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 속 장인의 흔적 – 능묘 조성의 무명 조각가들
조선의 왕릉을 거닐다 보면
돌로 만든 정갈한 세계가 펼쳐집니다.
문인석, 무인석, 석마, 석호, 석양…
각각의 석물이 정해진 자리에 놓이고,
사방은 지형과 음양의 원리에 따라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경건한 기운을 품고 있는 조선의 능묘.
하지만 이 석조물들을 실제로 다듬고, 새기고, 세운 사람들의 이름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누구였고, 왜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잊었을까요?
능묘 조성, ‘왕실 프로젝트’의 정점
왕의 죽음은 곧 하나의 ‘왕국의 종료’이자
다른 왕의 시대를 준비하는 국가 차원의 전환 의례였습니다.
조선시대에서 국왕의 장례는 단순한 추모의식이 아니라
정치적 정당성, 왕실의 권위, 국가 질서를 다시 한 번 다지는 총체적 국가 프로젝트였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정점이 바로 왕릉, 곧 능묘(陵墓)의 조성이었습니다.
1. 능묘는 왕의 ‘죽은 궁궐’이었다
조선에서 능묘는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왕의 죽은 뒤 거처하는 또 하나의 궁궐 공간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를 '영역화'하면 다음과 같은 구조로 이루어집니다:
- 홍살문과 참도: 성역의 경계
- 재실과 신도비각: 왕의 업적을 기록하고 제례 준비
- 석물 배치: 문인석, 무인석, 석양, 석마, 석호, 장명등, 상석 등
- 봉분과 곡장: 왕의 시신이 모셔지는 최심부
이 전체 구역은 도성 못지않은 위계를 갖췄으며,
왕릉 하나를 조성하기 위해 수백에서 수천 명의 인력이 동원됐습니다.
이는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왕권 시각화’ 작업이었던 셈입니다.
2. 공사 전담 부서부터 현장 감독관까지
왕이 승하하면, 조정은 즉시 다음 절차를 가동합니다.
- 도감 설치
- 국왕 장례를 주관하는 임시 행정기구
- 예문관, 호조, 공조, 도화서, 장인청 등 여러 부서와 협업
- 입지 선정
- 풍수지리학자와 천문관의 검토
- 왕의 신위가 안식할 지리적·영적 최적지 선정
- 설계와 의궤 작성
- 왕릉 설계도와 공정 계획을 문서화
- <의궤(儀軌)>에 모든 절차, 자재, 인력까지 상세히 기록
- 장인·기술자 동원
- 석공, 목공, 기와장, 조각사, 표구사, 백토 운반꾼, 말탄 사령 등
- 각 지방에서 차출되어 일정 기간 합숙하며 작업
한 번의 능묘 조성에는 수개월에서 수년에 걸친 장기 계획이 수반되었고,
이는 조선 후기엔 더 정교하고 체계적으로 발전합니다.
3. 석물은 단지 장식이 아니었다 – 정치와 미학의 접점
왕릉에 세워진 석물들은 결코 단순한 장식이 아닙니다.
그 하나하나가 조선 왕실의 권위, 사상, 미학, 제례 질서를 상징하는 ‘상징물’입니다.
- 문인석: 문치주의 조선의 이상
- 무인석: 군사력과 수호 의지
- 석양·석호: 외세로부터의 방어 상징
- 석등: 어둠을 밝히는 ‘영혼의 빛’
특히 이 석물들은 정해진 규격과 위치, 방향이 있습니다.
임금의 격에 따라 형태와 수량이 달라지며,
이는 곧 왕의 위상과 정통성에 대한 시각적 연출이자 선포였습니다.
즉, 왕릉의 석물은 미학적 대상이자 **국가 권위의 ‘조각화된 언어’**였습니다.
4. 왜 조선은 능묘에 이토록 집착했는가?
조선은 유교적 국가였고, 그 중심은 **효(孝)와 제례(祭禮)**에 있었습니다.
왕이 죽은 뒤에도 정중히 모시고, 후손이 예를 다해 봉사함으로써
왕조의 도덕성과 유교 국가로서의 정통성을 드러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능묘 조성은 단지 왕 한 사람의 장례가 아니라,
→ 그 후손이 얼마나 유교적 이상에 충실한지를 시험받는 정치적 의례이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외국 사신이나 지방 유생들이 능묘를 참관했을 때
왕릉의 정비 상태, 석물의 완성도, 재실의 청결함 등을 보고
그 왕조의 격과 질서를 판단했습니다.
→ 다시 말해, **왕릉은 조선의 ‘정체성과 권력의 미장센’**이었습니다.
능묘는 조선 왕권의 마지막 무대였다
조선의 능묘 조성은 단순한 장례 작업이 아닙니다.
그것은 수많은 지식인, 기술자, 장인, 관리들이 함께 만든
왕권의 마지막 무대이자, 역사적 유산의 집대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장대한 프로젝트를 가능케 한 수많은 무명 손길들—
이름 없는 석공, 조각사, 목수, 운반꾼—
그들이 만든 조형물은 지금도 돌 속에 고요히 서서
조선이 남긴 마지막 왕의 권위와 예술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돌은 남고, 손은 사라진다’
왕릉을 거닐 때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돌입니다.
묵직하게 자리를 지킨 무인석, 오랜 침묵 속에서도 묘하게 생동하는 문인석,
어딘가를 응시하며 선 석마와 석호…
그 모든 조형물들은 수백 년의 세월을 견뎠고, 지금도 형태를 온전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정교한 곡선과 표정, 완벽에 가까운 균형을 만든 ‘손’,
즉 그것을 다듬고 새긴 사람의 이름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1. 석조물은 말한다. 그러나 조각가는 말하지 못했다
문인석의 이마에 새겨진 주름, 갑옷 위로 흐르는 주름의 방향성,
마치 살아 있는 듯한 석마의 근육선과 석호의 눈빛—
이런 디테일은 결코 기계적인 반복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분명히 인간의 감각, 손끝의 판단, 미감의 기법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 작업마다 달라집니다.
- 어떤 문인석은 얼굴이 유난히 인자하고,
- 어떤 석호는 표정이 날카롭고 긴장감이 서려 있습니다.
이는 석공의 의도, 기량, 성향에 따라 달라지는 작품의 개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차이를 만들어낸 조각가의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오직 돌만이, 그 사람이 있었음을 ‘말 없는 증거’로 남기고 있을 뿐입니다.
2. 석공의 서명은 없었다 – ‘이름을 남기지 않는 기술’
조선 왕릉은 권위의 상징이자, 국가적 성역이었습니다.
그만큼 정해진 규칙과 위계가 철저했고,
개인의 창작성이나 ‘서명’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미술품조차도 서명을 할 수 있는 이는 일부 화원과 사대부뿐이었고,
왕의 무덤을 장식하는 석물에 ‘누가 만들었는지’ 표기하는 것은 불경으로 여겨졌습니다.
- 왕의 권위 앞에서 기술자는 ‘투명한 존재’여야 했고,
- 조각은 예술이 아니라 ‘명령의 실현’이어야 했습니다.
즉, 왕권이 절대적인 구조 속에서는 기술자의 흔적조차 개인적이어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3. 도구는 남았지만, 손의 전설은 지워졌다
현존하는 몇몇 석공의 도구는 일부 박물관이나 지방 사찰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단조된 망치, 각도기, 끌, 줄칼, 연마용 석판 등…
수백 도의 열과 거친 진동을 견디며 석재를 깎았던 도구들입니다.
그러나 이 도구를 사용한 사람, 그 기술을 누가 전수했는지,
그 조각 기술이 어느 지역의 양식을 따랐는지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 도구는 남고, 손은 사라졌습니다.
- 결과물은 남고, 과정을 만든 이들은 지워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조선 기술 노동의 한계이자,
기록의 권력이 예술의 소유권을 좌우했던 전통 사회의 본질입니다.
4. 이름 없이도 남은 흔적 – 섬세한 곡선, 비대칭의 균형
아이러니하게도, 이름 없는 조각가들의 손길은
오늘날 더 깊은 감동을 줍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음에도 ‘예술적 자존심’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장명등 기둥 하나에도 기울기 없는 수직선을 만들어냈고,
- 석수호의 털결 표현에 세심한 망치질을 새겼으며,
- 인물상의 손가락 마디마디에 해부학적 리듬을 넣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기술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름은 사라져도 기술은 기억되길 바란다”는 무언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역사에 새기지 못한 이름, 돌 위에 새긴 흔적
역사는 이름을 가진 자의 것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조선의 석물은, 그것이 틀린 말임을 증명합니다.
이름 없이도 사람은 흔적을 남길 수 있고,
기록되지 않았어도 기억될 가치가 있는 손의 역사가 있다는 것—
바로 그 진실이 조각된 석물 하나하나에 담겨 있습니다.
왕의 묘를 만든 손들이 자신을 드러낼 수는 없었지만,
우리는 그 흔적을 따라 이름 없는 예술가, 기술자, 노동자들을 다시 불러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돌은 남고, 손은 사라진다’는 문장의
또 다른 해석,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기억의 복원 작업입니다.
‘관노’에서 ‘외청석수’까지 – 이름 없는 조각자들
조선 왕릉 앞에 당당히 놓인 문인석, 무인석, 석양과 석호.
이처럼 수백 년을 버틴 석조 예술품들은 단단하고 침묵하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손의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습니다.
그 손의 주인은 누구였을까요? 그들은 어떤 사람들, 어떤 신분이었을까요?
왕릉 조성에 참여한 조각자들은 단일한 계층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의 석조 기술을 떠받친 이들은 엄격한 신분제 아래, 다양하게 분화된 **‘이름 없는 조각자 집단’**이었습니다.
1. “관노匠人” – 국유 장인, 기록되지 않는 기술자
조선의 관노, 특히 장인청(匠人廳) 소속 관노들은 국가에서 직접 소유한 인적 자원이었습니다.
이들은 천인 신분이었지만, 각기 고유한 기술을 가졌으며, 궁궐 수리, 왕릉 조성, 종묘 작업 등 주요 공사에 동원되었습니다.
석공으로 분류된 이들 중 다수는:
- 국왕의 장례가 있을 경우 ‘의릉도감’이나 ‘호장도감’ 소속으로 배속되어
- 왕릉 석물의 밑그림 제작, 거친 석재 깎기, 조각 기초 작업 등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관노는 공식 기록에서 실명 언급이 거의 없으며,
‘장인 15명’, ‘석공 수십 인’ 등의 집단 묘사로만 처리되었습니다.
기술은 있되, 이름은 없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2. “도제와 수습공” – 기술을 물려받았으나 이름은 남기지 못한 손
조선 후기에는 왕실 소속 공방(도화서·장인청·경공장 등)에서 견습 제도가 정착되어 있었습니다.
돌을 깎는 기술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 견습공은 주로 장인 가문 출신의 아들, 또는 기술이 우수한 천민 청년이었고
- 수년에 걸쳐 선배 석공의 도제를 거치며 망치질, 석선 그리기, 표면 다듬기 등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작업은 대부분 집단 작업이었고,
기술은 말이 아니라 손과 눈으로 전수되었으며,
문서에 남는 일도, 성과로 인정받는 일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 결과, 기술은 계승되었지만, 기술자의 이름은 대대로 지워져 갔습니다.
3. “외청석수外廳石手” – 민간에서 유입된 자유 장인들
‘외청석수’란 말은 조선의 공문서에서
관에 소속되지 않은 외부 석공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주로 지방에서 활동하던 자유 기술자, 혹은 건축 현장 유랑 장인이었습니다.
왕릉이나 주요 궁궐 공사 때, 공력이 부족하면 지방 관아에서 이들을 차출하거나 고용하였고,
특히 ‘단묘(王의 사당)’, ‘신도비’, ‘비각 석물’ 등 고난이도 조각 작업은 외청석수의 숙련도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 외청석수는 공공기관 소속이 아니라서 품계나 관직이 없고,
- 실명 등재가 불필요하다고 판단되어, 실록이나 의궤에서 언급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직 기술로 증명했지만,
국가는 신분과 소속이 없는 기술자에게는 기록의 권리를 주지 않았습니다.
4. “신분과 능력의 불일치” – 기술자는 있었지만, 장인은 될 수 없었던 시대
조선은 능력을 중시한 ‘과거제 사회’처럼 보이지만,
그 ‘능력’은 어디까지나 문자와 관직, 가문을 통과한 지식을 기준으로 판단되었습니다.
반면, 석공이나 조각 기술자는:
- 손으로 말하고, 몸으로 숙련하는 직종이었기에
- 학문이나 문서 중심의 사회에서 ‘지식’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아무리 정교한 장명등을 만들고, 왕의 석상을 새겨도
그들은 ‘예술가’가 아니라 ‘노동자’,
‘기술자’가 아니라 ‘하청 인력’으로 분류되었습니다.
능력은 있었지만, 신분은 허락되지 않았고,
예술을 만들었지만, 이름은 허락되지 않았던 사회—
그것이 조선이 무명의 조각자를 양산한 구조적 현실이었습니다.
왕릉을 만든 손은 다양했다, 그러나 이름은 단 하나도 남지 않았다
왕릉 앞에 서 있는 수많은 석물은
사대부가 깎은 것도 아니고, 이름 있는 예술가가 만든 것도 아닙니다.
그 하나하나는:
- 국유 노비였던 관노,
- 도제 장인 출신의 견습 석공,
- 전국을 떠돌던 유랑 외청석수,
- 그리고 조선 후기 실력 있는 민간 장인들의 협업으로 완성된 결과물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손은 기록되지 않았고,
오직 석물의 형태와 질감, 그리고 도구 자국만이 그들의 존재를 증언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 무명 기술자들의 존재를 말하고,
그들의 이름 없는 기량을 역사에 다시 써넣어야 할 때입니다.
‘기록하지 않는 방식’도 하나의 정치였다
우리는 흔히 기록을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의 집합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조선왕조실록이나 의궤 같은 국가 기록물을 두고는
"당시를 가장 잘 보여주는 1차 사료"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 기록들은 '사실'만을 담은 책이 아니라, 선택된 기억의 조합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기준은 누가 권력을 가졌는가,
무엇이 ‘국가적’이라 여겨졌는가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즉, 조선 시대의 기록은 기록의 기술이자, 기록의 정치였습니다.
1. 무엇을 남길 것인가 – 조선의 기록 기준은 ‘격(格)’이었다
조선은 유교 이념에 따라 위계와 질서, 격식을 중시하는 사회였습니다.
기록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실록, 의궤, 일기, 승정원일기, 관찬 지리지 등은
모두 **기록 대상의 ‘신분’, ‘관직’, ‘공식성’**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예를 들어:
- 왕은 당연히 모든 말과 행동이 기록 대상
- 정승·판서급은 이름과 공적이 함께 서술
- 기술자, 하급 관리, 여인은 이름 없이 "어떤 이", "석공 수 명", "궁녀 일인" 등으로 묘사
즉, 기록은 ‘존재의 반영’이 아니라 ‘격의 반영’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중요한 일을 했더라도, 그 사람이 격에 맞지 않으면 기록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2. ‘이름을 지우는 기술’은 권력의 방어였다
조선의 실록이나 국가 문서에서 특정 인물의 이름이 빠진다는 것은
그가 단순히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의 존재 자체가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 국왕을 보좌했지만 신분이 낮은 조언자
- 왕릉을 만든 뛰어난 석공이나 도편수
- 전략을 짰지만 공신에 오르지 못한 책사
이들은 이름을 남김으로써 공적 위계를 흔들 수 있었고,
때로는 국왕보다 더 능력 있는 존재처럼 보일 위험이 있었기에
“의도적으로”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기록되지 않는 것은 실수도, 무지의 결과도 아닌
의도된 배제, 통제된 서사였습니다.
3. 공식 기록은 ‘정통성’을 만드는 서사였다
조선왕조는 500년간 수많은 반정(정변), 쿠데타, 왕권 갈등을 겪었습니다.
그때마다 정권을 잡은 쪽은 역사를 다시 씁니다.
- 정변에 참여했던 무명의 병사나 전략가는 빠지고
- 핵심 공신 몇 명만 공적을 ‘요약’해서 기록
- 반대 세력은 ‘역적’으로 몰아 생애 전체를 부정
이런 방식은 정통성을 강화하고, 반대의 서사를 봉쇄하는 도구로 작동했습니다.
실록이 아무리 객관을 지향했다 해도,
그 기본 전제는 ‘현 왕조의 정당성 유지’였고,
그에 맞지 않는 인물이나 진실은 기록 자체에서 배제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4. 무명의 손은 감춰지고, 왕의 의지만 강조되었다
왕릉, 궁궐, 대형 건축물, 전술, 책략…
모두 수많은 사람들의 협업과 기술, 노동으로 이루어진 국가 프로젝트였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그 결과를 왕의 뜻, 국왕의 은혜, 조정의 지시로 포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 왕릉 석물이 완성되면 “왕의 명에 따라 제작”이라는 한 줄로 기록
- 도감 책임자는 기록되지만, 기술자들은 모두 생략
- 여성 궁녀나 상궁의 역할은 “내명부에서 준비”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대체
이렇게 기록은 결과의 주체를 권력으로 설정하고,
실제 창조자의 흔적을 지우는 구조를 반복합니다.
기록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존재가 부정되는 것이었고,
그 부정은 체제를 지키기 위한 정치적 설계였습니다.
기록은 ‘진실’이 아니라, ‘구성된 질서’였다
우리는 기록을 통해 과거를 복원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 복원 작업에서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누가 기록했는가’, ‘무엇이 기록되지 않았는가’입니다.
조선의 공식 기록은 놀라울 만큼 정교하고 집요하지만,
그만큼 선택적이며, 전략적이며, 정치적이었습니다.
- 실력자는 기록되지 않았고
- 평민은 존재하지 않는 듯했고
- 여성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만 등장했으며
- 노동자는 ‘공사 완료’라는 한 줄 뒤에 숨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록되지 않았던 그 ‘사람들’을 다시 불러내는 것,
기억의 구멍을 메우고, 지워진 존재에게도 역사적 자리를 부여하는 작업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기록을 다시 읽는 정치,
그리고 진짜 과거와 마주하는 방식일 것입니다.
능묘를 다시 본다는 것 – 보이지 않는 손을 기억하는 일
우리는 왕릉이나 능묘를 ‘왕의 무덤’이라 부릅니다.
권위의 상징, 조선 왕조의 위엄을 드러내는 공간,
조상의 위업을 기리고 후손이 예를 다해야 하는 ‘제례의 공간’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곳은 동시에,
무수한 사람들의 손과 땀, 그리고 사라진 이름으로 완성된 거대한 노동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능묘를 ‘다시 본다’는 건 바로 그 지점을 돌아보는 일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던 존재들에게도 시선을 주는,
기억의 재배치입니다.
1. “돌을 세운 이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능묘에는 화려한 석물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문인석과 무인석, 석마와 석양, 석호, 장명등, 혼유석…
이 하나하나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왕의 사후 세계를 지키고, 위엄을 드러내며, 의례적 완성도를 보증하는 구조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질문하지 않습니다.
- “이 정교한 얼굴을 깎은 이는 누구인가?”
- “누가 돌을 옮기고 다듬고 세웠는가?”
- “이 비문은 누가 새겼고, 마모되지 않도록 어떻게 다듬었는가?”
능묘를 다시 본다는 건,
그 위에 세워진 ‘왕의 이름’만 보지 않고,
그 아래 깔린 손의 흔적에 눈을 돌리는 일입니다.
역사를 만든 주체를 다시 구성하는 첫 질문이 되는 것입니다.
2. 권력의 구조물이자, 노동의 집합체
왕릉은 위계의 극치입니다.
정남향으로 좌우를 맞춘 석물 배열, 계단형의 봉분, 신로(神路)의 곡선,
그 모든 것은 사전 기획과 수치적 설계, 정교한 도면에 따라 완성된 결과물입니다.
그 설계는 조정에서 했을지 몰라도,
그 조형은 무명의 도편수, 석공, 목수, 조각공, 노역자들이 만든 것입니다.
즉, 능묘는 ‘권력의 건축물’이자 동시에
‘노동의 조각품’이며, ‘기술의 결집체’입니다.
우리는 종종 왕의 권위를 기념하면서
그 권위를 떠받든 손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능묘를 다시 본다는 건, 그 구조적 불균형을 바로잡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3. 이름이 없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왕릉 앞 석물 어디에도 조각자의 이름은 없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예술성과 균형 감각, 재료의 이해력, 조형 감각을 발휘했어도
그 어떤 조각물에도 “이것을 만든 이는 누구누구다”라는 문장은 남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 조선은 ‘장인의 서명’을 불경으로 여겼고
- 기술자는 이름을 남길 자격이 없다고 보았으며
- 모든 공적 성과는 왕의 덕으로 귀속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 석마의 눈매가 살아 있는 이유
- 석호의 갈기가 바람결에 흔들리는 이유
- 문인석의 곤룡포가 리듬감 있게 흐르는 이유는
누군가가 그것을 ‘의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의도는, 결국 사라진 손의 기억을 소환하는 유일한 실마리가 됩니다.
4. 무덤은 끝이 아니라, 기억의 입구일 수 있다
능묘를 단지 ‘무덤’이라 생각하면,
우리는 거기서 생의 이야기를 멈추게 됩니다.
그러나 능묘는 많은 경우 새로운 기억의 입구가 됩니다.
- 이름을 잃은 기술자들의 기억
- 신분으로 가려진 노동의 흔적
- 기록되지 않았지만 존재했던 수많은 실무자들
이 모두가, 우리가 능묘 앞에서 다시 물어야 할 ‘역사의 주어’들입니다.
“왕릉이란 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왕을 둘러싼 수많은 존재들의 기록이어야 한다”
이런 인식의 전환이야말로
능묘를 ‘기억의 공간’으로 복원하는 첫걸음입니다.
돌은 말을 하지 않지만, 기억하게 만든다
능묘를 다시 본다는 것—
그것은 결국 침묵의 조형물 안에 새겨진 손의 기억을 꺼내는 일입니다.
왕의 이름만 기억하던 시선에서 벗어나
그 조형을 만든 장인, 조각가, 목수, 노역자, 사환, 도제, 여인, 관노의 존재를 소환할 때
비로소 능묘는 완성됩니다.
역사는 돌처럼 오래 남기도 하지만,
한순간에 지워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질문하고, 다시 말하고, 다시 기억한다면
사라졌던 손들은 다시금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