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역사 속 인물 탐구

전 세계를 움직인 김복동 할머니 이야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서 인권운동가로

지아니13 2025. 5. 26. 12:20

"우리는 단순한 피해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평화를 위한 활동가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자 세계적인 인권운동가였던 김복동 할머니의 이 한마디는, 전 세계인의 가슴을 울렸습니다.

전 세계를 움직인 김복동 할머니 이야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서 인권운동가로

김복동 할머니는 누구인가?

김복동 할머니는 1926년 경상남도 양산에서 태어났습니다. 평범한 시골 소녀였던 그는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조용한 일상을 보내며 자라났습니다. 그러나 그런 평온한 삶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식민 통치 아래 무참히 깨지고 맙니다. 불과 14살이던 1940년, 그는 ‘공장에서 일하게 해주겠다’는 거짓말에 속아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로 끌려갔습니다.

그 이후 김복동 할머니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낯선 전쟁터로 끌려가 중국,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지의 전선을 전전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는 일본군에게 반복적으로 성폭력을 당하는 끔찍한 고통을 겪었고, 소녀의 삶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삶의 의욕조차 빼앗긴 채 하루하루를 견뎌야 했던 그 시절은, 단순히 고통이라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인간 존엄성의 철저한 말살이었습니다.

해방 이후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김 할머니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아픈 과거를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 시절 한국 사회는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해 사회적 낙인과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수치심과 침묵을 강요당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오랜 세월을 그렇게, 마음속 깊은 곳에 상처를 안은 채 조용히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1992년, 김복동 할머니는 드디어 용기를 냅니다. 한국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 신고를 받기 시작한 바로 그 해, 김 할머니는 마이크 앞에 서서 처음으로 자신의 피해 사실을 공식적으로 증언합니다. 그 증언은 단순한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건 진실의 외침이자,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는 존엄한 선언이었습니다.

이후 김복동 할머니는 단순히 한 사람의 피해자가 아닌, 전 세계에 일본군 위안부의 진실을 알리는 인권운동가로서의 삶을 선택합니다.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와 법적 배상을 요구하며, 수많은 국내외 행사와 회의에 참석했고, 유엔 인권위원회와 미국 의회, 유럽의회 등 국제무대에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김복동 할머니는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애썼으며, 그 누구보다도 전쟁과 폭력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분입니다. 그녀의 삶은 단순한 역사 속 한 인물이 아니라, 정의와 평화, 인간 존엄을 향한 끊임없는 실천의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유엔을 울린 증언, 국제사회의 눈을 돌리다

김복동 할머니는 단순히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입은 생존자로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세상에 알리는 데 그치지 않고, 이 문제를 국제사회가 함께 해결해야 할 인권의 문제로 끌어올린 인물입니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일본 정부를 향해, 그리고 무관심하던 세계를 향해 담담하지만 강력한 목소리로 진실을 외쳤던 활동가였습니다.

1990년대 초반, 김복동 할머니는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하자마자 국내외의 수많은 인권 회의와 증언 집회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1993년과 1994년에는 유엔 인권위원회 회의에 참석하여 전 세계 대표들 앞에서 자신의 피해 사실을 상세히 증언했습니다. 이는 당시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일본군의 조직적 성폭력 문제를 단순한 양국 간 분쟁이 아닌, 전시 성폭력이라는 보편적 인권 침해 사안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김 할머니는 제네바, 뉴욕, 파리, 베를린, 도쿄, 워싱턴 D.C. 등 전 세계 주요 도시를 직접 찾아다니며 기자회견과 강연을 열었습니다. 미국의 하버드대학교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주제로 한 강연에서, 학생들과 인권단체 관계자들 앞에서 눈물 어린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평화를 원합니다. 다시는 어떤 소녀도, 어떤 여성도, 전쟁터에서 저처럼 짓밟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메시지는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과 각성을 주었고, 김 할머니의 존재는 점차 세계 인권운동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의 증언은 국제사회가 전쟁 중 성폭력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접근하고 법적·도덕적 기준을 재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실제로 김복동 할머니를 비롯한 피해자들의 증언 이후, 유엔은 전쟁 중 성폭력을 전쟁범죄 및 인도에 반한 죄로 규정하기 위한 논의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세계 각국의 인권 단체와 여성단체들도 김 할머니의 활동을 계기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뿐만 아니라 보스니아, 르완다, 콩고 등지의 전쟁 성폭력 피해자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김복동 할머니의 증언은 단순히 과거의 고발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현재와 미래를 향한 강력한 메시지였습니다. 전쟁이 만들어낸 고통, 국가가 방조한 범죄, 그리고 침묵 속에 묻힌 진실을 세상 밖으로 드러냄으로써, 그는 인간의 존엄성과 정의가 회복될 수 있음을 몸소 보여준 것입니다.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국제 인권 단체와 교육 기관에서 김복동 할머니의 증언과 삶은 전시 성폭력에 대한 교육 자료이자 행동의 모범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고, 여전히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정의와 평화의 가치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위안부는 평화운동가다" – 김복동의 삶의 전환

김복동 할머니는 자신을 단순한 **‘피해자’**로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내가 겪은 고통을 세상에 알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겠다"는 다짐을 가지고, 전쟁과 폭력 없는 세상을 위한 실천적 활동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침묵을 깨고 자신의 아픈 기억을 증언한 이후, 그는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고 현재와 미래를 위한 운동에 온 생애를 바쳤습니다.

그의 삶의 전환점은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행동으로 이어지는 기억의 실천이었습니다. 김 할머니는 매주 수요일마다 서울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 빠지지 않고 참여했습니다. 몸이 불편할 때에도 휠체어에 앉아 피켓을 들었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거리에서 정의를 외쳤습니다. 그의 모습은 어느새 평화와 인권의 상징이 되었고, 많은 시민들이 그를 따라 함께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김복동 할머니는 ‘평화의 소녀상’ 건립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소녀상은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고 정의로운 해결을 촉구하기 위한 역사적 증언의 상징물입니다. 그는 전국과 세계 각지에 소녀상이 세워질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힘을 보탰으며, 실제로 미국, 캐나다, 독일, 호주 등지에 설치된 해외 소녀상들도 김 할머니의 의지와 용기에서 큰 영감을 받은 결과물입니다.

특히 김복동 할머니가 가장 큰 애정을 쏟은 프로젝트 중 하나는 바로 **‘나비기금’**이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한국 내 위안부 문제 해결에 머물지 않고,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폭력으로 고통받는 여성들과 연대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2012년, 김 할머니는 자신의 사비와 시민들의 후원금을 모아 '나비기금'을 설립했습니다.
이 기금은 콩고, 베트남, 우간다, 시리아, 이라크, 미얀마 등 전쟁 성폭력 피해 여성들에게 치료비, 생계비, 교육비 등을 지원하며, 실질적인 치유와 자립을 돕고 있습니다.

‘나비기금’이라는 이름은 단순한 은유가 아닙니다. 위안부 피해자들을 상징하는 ‘나비’는 억압과 침묵을 딛고 날아오르는 자유의 의미를 품고 있으며, 김복동 할머니는 자신이 겪은 고통의 기억을 그런 자유로운 날갯짓으로 승화시켰습니다. 나비기금은 과거의 피해를 기억하는 동시에, 현재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고 치유하려는 세계적 연대 운동으로 확장되어 왔습니다.

김복동 할머니는 언제나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단지 일본에 사과받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는 우리 같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이 말처럼, 그는 피해의 기억을 개인의 고통에 머물게 하지 않고, 인류 공동의 과제인 평화와 정의를 위한 발판으로 전환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김복동 할머니를 **‘평화운동가’, ‘인권의 상징’, ‘전시 성폭력 반대의 세계적 목소리’**로 기억합니다. 그는 생을 마치는 날까지도 피해자라는 위치를 넘어, 세상의 변화를 꿈꾸고 행동한 진정한 활동가였습니다.

다큐멘터리 《김복동》과 그가 남긴 유산

2019년 8월, 김복동 할머니의 삶과 투쟁을 생생히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김복동》**이 개봉했습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전기적 서사에 그치지 않고, 한 인간이 고통을 넘어 어떻게 전 세계적인 평화운동의 상징으로 변화해 갔는지를 조명한 깊이 있는 기록물이었습니다. 영화는 할머니의 증언 여정, 거리 시위, 국제 활동, 나비기금 설립 등 생애 전반의 진실하고 치열한 순간들을 있는 그대로 담아냈고, 관객들에게 잊을 수 없는 울림을 안겨주었습니다.

특히 영화 속 김복동 할머니의 모습은 ‘피해자’라는 단어로는 도저히 다 담아낼 수 없는 강인한 존재였습니다. 관객들은 화면 속 그녀의 목소리에 울고, 그녀의 외침에 분노하며, 또 그녀의 따뜻한 눈빛과 단단한 의지에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수많은 관람 후기에는 "역사를 배우는 것을 넘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김복동이라는 이름을 이제 절대 잊을 수 없다"는 말들이 이어졌습니다. 이 영화는 상영 이후 한국은 물론 해외 각국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고, 다양한 인권영화제에서 초청받아 상영되며 전쟁 성폭력 문제에 대한 인식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해 1월 28일, 김복동 할머니는 향년 9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별세 소식이 전해지자, 대한민국은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수많은 언론은 그를 “시대의 증인”, “평화운동의 거목”, “정의의 외침을 평생 멈추지 않았던 여성”으로 추모했고,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그의 장례식장을 찾아 조문하며 고인의 뜻을 기렸습니다. 서울시는 김복동 할머니의 장례를 ‘시민장’으로 엄수했고, 이는 한 개인이 이룬 도덕적 권위와 사회적 영향력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상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김복동 할머니가 남긴 유산은 단지 과거에 대한 기억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가 생전 직접 참여하고 지켜온 ‘수요시위’는 지금도 매주 수요일마다 쉼 없이 이어지고 있으며, 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시민운동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을 비롯해 미국, 캐나다, 독일, 호주 등 세계 곳곳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은 단지 하나의 조형물이 아니라, 역사를 기억하고 현재의 인권 문제를 직면하자는 상징적 외침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김복동 할머니의 용기와 행동이 만든 결과입니다. 그는 평생을 바쳐 ‘기억하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보여주었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인간의 존엄과 책임이라는 점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녀의 유산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과거의 고통을 어떻게 기억하고, 앞으로의 세상을 어떻게 바꿔나갈 것인가?"

김복동이라는 이름은 이제 하나의 사람이 아닌, **시민의 기억 속에 살아 숨 쉬는 '행동하는 양심'**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유산을 이어받아, 더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가야 할 책임을 안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유

김복동 할머니의 삶은 단지 고통의 기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정의와 존엄을 회복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이자, 기억을 행동으로 이어간 인간의 위대한 여정이었습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금, 우리가 그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한 추모의 차원을 넘어, 역사를 통해 오늘을 성찰하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책임을 자각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김복동 할머니는 전쟁의 피해자였지만, 자신의 아픔을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공공의 의제와 인류 보편의 문제로 승화시킨 인물입니다. 그는 묵묵히 고통을 견디는 대신, 그것을 말하고, 기록하고, 사람들에게 알리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에너지로 바꿨습니다. 이러한 용기 있는 목소리는 단 한 사람의 외침이 아닌, 억울하게 침묵당한 수많은 여성들을 대신한 집단적 증언의 상징이 되었고, 나아가 인권과 평화의 목소리로 전 세계에 울려 퍼졌습니다.

우리가 김복동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단지 그녀의 생애를 기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의 인권 문제와 맞서는 태도를 배우는 일입니다. 여전히 전 세계 곳곳에서는 전시 성폭력, 젠더 폭력, 역사 왜곡 등의 문제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 피해자들은 오늘도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현실에 놓여 있습니다. 김복동 할머니의 증언은 그들에게 연대의 메시지를 보내고, 우리에게는 침묵하지 않는 양심의 기준이 되어줍니다.

또한 김 할머니의 삶은 ‘기억’이라는 것이 단순히 과거에 머물지 않고, 지속적인 실천과 책임을 동반해야 한다는 점을 강하게 일깨워줍니다. 매주 이어지는 수요시위, 전 세계에 퍼진 평화의 소녀상, 나비기금을 통한 국제적 연대 활동은 모두 그녀가 남긴 **‘살아 있는 기억’**입니다. 그것은 종이 위의 기록이 아니라, 거리 위의 목소리이며, 행동하는 양심들의 연대입니다.

김복동 할머니는 말했습니다.
"나는 사죄를 받아야만 비로소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이 말은 단지 일본 정부를 향한 요구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도덕적 질문이자, 역사 앞에 선 인간의 정직한 절규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그가 남긴 유산을 지키고, 그가 전한 진실을 이어가며, 더 이상 어떤 소녀도 ‘그 시절의 김복동’이 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역사는 반복되기 쉬우며, 망각은 늘 폭력보다 더 위험한 방식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기억을 행동으로 이어가야 합니다.

함께 보면 좋은 콘텐츠

김복동 할머니의 삶과 메시지를 더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 다음의 콘텐츠들을 함께 접해보는 것을 권합니다. 그녀의 증언이 어떻게 다큐멘터리로, 책으로, 그리고 운동으로 확장되었는지 살펴보면, 김 할머니가 남긴 유산이 단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숨 쉬는 역사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김복동》(2019)

정윤석 감독이 연출한 이 작품은 김복동 할머니가 생전에 남긴 영상과 육성을 바탕으로 제작된 진정성 깊은 기록물입니다. 단순한 인물 다큐멘터리를 넘어, 인권운동사와 여성사, 전쟁사를 아우르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할머니의 증언뿐만 아니라 그녀가 세계 곳곳을 누비며 전한 평화의 외침, 그리고 병상에 누워서도 놓지 않았던 정의에 대한 갈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관객들에게 깊은 감동과 질문을 동시에 안깁니다. 각종 인권영화제에서 초청 상영되었으며, 지금도 다양한 플랫폼에서 관람이 가능합니다.

도서: 《나의 이름은 김복동입니다》

이 책은 김복동 할머니의 자서전적인 성격을 담은 도서로, 그녀의 어린 시절부터 위안부로 끌려간 참혹한 경험, 돌아와 겪은 고통, 그리고 이후 인권운동가로서의 삶까지 한 사람의 생애를 오롯이 따라가는 기록입니다. 담담한 어조 속에 숨어 있는 뜨거운 의지와 용기, 그리고 세상과 화해하려는 한 인간의 고뇌가 독자들의 가슴을 울립니다. 역사 교육이나 인권 관련 독서 자료로도 많이 활용되고 있으며, 청소년과 일반 독자 모두에게 권할 만한 책입니다.

정의기억연대 홈페이지 

김복동 할머니를 포함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권리 회복을 위해 오랜 시간 활동해온 대표적인 시민단체입니다. 정의기억연대 홈페이지에서는 김복동 할머니의 활동 기록, 영상 자료, 관련 뉴스, 전시회 정보, 소녀상 지도 등 풍부한 콘텐츠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일본 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지속적인 국제 캠페인에 참여하거나, 후원 및 연대 서명 등의 실천적 참여도 가능합니다.

‘나비기금’ 후원 방법 안내

김복동 할머니의 뜻을 이어받아 설립된 나비기금은 전 세계 분쟁 지역의 전쟁 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돕기 위한 국제 연대 기금입니다. 콩고, 우간다, 베트남, 시리아 등 다양한 지역의 여성들이 의료적 지원, 생계 지원, 심리 치료, 교육 기회를 받을 수 있도록 돕고 있으며, 이는 단순한 자선이 아닌 존엄 회복을 위한 연대의 실천입니다. 정의기억연대 홈페이지를 통해 정기 후원, 일시 기부, 모금 캠페인 참여 등이 가능하며, 후원자에게는 기금의 사용 내역과 활동 보고가 투명하게 공유됩니다. 작은 정성이지만, 그것이 세상을 바꾸는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김복동 할머니 관련 영상 강연, 소녀상 위치를 알려주는 AR 지도 앱, 전시회 정보 등 다양한 연계 자료가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꾸준히 찾아보시길 권장합니다.

“김복동 할머니를 기억하는 일은, 곧 우리 자신을 지키는 일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