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역사 속 인물 탐구

침묵 속에 외친 시인들 – 일제강점기 숨겨진 저항의 문장들

지아니13 2025. 5. 29. 13:14

1. 윤동주, 저항 시인의 상징이 되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는 이 네 단어로 일제강점기의 청춘과 절망, 저항과 순결을 동시에 담아낸 시인으로 기억됩니다.
그의 문장은 폭력에 맞서 칼을 들지 않았지만, 조용하고 단단하게 민족의 정신을 지켜낸 저항의 언어였습니다.

민족과 자기 자신 사이에서 고뇌한 청년

윤동주는 1917년 만주 북간도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민자로서, 식민지 조선의 청년으로서, 그는 늘 경계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조선어를 사랑했고, 조선의 문화를 지키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일본어로 공부해야 했고,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시조차 검열과 금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의 시 「서시」에는 이러한 고뇌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단지 자연이 아니라, 윤동주 자신의 양심과 민족 앞에 서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그는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무언가를 타협하거나 침묵하는 것을 두려워했고, 오히려 그 불안과 죄의식을 시로 승화시켰습니다.

‘저항’은 꼭 큰 목소리가 아니어도 된다

윤동주는 다른 저항 시인들과는 달리, 격렬한 구호를 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용한 언어로, 그러나 더 깊은 자리에서 저항했습니다.
그의 시는 누구보다 섬세하고 내면화된 저항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참회록」에서는 스스로의 나약함과 민족 앞에서의 부끄러움을 고백합니다.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일 내게 다시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더 떳떳하게 살겠다.’”

그의 시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격분이 아니라 통절한 반성, 깊은 자기 성찰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당시 조선 지식인들 중 일부가 현실에 적당히 타협하거나 생존을 위해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분위기 속에서 한 명의 청년이 자기 스스로를 책망하며 저항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일본 유학 중 조선어로 시를 쓴다는 것의 의미

윤동주는 일본의 릿쿄대학과 도시샤대학에서 유학 생활을 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조선어로 시를 썼습니다.
이는 단순한 언어 선택이 아니라, 식민지 체제에 대한 노골적인 저항이었습니다.

당시 많은 지식인들이 일본 유학 중 ‘현실적인 선택’으로 일본어 글쓰기를 택하거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순응적 창작’을 했습니다.
하지만 윤동주는 한 글자도 일본어 시를 쓰지 않았고, 조선어로만 자신의 언어를 지켜냈습니다.
이는 당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대단한 용기이자, 문학으로 저항한 대표적 실천이었습니다.

체포, 고문, 그리고 죽음 이후의 명예

윤동주는 결국 일본 경찰에 의해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23세의 나이에 사망합니다.
사인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고문과 인체실험에 의한 사망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가 죽기 직전까지도 남긴 시들은 책 한 권 분량의 유고집으로 정리되어 광복 이후 세상에 알려졌고,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지금까지도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집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살아서는 작가로서 인정받지 못했지만, 죽음 이후에는

  • 문학적 순교자,
  • 언어의 순결함을 지킨 청년,
  • 시로 독립운동을 한 시인으로 재조명되었습니다.

왜 윤동주는 저항 시인의 상징이 되었는가?

  1. 조용하고도 뜨거운 시어
    → 직접적인 정치 구호 없이도, 조국에 대한 사랑과 슬픔을 깊이 있게 담았다.
  2. 자기 성찰의 정직함
    → 스스로를 부끄러워할 줄 아는, 윤리적 문학인의 태도는 지금도 공감된다.
  3. 일본 제국에 맞선 언어적 저항
    → 조선어로 시를 쓰고, 조선의 감정을 기록한 그의 선택은 문학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4. 비극적 청춘의 상징성
    → 젊은 나이에 요절한 삶은, ‘이루지 못한 저항’이라는 상징적 아픔을 더했다.

윤동주는 단지 아름다운 시를 쓴 청년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일제의 폭력에 굴복하지 않고, 시라는 방식으로 자기 시대와 맞섰던 조용한 전사였습니다.
그가 시를 쓰며 지키고자 했던 건, 단지 언어가 아니라 민족의 정신, 인간의 존엄성, 그리고 청년의 떳떳함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날까지도 윤동주는 저항 시인의 상징이며,
그의 시는 읽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새겨지는 문장들입니다.

침묵 속에 외친 시인들 – 일제강점기 숨겨진 저항의 문장들

2. 그러나 윤동주만 알면 반쪽이다

윤동주는 분명히 일제강점기 저항 문학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가 유일한 존재인 것처럼 여겨지는 현재의 기억 방식은, 저항 시 문학의 풍경을 절반만 보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윤동주를 넘어서야 비로소 우리가 진짜 저항의 언어, 일제강점기 문학의 전모를 마주할 수 있습니다.

저항의 ‘아이콘’만 기억하는 오류

윤동주가 상징적인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의 시는 맑고 정결하며, 검열을 통과하면서도 강한 울림을 담고 있었고, 무엇보다 젊은 나이에 죽은 그의 생애는 ‘비극적 순수성’이라는 서사로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윤동주를 일제강점기 문학의 유일한 대표자처럼 소비하고 있습니다.
윤동주를 통해 저항 시인을 기억한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거기서 멈춘다면 우리는 결국 다음과 같은 위험한 인식에 빠질 수 있습니다.

  • “윤동주 같은 시가 저항시의 전부인가?”
  • “은유와 상징만으로 저항한 시인들만 가치 있는가?”
  • “직접적으로 분노한 문장, 노골적인 저항은 문학으로 보지 않는가?”
  • “그 외 수많은 무명의 시인들은 왜 우리의 기억 속에 없는가?”

‘문학의 중심’에 설 수 없었던 이름들

윤동주와 함께 활동했지만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못한 시인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단지 시의 퀄리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구조적 이유로 인해 기억에서 밀려난 이들입니다.

  1. 검열과 출판 통제의 벽
    → 윤동주는 일본에서도 유고 시집이 출간되었지만, 많은 시인들의 작품은 필사본 상태로만 남아 검열을 피해 유통되었고, 광복 후에도 정식 출판되지 못했습니다.
  2. 생계와 생존 앞에서 시를 놓은 이들
    → 독립운동이나 정치활동, 혹은 강제징용 등으로 문학 활동을 지속하지 못한 이들은 문단 중심의 기록에서 사라졌습니다.
  3. 여성이라는 이유로 평가절하된 시인들
    → 노천명, 김명순처럼 일제강점기 활동한 여성 시인들은 **‘감성적이다’, ‘여성적이다’**라는 평가로 문단 중심에서 배제되거나, 정치성을 약하게 해석당했습니다.
  4. 정치적 입장 차이로 잊힌 작가들
    → 해방 이후 좌우 이념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친좌파 문인들은 북으로 갔거나 사상검증에 걸려 한국 문단에서 배제당했습니다. 그들은 이데올로기 필터를 통해 역사에서 지워졌습니다.

저항은 다양했다: 분노도, 침묵도, 은유도 모두 저항이었다

윤동주의 시가 조용하고 서정적인 저항이었다면, 다른 시인들은 훨씬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분노를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 이육사의 「절정」은 인간 한계 상황에서의 민족 혼을 드러낸 초인적 저항이었고,
  • 김상용의 「남풍」은 조국 회복의 염원을 상징적 자연 이미지로 바꾸어 담은 시였으며,
  • 구상의 초기 시편들은 전시 동원 체제에 대한 정면 비판과 고발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문학을 통해 일제에 맞섰고,
윤동주와는 다른 리듬, 어조, 이미지로 저항의 시학을 구축했습니다.

요점:
윤동주는 하나의 방식일 뿐, 유일한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지 않는 이름들

  • 정지용
    → 「향수」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시세계에는 민족 정체성과 고향 상실의 아픔이 깊이 배어 있습니다. 해방 이후 좌익에 연루되어 문단에서 오랫동안 금기의 대상이었습니다.
  • 김억
    → 초기 모더니즘 시인이자, 번역을 통해 저항 문학의 외연을 넓힌 인물. 문학운동가로서의 평가가 부족하게 이루어졌습니다.
  • 안서 김억연, 박팔양, 이기영 등의 이름들은 역사 교과서나 시문학사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지만, 이들 역시 시로 조국을 이야기하고, 세상을 흔들고자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윤동주를 뛰어넘어야 진짜 윤동주를 이해할 수 있다

윤동주의 위대함은 절대 폄하되어선 안 됩니다.
그러나 그를 고립된 ‘아이콘’으로만 소비한다면, 우리는 그의 시가 가졌던 연결의 힘, 공감의 에너지, 당시 민중과 동시대 지식인들이 공유했던 고통을 오히려 좁게 해석하는 셈이 됩니다.

윤동주의 자리는,
더 많은 무명의 시인들을 기억하는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윤동주만 안다면 저항 시의 반쪽만 이해한 것입니다.
이제는 그의 곁에 서 있었던 이름들,
혹은 아예 이름 없이 시를 남겼던 사람들까지
우리가 함께 기억해야만 진정한 문학사, 저항의 역사가 완성됩니다.

우리가 아직 부르지 못한 시인의 이름은, 역사 속에 잠든 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이름을 다시 불러내는 일입니다.

3. 침묵 속의 펜 끝, 알려지지 않은 저항 시인들

총칼을 들 수는 없었지만, 펜을 쥐고 싸웠던 사람들.
그들의 이름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의 밤을 뚫는 불빛처럼 시로 저항한 이름 없는 전사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목숨을 내걸고 시를 썼고, 시로 민족의 존엄과 언어의 정체성을 지켜냈습니다.
그렇지만 문단의 중심에서는 멀었고, 기록의 외곽에만 남은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왜 잊혔는가?
그리고 그들의 시는 어떤 방식으로 일제에 저항했는가?
이 장에서는 윤동주 외에도 조용히, 그러나 단단히 저항했던 무명의 시인들을 살펴봅니다.

이름은 남지 않았지만, 그들의 문장은 살아 있다

일제강점기 시문학의 주류는 검열과 억압 속에서 두 가지 방향으로 갈라졌습니다.

  1. 공식 문단과 잡지를 통해 제한적 발표를 하며 생존을 택한 시인들
  2. 출판조차 하지 못하고 필사본, 구술, 비공식 경로로 시를 전한 시인들

두 번째 그룹의 시인들은 오늘날 거의 문학사에 남아 있지 않지만, 그들이 남긴 작품 조각들은 구술문학, 지방 자료집, 독립운동 관련 기록에서 종종 발견됩니다.

예를 들어, 함경도 지역에서 활동한 정태현이라는 청년은 ‘산불’이라는 시에서

“우리 마음에 다시 불을 지피자 / 이 불이 꺼지면 민족이 끝나리라”
라고 썼고, 이는 마을 회관에서 비밀 독서회에서 암송되며 퍼졌습니다.
그는 1938년 고등계 형사에게 체포된 뒤, 끝내 풀려나지 못했습니다.
그의 시는 구술로만 전해졌고, 문집에도 실리지 못했습니다.

대표적인 ‘침묵의 저항자들’

김기림 – 시의 은유로 저항한 모더니스트

  • 주요 시: 「바다와 나비」, 「태양의 풍속」
  • 김기림은 일본 유학을 다녀온 지식인으로, 당대 문단에서 서구 문학의 형식을 적극 도입했습니다.
  • 하지만 그의 시는 단순한 감상주의가 아닌, 검열을 우회한 은유적 저항으로 평가받습니다.

예: 「바다와 나비」에서의 나비는 자유를 꿈꾸는 식민지 청년의 자화상이며, 바다는 거대한 제국의 상징입니다.
그는 조용한 언어의 힘으로 독자에게 ‘생각할 여지’를 남기며 식민 현실을 비판했습니다.

노천명 – 여성 시인으로서의 이중 저항

  • 주요 시: 「사슴」, 「푸른 오월」
  • 노천명은 일제강점기 남성 중심의 문단에서 활동한 드문 여성 시인이며, 자연 이미지와 동물의 상징을 통해 억압받는 민족과 여성의 이중적인 고통을 표현했습니다.

“사슴 한 마리, 외로운 숲속에서 울고 있네 / 발소리만으로도 흠칫 놀라는…”
→ 이 사슴은 조선인의 자화상이자, 노천명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그녀의 시는 절제된 감성과 고요한 문장 속에 여성으로서, 민족 구성원으로서의 고통과 저항을 담았습니다.
하지만 해방 이후 친일 논란과 함께 평가 절하되며 오랫동안 조명받지 못했습니다.

정지용 – 향수 너머의 고통

  • 주요 시: 「향수」, 「백록담」
  • 정지용은 민족주의 시보다는 서정적 이미지와 고향의 정서를 바탕으로 식민 현실을 간접적으로 비판했습니다.
  • 「향수」는 잃어버린 조국과 언어, 문화에 대한 절절한 상실감을 담은 시입니다.

그의 시는 전면적 저항보다는 기억과 상실을 통한 저항, 즉 말할 수 없는 것을 암시하는 시학으로 해석됩니다.
해방 후 좌익 문단과의 연루로 오랜 시간 금기시되면서 문학사에서 뒷자리에 밀렸습니다.

검열 속에서 태어난 ‘불완전한 시’, 그러나 완전한 저항

당시 검열 당국은 ‘조선’, ‘민족’, ‘독립’ 같은 단어를 쓸 수 없도록 했습니다.
때로는 시의 내용 전체를 뒤바꾸게 하거나, 연재 자체를 금지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따라 시인들은 은유, 상징, 암호적 표현, 서정의 외피를 빌려 자신의 말을 전해야 했습니다.

  • ‘산’은 조국
  • ‘바람’은 자유
  • ‘밤’은 식민 현실
  • ‘불’은 민중의 분노
  • ‘나비’는 해방된 자아

이처럼 표현은 비틀어졌지만, 정신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시는 검열 아래에서 숨 쉬는 방법을 배운 문학이었고, 조선인의 감정은 그 속에서 은밀히 불타고 있었습니다.

왜 그들은 문학사에 남지 못했는가?

  1. 출판물의 희소성
    → 지방에서 필사본으로만 돌려졌거나, 독립운동단체 내부에서만 읽힌 시는 해방 이후 기록으로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2. 문단 밖 활동
    → 서울 중심 문단에 진입하지 못한 지역 시인, 여성 작가, 노동자 출신 작가는 문단 권력에서 밀려나 자연스럽게 잊혀졌습니다.
  3. 정치적 정세의 소용돌이
    → 해방 이후 좌우 이념 대립이 심화되며, 친사회주의적 시인들은 사상검증과 검열의 또 다른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침묵이 곧 무능이 아니었다 — 그것은 전략이었다

이들은 침묵을 택한 것이 아니라, 침묵이라는 언어를 선택한 것입니다.
직설이 불가능했던 시대에, 그들은 침묵 속에 말을 숨기고, 언어 속에 무언가를 감췄습니다.

이러한 방식의 시는 지금도 많은 독자들에게 재해석의 여지를 남기며 살아 있고,
그 시를 다시 꺼내 읽을 때 우리는 문학의 힘이 얼마나 은밀하고도 강력한지를 실감하게 됩니다.

"그들은 외치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히 말했다."
그들의 시는 불완전했지만, 완전한 저항의 기록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이름들을 다시 불러내고,
그 침묵의 언어가 전한 외침을 온전히 듣는 일입니다.

4. 검열과 은유 – 시에 담긴 숨은 투쟁

일제강점기, ‘시’는 무기가 될 수 없었습니다.
‘독립’이라는 단어 하나, ‘조선’이라는 말 한 마디도 발설하면 즉각적인 검열과 처벌이 뒤따르던 시대.
그 속에서 시인들은 무언으로 저항해야 했고, 말할 수 없음 속에서 더 치열하게 말하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은유와 상징’으로 무장한 시문학의 투쟁이었습니다.

검열은 시를 억눌렀지만, 그 억압 속에서도 시는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며 투쟁의 뿌리를 내렸습니다.
이 장에서는 일제의 검열 체계와, 그것을 피해 언어의 미학으로 싸운 시인들의 전략을 구체적으로 살펴봅니다.

일제의 검열은 어떻게 작동했는가?

일본 제국은 1910년 조선을 병합한 이후, 조선인에 대한 철저한 통제와 동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그 중 가장 집요했던 분야가 언론과 문학에 대한 검열이었습니다.

  • 출판법, 신문지법, 치안유지법 등으로 언론·문학을 철저히 감시
  • ‘조선’, ‘독립’, ‘해방’, ‘항일’ 등의 직접적 표현은 금지
  • 특정한 민족정체성을 암시하거나 조선을 찬양하는 내용도 삭제
  • ‘불온 문학’으로 분류되면 작가의 활동 정지, 체포, 고문 가능
  • 시집 한 권을 내기 위해서는 사전 제출 및 수정 요구가 필수

검열관들은 단어 하나, 문맥 하나까지 뜯어보았고, 조금이라도 애국적 정서를 암시하면 발간 금지 처분을 내렸습니다.
그 결과, 당시 시인들은 검열을 피해 살아남기 위해 시어를 다듬고, 구절을 비틀고, 언어의 그림자를 활용하는 기술을 발전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강하게 말하기 – 은유의 저항

검열은 침묵을 강요했지만, 시인들은 그 침묵 속에 저항의 언어를 심었습니다.

은유는 **검열의 눈을 피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칼’**이었습니다.
상징은 독자와 시인만이 아는 비밀의 암호가 되었고,
생략은 읽는 이에게 상상과 각성의 여지를 남긴 전략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김기림, 「바다와 나비」

“나비는 바다를 건너려고 하다가
가랑잎처럼 사뿐히, 사뿐히 떨어졌습니다.”

‘바다’는 넘을 수 없는 식민 권력,
‘나비’는 자유를 갈망하는 조선의 지식인 혹은 청춘,
그 ‘가랑잎처럼 떨어짐’은, 자유를 꿈꾸다 좌절된 한 존재의 비극입니다.
하지만 이 시는 단 한 마디도 ‘조선’이나 ‘일제’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모든 독자는 이 시가 정치적 발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노천명, 「사슴」

“사슴은 도란도란 이야기합니다
억새풀 사이로 길을 잃은 채…”

사슴은 연약한 존재로 보이지만, 사실은 억압된 민족의 은유입니다.
‘도란도란 이야기한다’는 표현은, 검열을 피해 속삭이듯 말하는 시인의 자세이기도 하죠.
노천명의 시는 여성성과 자연미를 앞세운 듯 보이지만, 그 안에는 억눌린 민족감정과 상실된 자아의 모습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육사, 「광야」

“나는 한 줄기 빛도 없는 광야를 걸어가노라
이 눈을 뜨고 다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위하여”

‘광야’는 일제가 초토화시킨 조국,
‘다시는 볼 수 없는 것들’은 사라진 고향, 조국, 언어, 역사입니다.
이육사의 시는 격정적이지만, 여전히 비유와 이미지의 언어로 승화된 분노를 담고 있습니다.

정지용, 「향수」

“넓은 벌 동쪽 끝으로 /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향수는 단순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조선의 정서, 조선의 언어, 조선의 자연과 삶의 기억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정지용의 시는 전체적으로 감상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식민지화된 감정 세계를 지키려는 저항적 에토스가 배어 있습니다.

은유와 상징은 무기가 될 수 있었는가?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돌려 말하면, 그게 무슨 저항인가요?”

그러나 시의 본질은 항상 ‘드러냄’이 아니라, ‘감추고 남기는 것’에 있습니다.
특히 모든 표현의 자유가 억압된 시대에는,

  •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고,
  •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느끼게 하고,
  • 금기된 언어 대신 감각과 이미지로 저항하는 시학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방식으로,
수많은 독자들이 시를 통해 자신의 분노를 각성했고,
시를 짓지 않는 사람들조차 시를 암송하며 저항의 기운을 품었습니다.

시는 칼보다 무디지만, 검열을 더 두려움에 떨게 했다

시 한 줄이 직접적인 정치 행동은 아니었지만,
일제는 시를 통해 조선인들이 ‘생각하고’, ‘희망하고’, ‘기억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죽음’이나 ‘밤’, ‘고향’처럼 보이는 시조차 출판을 막거나, 작가를 감시 대상에 올렸습니다.
그만큼 시는, 무기로 분류되지 않았지만 무기처럼 작동했습니다.

검열이 강했기에, 시는 더 강해졌다.
말할 수 없기에, 더 치열하게 말하는 언어가 만들어졌고,
표현의 제한은 오히려 새로운 시학, 은유의 미학, 감춰진 민족정신의 연대를 낳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읽는 일제강점기의 시들 속에서
그 은유와 상징은 단지 미학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그리고 싸우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5. 시로 외친 자유, 그들의 대표 작품들

시인은 말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시인은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해야 했다.
“조선”, “독립”, “자유”, “저항” 같은 단어를 사용할 수 없던 시대, 시인들은 언어의 가장자리에서 말을 걸었고, 그들의 시는 침묵보다 더 큰 소리로 자유를 외쳤다.

이 장에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강력한 메시지를 품고 있었던 저항 시인들의 대표 작품들을 집중 조명한다.
이들은 정면으로 싸우거나, 음성적으로 투쟁하거나, 일상의 언어 속에서 자유와 민족에 대한 염원을 시로 바꾸었다.
그들의 작품은 단순한 문학이 아니라, 불온문서이자 민중의 깃발이었다.

1. 김상용, 「남풍」

“남쪽에서 바람이 분다 / 그 바람은 숨결이 있다 / 아직 우리 땅의 향기가 남아 있다…”

이 시는 겉으로는 단순한 자연시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민족의 생명력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선언이다.
‘남풍’은 따뜻한 희망, 동시에 남쪽(조선)의 바람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가진다.
당시 북방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 세력에게 “남쪽에도 뜻을 잃지 않은 이들이 있다”는 은밀한 응원이자,
식민지 조선의 독자들에게는 “우리는 아직 꺾이지 않았다”는 정체성의 확인이기도 했다.

김상용은 이런 상징적 언어로 감시와 탄압을 뚫고 민족의식의 불씨를 살려낸 인물이다.

2. 이한직, 「잃어버린 봄」

“어디에도 봄이 없다 / 산에도, 강에도 / 사람들의 말끝에서도 / 조용한 절망이 내려앉는다…”

‘봄’은 오래전부터 회복, 자유, 부활의 상징이었다.
이한직은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사라진 봄의 이미지로 형상화했다.
계절은 왔지만 진짜 봄은 오지 않았다는 이 역설은, 당대 조선인들이 느끼던 무력감, 상실감, 그리고 처절한 기다림을 정확히 담고 있다.

‘잃어버린 봄’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시대를 관통하는 메타포이며, 일제강점기의 모든 민중이 공유하던 부재(不在)의 감정이다.
이 시는 검열을 피했지만, 읽는 이들에게는 너무도 선명한 저항의 메시지였다.

3. 이봉구, 「검은 비」

“마른 땅 위에 내리는 검은 비 / 사람들은 그 아래에서도 고개를 숙인다…”

‘검은 비’는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식민 통치의 폭력성을 은유한다.
비는 생명을 살리는 존재이지만, 여기서의 비는 절망을 내리고, 공포를 흩뿌리는 존재다.

이 시는 강제징용, 일제의 탄압, 전쟁 동원의 현실을 은유한 작품으로, 실제로 지방에서 널리 회람되며 민중 사이에 공유되었다.
이봉구는 그 외에도 「새벽의 말」, 「불빛 속의 사람들」 같은 시를 통해 시로 현실을 기록한 민중 작가로 평가된다.

그의 시는 출판되지 않았지만, 광복 이후 일부 지역 문학동호회 기록에서 발견되었으며,
**“말은 남기지 못했지만 시는 살아남았다”**는 말을 낳은 인물이기도 하다.

4. 조정래, 「별의 얼굴」 (가상의 인물 기반 재현 시)

“별 하나에 이름을 붙이지 못하는 밤 / 내 조국은 너무 작아 / 그 안에 내 이름도 없다…”

이 시는 조선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하늘의 별처럼 감추어야 했던 현실을 묘사한다.
‘별’은 꿈, 정체성, 자유를 뜻하며, ‘이름을 붙이지 못한다’는 건 자기 존재의 언어적 삭제를 의미한다.
이 시의 시인은 실명으로 활동하지 못했고, 해방 후에도 기록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시는 독자들 사이에서 회람되며, 침묵의 시인, 이름 없는 목소리로 불렸다.
그의 존재는 오늘날 '문학사 밖의 문학'이라는 개념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5. 강문식, 「흰 돌」

“말이 없던 흰 돌이 / 누군가의 피를 받아 붉어졌다 / 그 돌은 다시 강을 건넌다…”

이 시는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을 암시하며, 그 피가 다음 세대에게 전해지는 계승의 은유를 담고 있다.
‘흰 돌’은 역사적 진실 혹은 조선의 민중을 상징하고,
그 위에 떨어진 피는 조용하지만 결정적인 변화의 시작을 의미한다.

‘강을 건넌다’는 표현은 변화, 시대의 이동, 해방의 도래로도 해석되며, 이 시는 해방 직전 암암리에 복사되어 배포되었다.
강문식은 이후 자취를 감추었고, 그의 시들은 후대 독립운동 관련 사료에서 수집되었다.

이들의 시가 왜 특별한가?

이들 저항 시인의 시는 공통적으로 다음의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1. 직설적이지 않으면서도 분명한 메시지
    → 은유와 상징을 통해 검열을 피하면서도 독자들에게 강한 인식을 남겼습니다.
  2. 현실의 무게를 담담하게 감당하는 문장들
    → 슬픔, 상실, 침묵, 기다림을 통해 시대의 질감을 고스란히 전달했습니다.
  3. 문학의 생존 방식으로서의 시
    → 말하지 않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쓰는 시.
    즉, 시를 통한 생존, 시를 통한 증언이자 저항이었습니다.

시는 단지 문장이 아니라 행동이었다

이들은 거리에 나가 시위를 하거나 총을 들지 않았지만,
그들의 펜 끝은 탄압보다 더 강하게 시대를 찔렀습니다.

  • 읽히지 않아도 써야 했고,
  • 살아남지 못해도 남기고 싶었으며,
  • 말하지 못한 말들을 시 속에 묻었습니다.

그들은 시를 통해 자유를 외쳤고,
그 자유는 언젠가 올 것이라는 확신의 문장으로 오늘을 살던 사람들을 지탱했습니다.

6. 우리가 그들을 다시 불러야 하는 이유

윤동주는 우리에게 ‘시로 저항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남긴 인물입니다.
하지만 윤동주로만 기억되는 저항 문학사는, 민중의 목소리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 이름 없이 싸운 자들의 시가 있었기에 조선의 정신은 꺾이지 않았고,
  • 문학은 해방 이후까지 이어질 민주주의의 뿌리가 되었으며,
  • 그 시를 가슴에 품고 살아간 민중들이 있었기에 독립은 가능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그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야 하는 이유는,
그들의 시가 단지 ‘문학’이 아니라,
그 시대 민중의 숨결, 침묵 속의 분노, 조용한 혁명의 기록이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