집현전 학자들의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정인지, 성삼문, 최항, 박팽년 등이 대표적이죠.
그러나 한글을 실제로 책으로 인쇄하고, 번역하고, 서민에게 읽히게 만든 인물들의 이름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같은 초기 한글 문헌들은 왕실 주도로 제작되었지만, 편찬과 인쇄에 참여한 각 지역 승려와 실무 학자들의 이름은 거의 빠져 있거나 단순히 "모 승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각 지역 사찰과 향교에서 한문 문헌을 언해하고, 구결을 붙이며, 한글을 쉽게 풀어 읽는 방식을 연구하고 보급했습니다.
이름이 남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의 공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기록을 남기지 않는 자리’에서 조선을 문자화한 진짜 실무자들이었습니다.
3. 언해본과 불경 번역, 지식의 다리를 놓은 사람들
조선에서 한글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계기 중 하나는 바로 ‘언해본’의 제작과 유통이었습니다. 언해본이란, 한문으로 된 문헌을 당대 백성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한글로 해석하고 풀어쓴 책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문자만 바꾼 것이 아니라, 개념과 어휘, 문맥까지 대중의 이해 수준에 맞춰 해석하고 설명한 지식 번역서였던 셈입니다.
언해본의 등장은 문자 사용의 귀족 독점을 무너뜨리고, 백성들이 실질적으로 지식에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든 혁신적 도구였습니다. 특히 유교 경전, 불교 경전, 역사서, 의학서, 농서, 천문지리서 등 다양한 분야의 핵심 서적이 언해 작업을 거쳐 출판되면서, 한글은 비로소 ‘읽는 문자’에서 ‘배우는 문자’, ‘쓰는 문자’로 기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언해 작업은 오늘날로 치면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문화 번역이자 교육 커리큘럼을 만드는 작업과도 같았습니다. 단순히 한자어를 음대로 풀어쓰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분석하고 문법적으로 재구성하며, 설명을 덧붙이는 고도의 지식 재구성 과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난이도 높은 작업을 수행한 이들은 대부분 불교 사찰의 승려, 말단 관청 관리, 그리고 이름 없이 실무를 맡은 하급 서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대개 이름조차 남기지 않았습니다. 책 말미에는 “통사(通事)”나 “언해자(諺解者)” 등의 직함만 간략히 기록되었을 뿐, 누가 어떤 내용을 어떻게 번역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들은 역사책 속에서 ‘사람’이 아니라 ‘기능’으로만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작업 없이는, 지식은 결코 민중의 손에 닿을 수 없었고, 한글 또한 권력의 도구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언해본 사례 중 하나는 바로 『석보상절(釋譜詳節)』입니다. 이 책은 세종대왕이 직접 지시하여, 수양대군(훗날의 세조)이 불경을 쉽게 풀이하여 제작한 불교 경전 언해본입니다. 단지 종교적 의미뿐만 아니라, 한글을 대중에게 노출하고 사용할 수 있게 만든 중요한 매체였던 것이죠. 『월인천강지곡』, 『월인석보』, 『능엄경언해』 등도 이 흐름에서 함께 언급되는 문헌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책들이 가능하려면 상상 이상의 번역 노동과 출판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방대한 불경을 해석하고, 글자를 다시 배열하고, 목판을 새기고, 인쇄하여 배포하기까지의 전 과정은 수십 명, 수백 명의 손을 필요로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실질적인 언해 작업을 담당한 승려들은 한문과 한글을 넘나드는 언어 능력은 물론, 경전에 대한 철학적 이해까지 갖추고 있어야 했습니다.
불교는 특히 문자 해석에 엄격하기 때문에 단순한 오역도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언해자들은 단지 언어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해당 경전의 의미와 맥락을 유지하면서도 백성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다시 구성해야 했습니다. 이는 단순 번역자가 아닌, 해석자이자 교육자, 실천적 지식인으로서의 역량을 요구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작업들은 서울이나 중앙의 큰 사찰뿐만 아니라, 전국의 지방 사찰에서 꾸준히 이루어졌고, 그 흔적은 각지에서 발견되는 지방판 언해본과 주석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함경도, 전라도, 강원도 등지의 지방 사찰에서도 동일한 경전을 지역 방언과 문화에 맞게 다시 해석하여 전달하는 작업이 있었습니다. 이는 한글이 단순한 문자체계가 아니라, 지역 문화와도 융합되며 확장된 언어 공동체의 기반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한글의 민중화는 바로 이들 무명의 언해자들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오직 ‘모두가 읽을 수 있는 세상’을 위해 조용히 붓을 들고 목판을 새기며, 밤을 새워 경전을 옮겨 적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들의 이름을 알지 못해도, 그들이 남긴 ‘작업의 흔적’을 통해 그 존재를 인식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지식의 다리를 놓았던 그 무수한 손길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한글로 책을 읽고, 지식을 나누고,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4. 지방 사찰과 서당에서의 한글 교육
조선 후기, 한글은 점차 백성들의 실생활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공식적인 교육 체계에서는 여전히 한문이 중심이었고, 양반층은 한글을 ‘여자들이나 배우는 낮은 문자’, 혹은 ‘언문(諺文)’이라고 낮춰 불렀지만, 사찰과 서당 같은 비공식 교육 공간에서는 오히려 한글이 활발히 가르쳐지고 실용화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교육 현장은 사회적 주변부에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문자 보급과 평등한 문해력 확산에 있어 중심적 역할을 한 지식의 거점이었습니다.
특히 사찰은 한글 교육의 숨은 본거지였습니다. 불교는 조선시대 내내 억압받았지만, 사찰은 여전히 지역 주민의 문화 중심지로 기능하고 있었습니다. 승려들은 불경을 한글로 번역해 신도들에게 가르쳤으며,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한글을 쓰고 읽는 법을 익히도록 했습니다.
『석보상절』, 『능엄경언해』, 『법화경언해』 등 다수의 불경 언해본이 사찰에서 제작되었고, 이를 통해 일반 신도와 특히 여성 신도들이 신앙을 통해 문자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단순한 종교 교육을 넘어서 **문자에 대한 접근성을 넓히는 ‘문화 확산 운동’**과 같았습니다. 문자로 경전을 읽는 행위는 곧 자신의 목소리로 경전을 낭독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고, 이는 기존에 글자를 접하지 못했던 이들에게 자기표현과 해석의 권리를 부여하는 강력한 교육적 경험이었습니다.
사찰은 지리적으로 고립된 곳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을 찾는 수많은 민중에게 ‘배움의 문’을 열어주는 역할을 묵묵히 수행했습니다.
한편, 민간 서당 역시 한글 보급의 중요한 채널이었습니다. 서당은 원래 사대부 가문 자제들이 유교 경전을 공부하는 장소였지만, 지역마다 형식과 목적은 조금씩 달랐습니다. 특히 퇴직한 관료나 향리, 혹은 학문을 닦은 유생들이 자발적으로 운영한 지역 서당에서는 한문뿐만 아니라, 한글로 기초적인 문해력 교육을 병행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아이들뿐 아니라, 지역의 여성과 노인, 농민들에게도 문자를 가르쳤습니다. 단순한 교육이 아니라, 삶에 필요한 편지 쓰기, 장부 기록, 서류 작성 등 실용문 중심의 한글 문해 교육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당시로선 매우 파격적이고 선진적인 교육 활동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교육자들은 역사 기록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공식적인 스승이 아니었고, 시험을 치러 출세한 학자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름 대신 ‘서당 훈장’, ‘향리 노인’ 같은 존재로만 지역의 구술 역사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해낸 일은 실로 위대했습니다.
문자를 몰랐던 백성에게 읽고 쓰는 힘을 주고, 언어를 통한 사고와 표현의 자유를 가능케 한 것, 그것은 단순한 교육이 아니라 존엄과 인권의 씨앗을 심는 일이었습니다.
특히 여성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일은 더 큰 의미를 가졌습니다. 조선 사회는 여성의 교육을 터부시했지만, 일부 개방적인 서당이나 사적 교육 공간에서는 딸들에게 내훈(內訓), 여사서, 소학언해 등을 통해 한글을 익히게 했고, 이를 통해 여성들 또한 가정 내에서 편지를 쓰고, 가계부를 기록하고, 자녀를 교육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지방 사찰과 서당은 '읽을 줄 아는 여성'을 양성한 최초의 문해 교육 현장이기도 했습니다.
한글이 ‘아랫사람의 글’이라는 인식이 강했던 조선에서, 이러한 교육 활동은 종종 조롱과 멸시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아랫사람들, 이름 없는 백성들, 교육받지 못한 여성과 아이들 사이에서 한글은 진정한 ‘실용문자’, ‘생활문자’, ‘생존문자’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문해의 확산은 이후 한글 소설의 유통, 여성 일기문학의 발전, 민간 의료서의 보급, 자수서적의 제작 등 다양한 실용 문화의 기반이 되며, 조선 후기 문해율 향상과 문화 민주화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토대가 되었습니다.
5. 여성과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친 조선의 교육자들
여성은 공교육의 대상이 아니었기에, 어머니나 조모, 또는 마을에서 글을 배운 몇몇 여성이 한글을 전수하곤 했습니다. 이는 ‘글방’이 아닌 부엌과 마루, 우물가, 자수틀 앞에서 이루어진 교육이었고, 그만큼 한글은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조선 후기 『여사서(女四書)』, 『내훈(內訓)』, 『소학언해』 등 여성 교육을 목적으로 편찬된 책은 대부분 한글로 쓰였고, 그 내용을 구술로 전해준 여성 스승들이 있었습니다. 이들 역시 문자 없는 시대에, 아이와 여성에게 언어의 날개를 달아준 조용한 개척자들이었습니다.
6. 우리가 이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한글은 세종대왕 혼자 만든 글자가 아닙니다. 그 뒤에는 수십 년, 수백 년에 걸쳐 글자를 실천하고 가르치고 퍼뜨린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그들의 이름은 문헌 속에 없고, 그림도 남아 있지 않으며, 후손조차 없을 수도 있지만, 그들이 없었다면 한글은 오늘날처럼 살아있는 글자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창제자’뿐 아니라 ‘보급자’, ‘실천자’를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이름 없이 조선을 읽히게 만든 그들의 노력은 지식 민주화의 시작이자, 문자 평등의 역사입니다.
그들의 자취를 되짚는 것은 단순한 역사 읽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어떤 사회를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의 시작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