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역사 속 인물 탐구

식민지 조선의 이름 없는 교육 운동가들

지아니13 2025. 6. 14. 11:21

– 칠판도 교과서도 없이 ‘배움’을 지킨 사람들

1. 지식은 억압되었고, 교육은 통제되었다

지배는 군사력으로 시작되지만, 정착은 교육으로 완성된다.
일제는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1910년 조선을 강제 병합한 후, 가장 먼저 정비된 것은 군사력이 아니라 교육 체계였습니다.

"가르치는 자가 지배한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의 머리와 언어를 바꾸는 것이
‘영원한 지배’를 가능케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 결과, 교육은 ‘배움’이 아니라 ‘통치’의 도구로 설계되었습니다.

  • 보통학교령, 고등보통학교령(1911):
    조선인을 위한 학교는 일본인 학교와 철저히 분리되었고,
    일본어, 일본 역사, 일본 윤리를 강제 편성했습니다.
    반면, 조선어와 조선사는 ‘부과 과목’으로 분류되어
    학년이 올라갈수록 줄어들거나 사라졌습니다.
  •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
    모든 학생은 아침마다 일본 천황에 충성하는 맹세를 낭독하며
    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는 훈육을 강요받았습니다.
    교과서에는 ‘조선인은 일본인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해야 한다’는
    내용이 버젓이 실려 있었습니다.

조선어와 조선사는 ‘지워져야 할 것’이었다

일제는 조선어를 단순히 언어가 아니라
저항의 가능성이 있는 문화 자산으로 보았습니다.

  • 조선어 교육 금지:
    1930년대 중반부터 조선어는 점차
    수업시간에서 배제되었고,
    1940년대에 들어서는
    공식적으로 교과과정에서 사라졌습니다.
  • 한글 신문 폐간, 도서 검열:
    <조선일보>, <동아일보> 같은 민간 언론은
    수차례 정간과 폐간을 반복했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한글 책자는
    출판 허가조차 받을 수 없었습니다.

조선어를 말할 수 없는 사회,
역사를 가르칠 수 없는 교실—
이것은 단순한 정책이 아닌
의도된 지식의 학살이었습니다.

'기술자는 되되, 사상가는 되지 마라'

일제가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교육에서 가장 중시한 것은
실용 교육’이었습니다.
이는 겉보기엔 과학과 산업 교육의 장려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비판 능력을 제거한 기술 인력 양성이 목적이었습니다.

  • ‘머리는 일본인이, 손은 조선인이 써야 한다’는
    공식 문건의 표현처럼,
    조선인은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명령을 따르는 존재로 길러졌습니다.
  • 소학교(초등) 이상 진학률은 5% 미만,
    대학 진학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문턱 높은 배움’은
    지식 독점을 통한 계급 통제였습니다.

지식은 닫히고, 배움은 억눌렸다

배움의 길은 물리적으로도 차단되었습니다.

  • 학교 수는 극히 제한적이었으며,
    조선인 학교는 낙후된 시설과 과밀한 교실에 몰려 있었습니다.
  • 조선 총독부는 1910년대~30년대에 걸쳐
    교육 예산의 90% 이상을 일본인 전용 학교에 투자했습니다.

이처럼 식민지 조선에서
‘교육’은 자유와 기회가 아닌,
지배를 내면화시키는 구조적 장치였습니다.

억압된 교육은 식민 지배의 근간이었다

일제는 단지 땅만 점령한 것이 아니라,
조선인의 언어, 역사, 의식을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그 도구가 바로 교육이었습니다.

  • 지식은 허가받아야만 배울 수 있었고,
  • 언어는 검열을 통과해야만 말할 수 있었으며,
  • 사상은 오로지 '충성'만을 허용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이름 없는 교육 운동가들’이
왜 필요한 존재였는지는 명확합니다.

그들은 통제된 교실 바깥에서
지식의 씨앗을 지켰고,
그들이 이어낸 배움은
결국 해방 이후 우리의 교육 체계를 다시 세운 민족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2. 이름 없이 시작된 ‘배움의 저항’

말을 빼앗기면 생각도 빼앗긴다.
생각이 사라지면 역사는 지워진다.

일제가 조선의 언어와 역사를 지우고
‘황국신민’을 만들고자 했을 때,
그에 맞선 이들은 놀랍게도 ‘무장 세력’이 아니라
연필과 종이, 말과 귀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름도 직함도 없던 이들은
가방 대신 책보를 들고,
총 대신 한글 교본을 들고
지식이라는 불씨를 들고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야학 – 밤을 밝히던 작은 교실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야학(夜學)**이었다.
해가 지고, 일제가 철수하고,
촌장도 순사도 퇴근한 시각에
빈 창고, 절 뒤편, 헛간, 지하실 같은 공간이
하나둘씩 교실로 바뀌었다.

  • 농촌 야학: 낮에는 논에서 일하고, 밤에는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던 농민
  • 기독교 야학: 교회 부속 건물에서 성경을 핑계 삼아 한글과 역사를 함께 읽던 신자들
  • 산업 현장 야학: 경성, 인천의 공장 여공들이 야근 후 남아서 모인 ‘자율 학습 모임’
  • 여성 중심 야학: 기혼 여성들이 집안에서 여학생 몇 명을 모아 비밀리에 글과 숫자를 가르친 소규모 교실

이런 야학들은 정식 교육기관이 아니었기에
문 닫을 준비도, 도망갈 대비도 늘 되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들은 멈추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배움은 시험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말을 되찾기 위한 생존의 공부였기 때문이다.

한 권의 책, 열 명의 선생

교육운동가들의 가장 큰 자산은 인쇄된 교재가 아니라,
암기된 지식과 공동체의 입소문이었다.

  • 한 권의 국문 독본을 10명이 돌려가며 외우고,
  • 한 장의 지도를 복사해 손으로 옮겨 그려
    아이들에게 조선의 지리와 산줄기를 설명했다.

글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에
누군가는 말로 읽고,
누군가는 베껴 적으며,
누군가는 벽에 그려 알려줬다.

이들은 교사라기보다는
**‘지식의 전달자이자 기억의 보관자’**였고,
이야기와 노래, 퀴즈와 놀이를 통해
말과 글을 몸에 새기는 법을 가르쳤다.

글자를 아는 것 = 자유를 아는 것

왜 이토록 많은 이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가르치고, 배우고, 외웠을까?

그 이유는 분명했다.
글자를 알아야, 나를 안다.
말을 알아야, 내 생각이 있다.

  • 조선어를 쓴다는 것은 단지 의사소통이 아니라
    내가 조선인임을 인정하는 행위였다.
  •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왕이 있었고, 문화가 있었고, 싸운 이가 있었음을 아는 것’이었으며,
  • 수를 배우고, 도형을 그리는 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닌 ‘세계의 구조’를 배우는 일이었다.

즉, 이 모든 배움은
지배에 침묵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무장이었고,
말하고 쓰고 기억하는 자가
언젠가 싸울 수 있다는 믿음의 실천이었다.

이름은 사라졌지만, 배움은 이어졌다

이 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의 이름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들은 등록된 교사도 아니었고,
교육훈장을 받은 인물도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가르친 아이들 중 몇몇은
해방 후 ‘한글 교사’가 되었고,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지방에서 다시 글방을 열었다.

이름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심은 배움은
한 세대, 두 세대 후에
기억이 되고, 삶이 되고, 민족이 되었다.

교육은 조용한 혁명이었다

우리는 교육을 입시의 도구로만 여기기 쉽지만,
식민지 조선에서는 교육이 곧 해방의 실천이었다.

  • 학교 밖에서 시작된 지식의 불꽃
  • 교과서도 칠판도 없이 진행된 수업
  • 여성, 농민, 학생, 종교인들이 이루어낸 ‘말의 연대’

이 모든 것은
‘일본어가 아닌 조선어로 말하고 싶다’는
가장 근본적인 인간의 권리에서 출발한
이름 없는 교육 혁명이었다.

식민지 조선의 이름 없는 교육 운동가들

3.  누가 이 운동을 이끌었는가?

“배움은 허락되지 않았지만, 멈추지도 않았다.”

식민지 조선에서 비밀리에 이뤄졌던 교육운동은
정부나 단체가 이끈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사 자격증도, 공식 허가도 없었지만,
배움을 향한 간절함과 민족의 기억을 잃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수많은 이름 없는 시민들이 스스로 ‘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른 얼굴, 다른 삶을 살고 있었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배움을 나누는 일이 곧 조선의 미래를 지키는 일”**이라는 믿음.

① 해직 교사, 교단 밖에서 다시 가르치다

일제는 조선어, 조선사, 민족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교사들을
‘불온 인물’로 간주하고 해직하거나 전근시켰습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교직에서 쫓겨난 뒤에도
마을로 돌아가 아이들을 모아 비밀 교실을 열었습니다.

  • 조선어 독본 한 권과 종이 몇 장으로 시작된 수업
  • 사찰 뒷채, 장독대 아래 헛간 같은 공간이 임시 교실
  • “나는 더 이상 선생이 아니지만, 이 아이들에게는 배움을 줄 수 있다”는 책임감

그들은 조선어가 사라지는 것이
민족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이라 믿었고,
그래서 목숨을 걸고 글을 가르쳤습니다.

② 여성들 – 조용히, 그러나 가장 강하게

많은 이들이 ‘교육운동’ 하면 남성 중심의 조직을 떠올리지만,
실제 마을 현장에서는 여성들, 특히 기혼 여성들
놀라운 역할을 했습니다.

  • 자신의 집에서 마을 아이들을 모아 한글을 가르친 ‘주부 교사들’
  • 천도교, 기독교 여성 신도들이 주도한 비인가 여성 야학
  • 여성교회, 여성독서회 등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학습 모임

이들은 ‘공적인 공간’에서 가르칠 수 없었기에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을 교실로 만들었고,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면서도 아이들의 읽기 소리를 듣고 수정해 주었습니다.

또한, 여성들끼리 모여 신문을 소리 내어 읽고,
배운 내용을 바느질과 함께 나누며
지식이 일상의 리듬 속에 스며들게 했습니다.

③ 학생운동가 – 피의 거리에서 돌아와 교사가 되다

3·1운동과 광주학생운동 등 대규모 시위에 참여했던
청년 학생들 중 많은 이들은
체포되거나 퇴학된 후, 고향으로 내려가 ‘후배 세대’를 가르치는 일에 나섰습니다.

  • 투쟁의 경험을 아이들에게 이야기로 전하고
  • 일본어 교과서 사이에 조선어 소책자를 숨겨 가르치고
  • “우리는 배워야 다시 싸울 수 있다”는 것을 반복해 알려주었습니다.

이들에게 교육은 단순한 학문이 아니었습니다.
**‘생존 전략’이자 ‘다음 세대의 무기’**였습니다.

④ 종교인과 선교사 – ‘믿음’으로 배움을 지키다

기독교와 천도교, 불교 등 일부 종교계는
교육을 통한 민족 계몽에 매우 적극적이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신앙과 교육을 함께 가르치던 무명의 종교인들이 있었습니다.

  •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성경을 조선어로 읽으며 한글 교육 병행
  • 교회·사찰 내 공간을 ‘주말 교실’로 개방
  • 심지어 해외 선교사들로부터 조선어 교재를 은밀히 받아오는 경우도 존재

특히 천도교계 여성 신도들은
‘어머니 교사’ 역할을 맡아
자녀뿐 아니라 이웃 아이들에게도
조선어, 조선의례, 민속 노래 등을 가르쳤습니다.

⑤ 노동자와 농민 – ‘학문 없는 삶은 없다’고 믿은 사람들

가장 놀라운 것은,
글을 제대로 배워본 적 없는 농민, 공장 노동자, 광부들
자신이 겨우 배운 글자를 바탕으로
또 다른 이를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 자신의 배움의 결핍이 누군가의 시작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
  • 쪽지를 접어가며 쓰는 글자 공부법,
    숫자를 노래로 익히는 민간 방식으로 글을 가르쳤습니다.

이들은 “나는 배운 적이 없다”는 부끄러움을
“그래서 너는 배워야 한다”는 결심으로 바꾸었고,
그 속에서 진정한 풀뿌리 교육의 정신이 자랐습니다.

그들은 자격이 아니라, 책임으로 가르쳤다

식민지 조선의 교육 운동은
**‘직업으로서의 교사’가 아닌
‘사명으로서의 교사’**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였습니다.

  • 이름은 없었지만,
  • 칠판도 없었지만,
  • 그들이 남긴 가르침은 한 세대를 잇고,
    그 세대는 다시 우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없었다면,
한글을 되찾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고,
우리의 역사와 언어는 더욱 깊은 어둠 속에 갇혔을지도 모릅니다.

4.  교육은 단지 지식 전달이 아니었다

“한 글자를 배운다는 것은,
한 조각의 존엄을 되찾는 일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교육’은 단지 글자를 익히고, 산수를 배우는 과정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말살당한 언어를 되찾고, 지워진 역사를 복원하며,
사라질 위기의 민족 정체성을 다시 세우는 실천
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배우던 낱말 하나,
어른들이 나누던 이야기 하나가
바로 저항이자 생존이었던 시대—
교육은 ‘가르침’이라기보다
민족을 잇는 일, 존재를 지키는 행위였습니다.

"읽고 쓸 줄 안다"는 것의 의미

오늘날 '문해력'은 공부의 기본기쯤으로 여겨지지만,
그 시절 글을 읽고 쓴다는 건 **‘지배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자격’**을 의미했습니다.

  • 관공서 문서, 일제 명령서, 노동계약서, 경찰 고지문
    일상 곳곳에 배치된 일본어와 한자 혼용 문서를 읽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자신의 권리를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최소한의 능력이었습니다.
  • 일본은 이 점을 정확히 인식했고,
    그래서 조선인의 문해 기회를 최소화하려 했습니다.
    학령기 아이들의 대부분이 ‘초등 2학년 수준 이하’에서 교육을 중단해야 했던 이유입니다.

글을 안다는 것은 단순한 ‘능력’이 아니라
식민 권력에 복종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어막이었습니다.

"지식이 아니라, 질문을 허락받지 못한 시대"

일제는 조선인에게 지식 그 자체보다 ‘사고하는 능력’을 제한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질문은 곧 권력에 대한 의심을 낳기 때문입니다.

  • 왜 조선어를 못 배우는가?
  • 왜 조선 역사는 시험 과목이 아닌가?
  • 왜 우리 이름이 창씨개명되어야 하는가?

이런 질문을 품는 순간, 사람은
‘순종하는 식민 백성’이 아니라
‘저항할 수 있는 민중’이 됩니다.

따라서 식민 당국은 ‘기억하지 못하게 하는 교육’,
‘암기만 남고 사고는 지워지는 교육’을 밀어붙였고,
바로 그 틈에서 이름 없는 교육자들
다시 사유와 질문의 불씨를 되살리려 애썼습니다.

교육은 ‘언어의 복원’이자 ‘정체성의 회복’이었다

한글을 가르친다는 것은 단순히 문자를 전수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곧, **‘우리의 말과 문화를 버티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 아이들이 배운 첫 문장은
    “나는 조선 사람입니다.”
  • 구구단을 배우기 전,
    아이들은 “우리 말에는 받침이 있어요.”라고 배웠습니다.
  • 종이 대신 마당의 흙 위에 나뭇가지로 글자를 새기며
    “이 글자는 우리만 쓸 수 있는 글자야”라고 말하던 장면이
    당시 수업의 풍경이었습니다.

이런 교육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의 근간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민중이 만든 교육은 ‘해방의 언어’를 가르쳤다

일제는 조선어와 역사를 없애려 했지만,
민중은 다시 말하고, 다시 읽고, 다시 쓰는 방식으로 그것을 지켜냈습니다.

  • 조선의 역사책이 없으면,
    이야기 방식으로 ‘설화’처럼 전해졌고,
  • 지도를 구할 수 없으면,
    뒷산과 강을 이용해 공간 인식을 교육했습니다.
  • 시험은 없었지만,
    “너는 왜 조선사람이냐?”는 질문을 던지며 사고를 이끌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식이 아니라 ‘해방의 언어’를 가르친 교육운동의 본질이었습니다.

배움은 기억을 지키는 저항이었다

지식은 책에 있고, 교육은 학교에서만 이뤄진다고 생각했던 시대에
이름 없는 교육자들은
그 모든 상식을 깨고 골목에서, 부엌에서, 밭둑에서
조선의 언어와 정체성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이 가르친 것은 시험 대비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존재의 복원, 사유의 권리, 민족의 기억이었습니다.

그래서,
교육은 단순한 전달이 아니라
삶의 회복이자, 해방의 연습이었습니다.

5. 왜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모를까?

"그들은 분명히 존재했지만,
우리가 모르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기억되지 않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3·1운동의 대표자들을 기억하고,
유명한 독립운동가의 이름은 교과서에서 배웠습니다.
하지만, 그 거대한 항일과 민족운동의 저변에서 지식을 전했던 교육자들,
특히 이름 없이 가르치고 떠난 선생들의 이름은 왜 그토록 적을까요?

그 이유는 단순히 자료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더 깊고 구조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① “공식 기록”은 누군가에 의해 설계된 것이다

역사는 무조건적인 사실의 나열이 아닙니다.
기록은 선택이며, 편집이며, 서사 구성입니다.
즉, 누군가의 손에 의해 **‘기억할 사람’과 ‘지울 사람’**이 나뉘는 구조죠.

  • 교육 운동가 중 다수는 비공식 활동자였습니다.
    인가받은 교사도 아니었고, 정부에 등록된 인물도 아니었습니다.
  • 그들의 활동은 대부분 마을 단위, 소규모, 구술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이는 식민지 이후 정부나 기관의 기록 시스템 안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 특히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기록을 남기지 않는 전략을 택한 이들도 많았고,
    그 결과 **‘존재는 있었지만 문서는 없는 인물들’**이 다수가 되었습니다.

즉,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기록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② ‘자격’과 ‘공적 기여’만이 기록될 수 있었던 체계

광복 이후 한국은 ‘공적 기여자’를 정리하고,
유공자 체계를 구축하면서 독립운동가 등록제, 포상 시스템 등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포함되려면

  • 정확한 활동 기간과 장소
  • 연대자 혹은 후원의 진술
  • 근거 자료가 필요했습니다.

말하자면,
자료와 인맥, 구조를 가진 사람만이 ‘공적 역사’로 편입될 수 있었던 셈입니다.

이러한 시스템에서 이름 없는 교육자들,
특히 여성·농민·기혼자·비문해자 출신의 교육 실천자들
제도적으로 배제되었고,
그들의 활동은 '미담'이나 '구전 설화'로만 남게 됩니다.

③ 여성, 농민, 비도시민은 ‘주인공’이 될 수 없었던 시대

우리가 역사를 기억할 때
‘이름이 기록될 수 있는 위치’ 자체가 제한되어 있었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 여성은 교육의 주체로 보기보다 ‘가르침의 대상’으로 취급되었고
  • 농민은 민족 계몽의 대상으로 여겨졌지, 지식 전달자로 상상되지 않았으며
  • 비도시민은 ‘중심부 서사’에서 벗어난, **‘주변의 인물’**로 취급되었습니다.

결국, 그들이 아무리 많은 아이를 가르치고,
밤마다 야학을 열었다 해도
**“기록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겁니다.

이는 단지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시대와 사회가 구조적으로 만든 망각의 시스템이었습니다.

④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과 ‘남길 수 없었던 것’의 차이

또 하나 중요한 지점은,
많은 교육 실천자들이 의도적으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 다른 가족 구성원이나 마을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 교육운동이 ‘정치범 혐의’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은 자신의 이름 대신, 공간을 남기고
교재 대신, 말과 그림을 남겼으며
성적표 대신, 사람들의 기억 안에 존재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매우 능동적이고 전략적이었지만,
기록의 부재라는 결과를 남기며
오늘날 역사 복원의 큰 장벽이 되었습니다.

'기록되지 않음'은 곧 '없음'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모르는 이유는
그들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기억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기억될 수 있는 조건을 갖지 못하게 된 구조 때문입니다.

  • 그들은 가르쳤고,
  • 아이들은 배웠고,
  • 그 배움은 이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 해야 할 일은
**“이름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름 없이 존재한 증거들을 새롭게 서사화하는 것”**입니다.

6.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기억

“이름은 지워졌지만,
우리가 다시 말할 수 있다면
그들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다.”

기록되지 않았던 이름들,
문서에도, 교과서에도 실리지 않은 무명의 교육자들.
그들이 남긴 것은 ‘단지 배운 사람’만이 아닙니다.
민족의 기억, 언어의 불씨, 존엄의 감각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이 자리까지 이어진 눈에 보이지 않는 유산입니다.

이제는 묻지 말아야 합니다.
“왜 아무도 기록하지 않았을까?”
이제는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들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① 개인의 실천: ‘읽고 말하기’부터 시작하는 기억 복원

기억은 반드시 거창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의 이름, 하나의 문장, 하나의 사연을 **‘잊지 않는 일상’**이 바로 복원의 시작입니다.

  • 잊힌 교육자의 이름이 나오는 책을 읽고, SNS에 공유하기
  • 구술 기록 영상이나 다큐멘터리 시청 후 감상 남기기
  • 가족이나 자녀에게 “우리나라에도 이름 없는 선생님들이 있었어”라는 한마디 전하기

이런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가
공적 기록의 빈 공간을 메우는 민간 기억의 힘이 됩니다.

② 지역사회 차원의 실천: 풀뿌리 기억 운동에 참여하기

대도시 중심이 아닌 지역 중심의 기억 사업
잊힌 교육자들의 흔적을 복원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 지역 박물관, 교육사 자료관, 마을 기록관의 기획 전시에 관심 갖기
  • 마을 주민들의 구술사 프로그램에 참여해, 기억 채록 활동에 동참하기
  • 지역 초·중학교 교육과정에 포함될 수 있도록 시민 청원, 기획 수업 제안

예컨대, 전라도 어느 농촌에서
“조선어를 밤마다 몰래 가르쳤던 부녀자”의 사연이 구술로 남아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옛이야기’가 아니라
역사로 편입될 자격을 지닌 기억 자산입니다.

③ 공공 기록문화의 전환: ‘기록되지 않은 자’들을 위한 기록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이제
기존 기록 틀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서사적 틀을 고민해야 합니다.

  •  “비공식 독립운동가·교육운동가 디지털 기록관” 설립
  •  이름이 없는 활동자를 위한 ‘테마형 서사 전시’ 운영 (예: "이름 없이 가르친 사람들")
  •  행정구역 기반 ‘생활사 지도’ 안에 잊힌 교육 거점 복원하기

즉, 기록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사라지게 하지 않도록
공적 시스템이 기억을 위한 ‘재수집’과 ‘재구성’의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억한다’는 말은 곧 ‘함께 있다는 선언’이다

교육은 지식이 아니라 사람을 남깁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남긴 말, 가르침, 의지를 누군가 이어 말할 때—
그는 여전히 우리 곁에 있습니다.

  • 무명의 교사가 전해준 한글 한 글자
  • 이름 없이 가르친 동네 어른의 수업
  • 문서로 남지 못한 배움의 시간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그들의 이름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있던 자리를 기억하며 살아가는 실천을 시작할 차례입니다.

교실 없는 교사들, 역사 없는 영웅들

“그들에게는 칠판도 없었고, 교단도 없었다.
하지만 지식은 전해졌고, 아이들은 달라졌다.”

‘교사’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교실이라는 공간,
책상과 의자, 그리고 교과서가 놓인 장면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식민지 조선에는, 그런 구조가 전혀 없는 곳에서
진짜 교육이 시작되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지붕 없는 마당에서,
어둠을 피해 모인 골방에서,
심지어 바람이 부는 우물가에서까지
사람들은 글을 가르쳤고, 말을 되찾았고,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그 교사들은 임용고시를 보지 않았고,
이름이 새겨진 명찰도 없었고,
일제는 물론 조선총독부 관청 어디에도 그들의 존재를 인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히 ‘가르치는 사람’이었고,
그 가르침은 지식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교실이 없다는 것은, 시스템 바깥에서 싸웠다는 뜻이다

‘교실’은 공간이자 제도입니다.
즉, 공식 교육 체계의 틀 안에 있다는 상징이죠.
하지만 당시 많은 조선인 교육 실천자들은
공적 체계에서 배제되었거나, 그 체계를 의도적으로 거부했습니다.

  • 일제가 주관하는 학교에서는 조선어를 가르칠 수 없었고,
  • 한국사, 민족사, 독립운동사는 금지된 영역이었으며,
  • 조선 교사는 보조 교사로만 취급받거나 감시당했습니다.

그 결과, 진짜 배움을 원하는 사람들은 체제 바깥으로 밀려났고,
그 바깥에서 **‘비제도권 교육자’**라는 또 하나의 정체성이 탄생한 것입니다.

이들에게 ‘교실 없음’은 곧 제도에 대한 저항이자,
권위 없는 교육의 실험이기도 했습니다.

‘역사 없는 영웅’이라는 또 다른 이름의 비극

이들은 민족을 위한 교육을 펼쳤지만,
정작 ‘역사’라는 이름의 교과서와 연표 속에는 단 한 줄도 실리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 공식적 기록이 없었고, 남기지 않았으며, 남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 공신록도, 훈장도, 유공자 명부도 없었습니다.
  •  심지어 많은 경우, 그들이 무엇을 가르쳤는지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은,
역사는 승자만의 기록이 아니라,
기록되지 않은 자들의 생존 흔적까지 포함해야 한다는 것
입니다.

"역사 없는 영웅"이라는 말은
그들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인식하지 않았다는 반성의 말이어야 합니다.

교실 없는 교사들이 남긴 것들

  • 아이 한 명이 한글을 쓸 수 있게 된 것
  • “나는 조선 사람입니다”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 것
  • 일본어 이름 대신 자기 이름을 또박또박 적을 수 있었던 것

이 모든 변화는,
지붕 없는 교실에서,
이름 없는 선생님이 만든 기적이었습니다.

그들은 국가의 교사가 아니었지만,
민족의 교사였고,
공문서에 없는 교육자였지만,
기억 속에는 반드시 있어야 할 사람들
입니다.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실천

그 이름들을 복원하는 것.
그 흔적을 따라가는 것.
그리고 ‘교육자’라는 단어를 새롭게 정의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실 없는 교사도 교사였고,
역사에 없던 영웅도 영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