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역사 속 인물 탐구

경성 거리의 여성 노동자들, 투쟁 속 사라진 이름들

지아니13 2025. 6. 14. 14:21

– 일제강점기, 가장 낮은 곳에서 외친 조선 여성들의 목소리

“공장 여공”이라는 말 뒤에 숨겨진 얼굴들

‘공장 여공’이라는 말은 오랫동안 일제강점기 조선의 여성 노동자를 지칭하는 대표적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다섯 글자는 너무도 많은 것을 지우고, 단순화하고, 익명화해버립니다.

1. ‘여공’이라는 말은 직업이 아니라, 사회적 낙인이었다

‘여공’은 단순히 ‘여성 공장 노동자’를 뜻하는 명사처럼 보이지만, 그 말이 쓰이던 현실 안에서는 이미 여성에게 특정한 이미지와 계급, 그리고 차별의 구조가 덧씌워져 있었습니다.

  • ‘말을 잘 듣는 값싼 노동력’
  • ‘배우지 못한 계층’
  • ‘공장에서 기계처럼 일하다 결혼하면 사라지는 존재’

여공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여성 노동자를 인격적 존재가 아닌 기능적 자원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언어였습니다.
그 결과, 그녀들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고, 행동은 주목받지 않았고, 목소리는 곧잘 ‘소란’이나 ‘감정적’이라는 말로 묻혔습니다.

2. 수천 명의 여성들이 있었지만, 기록은 “여공 몇 명”이었다

역사적 기록을 보면, 수천 명이 근무했던 방직공장이나 담배공장 파업이 단 두 줄로 요약됩니다.

“여공 수십 명이 시위에 나섰으며, 일부는 퇴사 후 해산하였다.” (1929년 某 신문 기사 중)

이 문장에서 우리는 이름이 없습니다. 얼굴이 없습니다. 동기가 없습니다.
왜 시위했는지, 어떤 환경이었는지, 그 중 누구는 고발당하고 누구는 끝까지 남았는지—
그 어떤 것도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정보 누락이 아니라, 존재의 부정에 가까운 삭제입니다.
그리고 이 삭제의 메커니즘은 매우 ‘조용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녀들이 “여공”이라는 이름 하나로 묶인 순간,
그들의 개별적 이야기는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3. 그들은 '여공'이 아니라, ‘이름 있는 사람’이었다

‘여공’이라는 말이 그녀들을 단순히 값싼 노동력이나 산업 인프라의 구성요소처럼 다뤘지만,
실제로는 매일의 삶을 짊어진 누군가의 딸이자 동료였고, 지식과 감정을 가진 주체적인 존재였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여성은 공장에서 일하며 동생 학비를 벌었고,
어떤 여성은 퇴근 후 야학에서 한글을 배워 주변 동료에게 글씨를 가르쳤으며,
어떤 여성은 감시를 피해 가짜 이름으로 노동운동회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그녀들은 단순한 노동자가 아니라,
식민지 조선 사회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저항과 연대를 실천한 시민이었습니다.

4. ‘여공’이라는 말이 지우는 것들

  •  이름: 우리는 그녀들의 이름을 거의 모릅니다. 실명은 기록되지 않았고, 다수는 통계의 숫자로만 존재합니다.
  •  이야기: 노동 조건, 동료와의 관계, 저항의 동기 등은 '생략'되어 버립니다.
  •  주체성: 그녀들은 말할 기회를 갖지 못했고, 대신 남성 중심 언론과 관료 기록이 그녀들을 ‘묘사’했습니다.
  •  의미: ‘여공’이라는 말은 ‘임시직’, ‘단순직’이라는 편견을 강화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이 말은 단지 역할이 아니라, 존재를 단순화하는 도구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 “여공”이라는 말 대신, “여성 노동자”, “식민지 산업사회의 주체적 일원”, 혹은 **“이름 있는 여성들”**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 ‘누군지는 몰라도 분명히 존재했던 여성들’을 복원하는 콘텐츠와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 학교, 블로그, SNS에서 ‘여공’이라는 단어의 역사적 맥락을 비판적으로 돌아보는 시도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결론:
‘공장 여공’이라는 다섯 글자 안에는
수많은 이름과 이야기, 고통과 저항, 그리고 인간다운 삶에 대한 열망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 단어를 다시 말할 때,
그 속에 잊힌 사람들의 얼굴을 함께 불러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경성 거리의 여성 노동자들, 투쟁 속 사라진 이름들

여성 노동자, 거리로 나서다

일제강점기의 조선 사회에서 여성은 정치의 주체도, 경제의 핵심도 아니라고 여겨졌습니다.
‘집안 살림을 보조하는 존재’, ‘감정적이고 나약한 성별’이라는 사회적 편견이 팽배하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인식을 뒤흔든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공장에서, 가내수공장에서, 거리에서 싸움을 시작한 여성 노동자들입니다.

이들은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조용히 시작했지만, 점차 자발적인 조직자, 전략가, 연대의 중심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들이 거리로 나섰을 때, 그것은 단지 ‘파업’이나 ‘항의’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삶의 조건을 바꾸겠다는 선언이자, 침묵을 깨겠다는 결단이었습니다.

“기계보다 싸게 일하는 몸”이 된 현실

당시 경성 일대 여성 노동자들의 현실은 처참했습니다.

  • 하루 12~14시간 노동
  • 평균 남성 노동자 대비 40~50% 수준의 임금
  • 생리휴가나 휴게시간 없이 ‘기계처럼’ 움직이는 일상
  • 여성이라는 이유로 상사의 괴롭힘과 성폭력에 노출

이들은 “기계보다 싸게 일하는 몸”으로 취급됐고,
불만을 말하는 순간 “문제 인력”으로 분류되어 해고당했습니다.

그러나 공포와 침묵이 전부였던 공간에, 처음으로 ‘말’을 꺼낸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왜 우리는 말하면 안 되지?”
“왜 우린 밤 11시에 퇴근해도 제대로 못 자고 다시 나와야 하지?”

그 단순한 물음에서 시작된 작은 불씨가, 경성의 거리로 번져 나갑니다.

실제 사례: 경성 방직 여공 파업 (1923년)

경성의 한 방직공장에서, 여성 노동자 수십 명이 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조용히 상급자에게 진정서를 냈지만 묵살당했고, 이후 서로의 손을 잡고 공장 앞에서 시위를 벌였습니다.

경찰은 즉각 개입했고, 대부분은 곤봉에 맞고 끌려갔지만
이 파업은 이후 다른 공장으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퍼뜨리는 계기가 됩니다.

  •  중요한 점은, 이 파업의 핵심 기획자도 여성들이었다는 점
  • 그들은 야학을 함께 다니던 사이였고, 일터에서 생긴 불만을 일기장에 모아두고 정리하다
  • 하나의 문장을 만들어냈습니다:
    “우리가 땀을 흘렸다면, 그 대가는 사람답게 받자.”

이 작은 문장이 벽에 붙었을 때, 파업은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거리’는 그녀들의 마지막 선택이자 최선의 무대였다

여성 노동자들은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장 안에서는 말할 수 없었고, 가정에서는 이해받기 어려웠으며,
신문과 잡지는 그녀들의 존재를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들은 자신의 몸을 내세워 말했습니다.
말하지 못한 고통을, 침묵당한 목소리를
깃발 없이, 피켓 없이, 걷고 서 있는 몸 자체로 말했던 것입니다.

  • 시청 앞 도로
  • 공장 정문
  • 우편국 앞 사거리
  • 교회 앞 골목

그녀들이 섰던 자리는 모두 역사의 마이크로폰이었습니다.

파업은 단지 ‘분노’가 아니었다 – 그것은 전략이었다

우리는 종종 여성 노동자의 투쟁을 감정적 반발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녀들의 투쟁은 치밀하고 전략적이었습니다.

  •  야학과 교회를 통해 정보를 교환하고,
  •  파업 전 진정서나 요구안을 문서로 작성하며,
  •  친구들과 역할을 나눠 시위, 언론 제보, 경찰 대응을 분담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감정 폭발이 아닌,
노동 환경 개선이라는 명확한 목표와 구조적 대응 방식을 갖춘 사회운동이었습니다.
그 중심에 서 있던 것이, 다름 아닌 여성 노동자들이었다는 점은
우리가 ‘역사 속 여성’에 대해 품는 편견을 다시 돌아보게 만듭니다.

결론
‘여성 노동자’는 억압의 대상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경성의 거리에서, 공장의 문턱에서,
누구보다 먼저 변화의 목소리를 냈던 저항의 선두주자였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녀들을 ‘누구의 딸’이 아닌
역사의 이름으로 불러야 할 독립된 주체로 기억해야 합니다.

왜 우리는 그녀들의 이름을 모를까?

경성의 거리에서 피와 땀을 흘리며 노동하고, 거리에서 파업을 외치며 저항했던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
우리는 그들의 존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우리는 그녀들의 ‘이름’을 거의 알지 못합니다.

이름을 알 수 없다는 것은 단순한 정보의 누락이 아닙니다.
그것은 역사로부터의 배제이자, 사회적 존재의 말소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녀들의 이름을 모를까요?

1. 역사 기록의 기준 자체가 ‘이름’을 허락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에서 기록이란 권력의 도구였습니다.
총독부가 남긴 통계자료와 신문 기사들은 대부분 ‘보고할 가치가 있는 정보’만 기록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가치의 기준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지식인이거나,
  • 남성이거나,
  • 관직자거나,
  • 교육을 받았거나,
  • 사회운동을 ‘정치적 맥락’에서 벌였을 때

반면 여성 노동자들은 이 모든 조건에서 제외되었습니다.

  • 이름은 고용 명부에조차 번호로 기재되었고,
  • 파업 참가자는 “여공 몇 명”으로 뭉뚱그려졌으며,
  • 신문 기사에는 “현장 소란”, “불만을 품은 여자 인부”라는 식으로 처리되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인쇄의 문제나 편집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록 권력 자체가 그녀들을 배제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2. 그녀들은 ‘이중의 침묵’을 강요당했다

여성 노동자들은 **‘식민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그리고 동시에 ‘여성’이라는 이유로 두 번 침묵을 강요당했습니다.

  • 첫 번째 침묵: 일제는 조선인 노동자의 불만을 범죄로 규정하고 기록을 삭제했습니다.
  • 두 번째 침묵: 조선 사회는 여성의 공적 발화를 ‘수치’로 간주하며 억압했습니다.

예컨대, 어떤 여성 노동자가 파업을 주도했다면,
그녀는 일본 경찰에게 고발당할 뿐만 아니라
고향과 가족, 조선인 공동체로부터도 ‘버릇없는 여자’, ‘집안 망신’이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그녀들은 자신을 지우는 방식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파업 후 이름을 바꾸거나, 고향을 떠나거나, 기록을 남기지 않고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그녀들의 생애는 익명화되어야만 생존할 수 있었던 시대였던 것입니다.

3. ‘이야기’는 있었지만, ‘역사’는 되지 못했다

어떤 여성들은 자신이 겪은 일을 야학 동료에게 구술로 전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짧은 일기를 남겼고, 누군가는 친구의 편지로 마음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공식적인 기록이나 역사로 전환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 글을 쓸 기회가 없었고,
  • 글을 써도 발표할 공간이 없었고,
  • 설령 글을 남겨도,
    그것을 ‘역사적 가치가 있는 문서’로 보려 하지 않는 문화가 문제였습니다.

기록은 있었지만, 기록된 것으로 취급받지 못했던 것.
이것이 가장 큰 비극입니다.

4. 지금도 우리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 속에 살고 있다

더 무서운 건, 이러한 익명의 구조가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 도시의 발전, 한 공장의 성장, 한 시대의 전환점 뒤에는
늘 수많은 무명의 손과 노동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그들에게 질문하지 않습니다.
“그 일은 누가 했나요?”
“이 변화의 뒤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었나요?”

그리고 그렇게, 우리는 또다시
이름을 기록하지 않은 시대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권리이자 책임이다

“왜 그녀들의 이름을 모를까?”라는 질문은 결국
**“우리는 누구의 목소리를 기록해왔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 그녀들의 이름은 역사책에 남아 있지 않지만,
  • 그녀들의 흔적은 도시의 거리, 공장의 흔적, 공동체의 입소문 속에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첫걸음은 아주 단순합니다.

  • 이름 없이 사라진 이들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는 것
  •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는 것
  • 그리고 그녀들을 다시 역사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이름은 불리는 순간 다시 존재한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그녀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주는 일이다.

노동이 곧 투쟁이던 시대

오늘날 우리가 노동을 말할 때, 그것은 보통 생계의 수단이자, 자아 실현의 방식으로 받아들여집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조선의 여성들에게 ‘노동’은 그런 말로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노동은 곧 생존이었고, 동시에 항상 싸움의 시작이자 끝이었습니다.

단순히 땀 흘리는 일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수단,
그리고 식민지 체제와 가부장적 질서 모두에 대한 저항의 행위였던 것입니다.

1. “일한다”는 것 자체가 위협으로 간주되던 여성들

그 시기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밖에서 일하면 안 되는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먹고살기 위해, 동생 학비를 위해, 병든 부모를 위해 공장에 나가야만 했죠.

그 자체로 도덕적 비난과 편견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 “집에서 살림이나 하지 왜 공장에 나가냐”
  • “밤늦게까지 돌아다니는 여자는 행실이 나쁘다”
  • “아무 직업도 못 가진 남성의 자리를 여자가 빼앗는다”

이처럼 ‘노동을 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녀들은 이중의 불신과 억압을 견뎌야 했고,
결국 노동 자체가 곧 투쟁의 시작이 되는 현실 속에 놓이게 됩니다.

2. 노동의 조건은 곧 저항의 이유가 되었다

그녀들이 몸담은 일터는 인간다운 조건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 아침 7시에 시작해 밤 10시까지 계속되는 교대 없는 장시간 노동
  • 휴게시간은 없고, 화장실도 마음대로 가지 못하는 환경
  • 실내는 먼지로 가득하고, 손은 늘 화학약품에 노출
  • 임금은 말 그대로 최저가 아닌 ‘처참한 수준’

이런 환경 속에서 침묵은 고통을 연장시키는 일이었고,
말을 꺼내는 순간은 ‘싸움’을 의미했습니다.

결국 이 시기의 노동은 그 자체가
**“말하지 않으면 죽는 노동”, “말하면 해고되는 노동”**의 이중구조였고,
그래서 여성 노동자들의 일상은 늘 저항과 생존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것이었습니다.

3. '일한다'는 선언이 곧 ‘정치적’ 행위였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여성들이 모여 함께 일하고
불합리한 것을 말하는 일은 당연한 권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그것이 곧 정치적 사건으로 번역되었습니다.

  • 1920~30년대 총독부는 여성 노동자들의 자치적 모임조차 **‘불온 조직’**으로 간주
  • 노동자끼리 야학을 하거나 식사를 나누면, **‘비밀결사 혐의’**로 검거
  • 임금 인상 요구는 치안유지법 위반,
  • 파업은 사회질서 교란 및 치안 위협 행위

즉, 여성들이 ‘노동자’로서 정당한 목소리를 내는 순간
그들은 자동으로 ‘감시의 대상’, ‘위험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노동’은 먹고살기 위한 일이었지만,
그것을 계속한다는 것 자체가 곧 **위험을 감수하는 ‘정치적 실천’**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4. 침묵하지 않는 노동은 곧 투쟁이었다

침묵하면 죽고, 말하면 지워지는 시대.
그 속에서도 여성 노동자들은 스스로에게 작은 권리를 허락하는 방식으로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 병가를 허락받기 위한 편지를 쓰는 것
  • 동료의 해고에 항의해 공장장에게 함께 찾아가는 것
  • 야학에서 읽고 배운 내용으로 ‘왜 이런 임금을 받는지’ 토론하는 것
  • 교회에서 모여 시위 구호를 연습하는 것
  • 신문사에 손편지를 써서 “우리를 봐달라”고 외치는 것

이 모든 것이 단순한 일상의 행동이자,
동시에 거대한 권력 구조를 향한 저항의 형태였습니다.

결론

일제강점기의 여성 노동자에게 ‘노동’은 단순히 생계를 위한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존재를 지키기 위한 전선이었고,
신체적·정신적으로 견디기 위한 가장 구체적인 싸움의 현장이었습니다.

그 시기, 노동을 했다는 것은 이미 싸우고 있었다는 의미였습니다.
노동은 곧 투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들은 그 투쟁의 맨 앞줄에, 이름 없이 서 있었습니다.

그녀들이 남긴 흔적은 지금 어디에?

그녀들은 이름 없이 거리에서 사라졌고, 기록되지 않았으며, 공장 명부에서조차 ‘숫자’로 불렸습니다.
하지만 그녀들이 남긴 작은 흔적들, 그리고 그 흔적이 만들어낸 사회적 파문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 곁에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기념비나 동상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들의 흔적은 제도, 말, 장소, 기억, 공동체의 문화 속에 녹아 존재하고 있습니다.

1. 장소로 남은 흔적 – 골목, 공장, 철문 너머

경성 시절 여성 노동자들의 활동 무대였던 많은 공장들은 지금은 재개발되었거나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몇몇 장소는 그 흔적을 간직한 채 기억의 공간으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 서울 영등포 지역의 방직 공장 터: 당시 여성 노동자가 대거 고용되었던 주요 현장. 일부 공장 건물은 문화재나 지역 박물관으로 전환되어 노동운동 관련 전시를 엿볼 수 있음.
  • 종로 일대의 옛 봉제 골목: 여성 수공업자들이 일했던 공간. 지금도 낡은 상가 간판과 야간학교 흔적이 남아 있음.
  • 경성역(현 서울역) 근처의 우편취급소 자리: 1930년대 여성 노동자들이 연대 파업을 벌였던 주요 거점 중 하나.

이러한 장소들은 직접적으로 그녀들의 이름을 담고 있진 않지만, 그들이 서 있었던 현실을 증명해주는 물리적 흔적입니다.

2. 제도로 남은 흔적 – 노동법, 여성노동 보호 규정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은 결국 제도 개선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변화의 결과가 우리에게 너무 자연스러워 보여서 당연하다고 느껴질 뿐입니다.

  • 근로기준법 내 여성 근로자 야간 노동 금지 조항
  • 산업안전보건법의 생리휴가 규정
  • 차별금지법 초안에 담긴 ‘성별 임금 격차 금지’ 조항

이런 제도들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녀들이 고통 속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쌓아올린 현장 경험과 저항의 기록들이 근거가 된 것입니다.

즉,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노동권’이라는 말 안에는
이름 없이 싸운 그녀들의 외침이 담겨 있는 셈입니다.

3. 말로 남은 흔적 – ‘여공’, ‘야학’, ‘노동자 시인’

당시 여성 노동자들이 남긴 언어, 혹은 그들을 지칭하는 단어들 역시
지금은 다양한 형태의 문화적 상징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 여공’: 단순히 ‘여성 공장 노동자’를 뜻하는 단어였지만, 지금은 저항과 연대, 1980년대 노동 운동의 상징어로 재해석되고 있음.
  • 야학’: 지식에 대한 갈망의 공간이자 조직과 연대의 시작점으로, 지금도 지역에서 청소년·이주민 교육의 이름으로 이어짐.
  • 노동자 시인’: 당시 여성 노동자들이 구술하거나 메모한 글들은 이후 시집, 극본, 다큐멘터리 대사로 채택되며 문화 예술로 남음.

그녀들이 남긴 말들은 단순한 과거의 언어가 아니라,
지금도 유통되고 있는 감정의 코드이자 연대의 가능성으로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4. 기억으로 남은 흔적 – 전시, 책, 운동 속에 새겨진 이름 없는 이름들

1990년대 이후 본격화된 여성사 연구노동사 재구성 작업은
그녀들의 실명을 알 수 없더라도, ‘존재했다’는 사실을 공공의 기억으로 복원하려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 “여공의 일기”, “침묵의 거리에서”, “빨간 작업복” 등의 책들이
    그녀들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역할을 해옴
  • 여성 노동운동 100주년 기념 전시에서는 익명으로 남은 여성들의 얼굴이 그림, 조형물, 영상으로 재현됨
  • 노동절이나 여성의 날을 맞아 열리는 추모 집회, 학술 행사에서
    “이름 없는 노동자들을 기억하자”는 구호가 지속적으로 울려 퍼짐

그녀들의 흔적은, 이제 기억의 윤리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과거를 기리는 것이 아니라, 지워진 존재를 다시 불러내는 사회적 실천으로 발전 중입니다.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가 보기만 하면 된다

‘그녀들의 흔적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사실 그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우리가 읽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말하지 않았던 것뿐입니다.

  • 공장 벽에 남은 스크래치
  • 오래된 야학 교실의 분필자국
  • 수첩 끝에 남은 삐뚤빼뚤한 글씨
  • ‘우리의 목소리도 있었다’고 말하는 다음 세대의 이야기

모두 그녀들이 남긴 흔적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단 하나입니다.
지워진 존재들의 흔적을 다시 들여다보고, 이름을 불러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들의 유산을 계승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유

경성의 여성 노동자들은 단지 산업사회의 ‘부속’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가장 앞선 자리에 서서
부당함에 목소리를 낸 선구자들이었고,
삶의 현장에서 인간으로 존엄을 지키고자 싸운 시민이었습니다.

이름을 잃었다고 존재가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기억이 부르면, 그 이름은 다시 돌아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