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역사 속 인물 탐구

잊힌 실천가, 이관술을 다시 보다 – 좌익도 우익도 아닌 항일 전사

지아니13 2025. 5. 24. 10:50

사회주의자였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배제되었던 독립운동가 이관술.
그러나 그의 삶은 이념이 아니라 행동으로 증명된 실천가의 여정이었다.
이제는 재조명되어야 할 ‘좌우를 넘은 독립운동가’의 삶을 들여다본다.

이관술은 누구인가?

**이관술(李觀述, 1895~1950 추정)**은
일제강점기에서 해방 후 분단기까지를 관통하며,
끊임없이 현실과 이상, 조직과 실천 사이에서 길을 모색했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입니다.

그는 한 시대의 대표적인 좌익 인물이자,
이념을 넘어선 실천가형 민족운동가로 평가받아야 할 복합적인 정체성의 소유자입니다.

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지식인 독립운동가’의 시작

이관술은 1895년 충청남도 예산군의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한학과 근대 교육을 함께 익혔고,
**경성고등보통학교(현 서울고등학교)**를 거쳐 일본 유학길에 오르며
조선인 엘리트 계층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는 단지 지식을 습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제의 억압과 제국주의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을 키워가며
본격적인 독립운동가의 길에 들어섭니다.

일본과 독일을 거쳐 ‘사상과 행동’이 결합된 독립운동으로

이관술은 일본 유학 중 사회주의 사상과 계급 해방 이론을 접하고,
이후 독일 유학을 통해 유럽식 마르크스주의와 민주주의 이론을 통합적으로 습득합니다.
그의 유학은 단지 학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해방을 위한 전략적 사고틀'을 만들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습니다.

귀국 후 그는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 학생운동, 노동조합 조직, 지하신문 발간
다양한 경로를 통해 반일 민족운동과 사회 개혁 운동을 병행하며
당시 민중 계몽운동의 핵심 축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됩니다.

실질적 조직가, 전략가, 실천가

이관술은 단순한 이념 지식인이 아니라,
철저히 조직 중심의 현장 실천가였습니다.
그는 1930~40년대 일제의 감시망 속에서도
조직 재편, 자금 모금, 간부 교육, 거점 분산 전략 등을 통해
항일운동을 현실 가능한 방식으로 이끌어갔습니다.

특히 그의 활동은
항일 무장세력과 지식인 그룹, 도시 노동계층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했으며,
이는 독립운동의 '좌파 계열'이 단순 이념 그룹이 아니라
실제로 조선 민중 속에서 뿌리내렸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해방 후 정치의 격랑 속에서 사라지다

광복 이후 이관술은 남북 과도기 정치에서
남조선로동당 결성에 관여하고,
1948년 제헌의회 선거에 무소속으로 입후보했으나 낙선합니다.
곧이어 좌우 갈등이 격화되며 그는 월북하게 되고,
북한 정권 수립 초기 일정 역할을 맡았지만
1950년 6.25 전쟁 직전 또는 전후에 숙청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사망 시점, 장소, 과정조차 명확하게 기록되지 않은 그는
역사 속에서 ‘불편한 존재’로 밀려나며 긴 침묵에 갇히게 됩니다.

역사적 평가: ‘삭제된 독립운동가’, 그러나 다시 떠오르는 이름

이관술은 생전 일제의 감시대상 1급 요주의 인물
일본 헌병대가 가장 경계했던 항일운동 실력자 중 하나였습니다.

그럼에도 해방 이후 ‘좌익’이라는 딱지가 붙으며
그의 삶 전체는 단절되고 왜곡되었고,
교육과 기록에서 삭제된 비운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 보훈처의 복권 논의 대상자,
  • 역사학계에서의 재평가 흐름,
  • SNS·대중 콘텐츠를 통한 청년세대의 재발견
    등을 통해 그의 이름이 점차 복원되고 있습니다.

잊힌 실천가, 이관술을 다시 보다 – 좌익도 우익도 아닌 항일 전사

독립운동가인가, 좌익 정치인인가?

이관술이라는 이름은 지금도 역사와 정치의 경계선에 서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의 중심에서 실질적 기여를 했던 조직가이자 전략가였지만,
해방 이후에는 좌익 정당 활동과 월북 경력 때문에
오랫동안 ‘독립운동가’로서의 자격조차 인정받지 못해 왔습니다.

사회주의 계열 항일운동의 핵심 실천자

이관술은 조선공산당,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대, 남조선신민당
1930년대부터 40년대 중반까지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 조직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했습니다.
이 조직들은 단순히 이념적 지향을 넘어서
실제 무장 투쟁, 국내외 거점 구축, 군자금 조달, 청년 지식인 양성 등을 통해
현장에서 피와 땀을 흘린 실천적 독립운동 세력이었습니다.

특히 이관술은

  • 국내 독립운동조직의 재건을 위한 통신망 구축
  • 일제 밀정 침투 방지와 보안 시스템 설계
  • 동아일보 및 진보계열 출판물과의 정보 연계
    등을 통해 항일운동의 전략적 설계자이자 실행자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일본 경찰이 “가장 위험한 인물”로 지목한 이유

1930~40년대, 조선 내 항일운동의 중심이 무장투쟁에서 지하조직과 지식인 계몽으로 확장될 때,
이관술은 **‘지식인과 민중을 잇는 정치 조직가’**로 주목받았습니다.
일본 헌병대와 경찰청 기록에는
“조선인 지하 조직 중 가장 고도로 은밀하고 지속적인 활동을 한 인물”,
**“수차례 검거에도 불구하고 조직 재편에 능한 위험인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그의 활동은 단지 선동에 그치지 않고

  • 내부 조직 교육
  • 세포조직 재건
  • 재정 지원 루트 개척
  • 각 지역별 연락책 배치
    등 치밀한 전략성과 실행력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일본 제국이 가장 경계한 ‘실행형 지식인 독립운동가’ 중 한 명이었습니다.

해방 이후, ‘월북’이라는 한 단어로 지워진 역사

광복 후 혼란 속에서 좌우 갈등이 격화되면서,
이관술은 남한 내 정치 기반 확보에 실패하고 결국 북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는 남조선로동당의 조직 재정비에 참여했으며,
이후 월북하여 초기 북한 정권 수립 과정에서 일정한 정치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1950년 6.25 전쟁 전후,
김일성 체제 내 정치 숙청 과정에서 사라졌고,
사망 경위나 위치조차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대한민국에서는 그를 ‘월북자’이자 ‘좌익 정치인’으로 낙인 찍었고,
그가 남긴 방대한 항일운동의 기록과 공로는 철저히 외면되었습니다.

진실은 하나의 프레임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관술은 공산주의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보다 먼저 조선의 해방을 꿈꾼 행동가였습니다.
그의 선택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 이뤄졌고,
그의 이념은 자유와 평등, 독립이라는 가치 실현의 수단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항일 활동은 분명히 **‘독립운동’**이며,
그의 정치적 경로는 **‘복합적 맥락의 산물’**로 읽혀야 마땅합니다.
그를 단순히 ‘좌익 정치인’으로 낙인찍는 일은,
동시에 우리 독립운동사 자체를 축소하고 왜곡하는 일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합니다

  • 이관술은 독립운동가인가, 좌익 정치인인가?
  • 아니, 어쩌면 더 중요한 질문은
    그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싸웠는가가 아닐까요?

그의 삶은 흑백의 선택지가 아니라, 회색의 진실을 보여주는 역사적 거울입니다.
우리는 이제야 비로소, 이관술이라는 이름을 온전히 마주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삶은 ‘이념’보다 ‘실천’에 가까웠다

이관술의 이름 앞에는 늘 따라붙는 말이 있습니다.
‘사회주의자’, ‘공산주의 계열’, ‘좌익 독립운동가’
하지만 그의 생애와 활동을 단지 이념적 프레임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그가 실천했던 수많은 현장의 고뇌와 투쟁, 그리고 민중과의 접촉점을 지워버리는 일입니다.

해방과 평등은 그에게 ‘이념’이 아니라 ‘도구’였다

이관술은 분명히 사회주의 사상에 기반한 활동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념을 절대화하거나, 교조적으로 신봉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사회주의를 받아들인 이유는 단 하나,
조선이라는 피식민 사회에서 억압받는 다수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 민족 차별
  • 계급 불균형
  • 식민권력의 구조적 착취
    로 신음하고 있었고, 그는 이를 타파할 수 있는 길을
    **'현장에서의 교육과 조직', '의식의 계몽', '실질적 평등의 실현'**에서 찾았습니다.

'실천가 이관술'의 면모가 드러나는 대표 활동들

이관술은 사무실이나 연단 위의 지식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늘 현장에 있었고, 조직 속에 있었으며, 사람들 사이에 있었습니다.
그의 삶을 실천 중심의 독립운동가로 규정짓는 대표 사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독립자금 조직 및 분배

그는 지하조직을 통해 무장 독립군과 계몽단체에 필요한 자금 조달 루트를 구축하고
안전하게 분산·운용할 수 있는 내부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단순 모금이 아니라,
자금 흐름과 정보 보안이 동시에 관리되는 실전형 네트워크였고,
당시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지하 항일 경제망’의 중심이었습니다.

2. 도시 노동자 대상 교육 조직

이관술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단순한 생계 노동자’에서 ‘사회적 주체’로 전환될 수 있도록
기초 문해 교육, 노동권 개념 교육, 단체 행동 훈련 등을 포함한
‘노동자 의식화 교육 프로그램’을 주도했습니다.
이는 단지 독립운동의 외연을 넓힌 것이 아니라,
근대적 시민 형성의 출발점이기도 했습니다.

3. 여성의 정치적 참여 구조화

그는 조선의 여성들이 단순한 ‘운동 보조자’가 아닌
조직 내 기획자, 활동가, 간부로 성장할 수 있도록 유도했습니다.
이관술이 주도한 일부 지하조직은
초기부터 여성 동지를 독립된 세포조직의 주체로 인정했고,
이는 후대 여성운동사에서 선구적 시도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4. 청년 지식인 네트워크와 간부 양성

당시 고등교육을 받은 조선 청년들은
지식은 있었지만 활동할 조직이 없거나,
이념은 있었지만 현실 전략이 없었습니다.
이관술은 지식인들의 정치화, 실천화, 네트워크화를 유도해
항일운동의 ‘두뇌와 손발’을 모두 확보하려 했습니다.
그가 직접 개입한 ‘지하 청년 간부 조직’은
해방 이후 좌우 진영 모두에서 중요한 인적 기반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론가가 아닌, 철저한 ‘현장주의자’였다

이관술은 책상 위에 머문 적이 없습니다.
그는 늘

  • 현장에서 조직을 만들고
  • 자금을 유통하며
  • 사람을 키우고
  • 사상을 행동으로 연결하는
    실천의 정치를 구현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단지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민중주의자이자 행동주의 독립운동가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릅니다.

다시 묻습니다. 이관술은 누구였는가?

이관술은 **‘이념의 인물’이기 전에 ‘현장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이상을 외치기보다, 조직을 만들고 사람을 움직이며,
해방이라는 꿈을 땅 위에 내리려 애쓴 사람
이었습니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이제는
“좌파인가 우파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했는가, 누구를 위해 살았는가”로 옮겨져야 할 때입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인물, 다시 기억될 수 있을까?

그는 6.25 전쟁 직전 북한에서 숙청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정확한 사망 기록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의 이름은 해방 후 정치에서 사라졌고,
그의 공적은 이념 논쟁과 냉전 프레임 속에서 오랫동안 금기어로 남았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 국가보훈처의 재평가 대상 독립운동가,
  • 서울대·성균관대 등 연구기관의 복권 논의,
  • ‘진보도 보수도 아닌 실천가’라는 문화사적 해석
    을 통해 그의 삶이 다시 조명받고 있습니다.

지금, 왜 이관술이어야 하는가?

  •  청년 세대는 진영보다 가치와 실행을 봅니다.
  •  ‘선/악’, ‘친일/애국’이라는 이분법에 피로감을 느낍니다.
  •  이관술은 정치적 경계를 넘은 실천가형 리더로,
    MZ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역사적 모델입니다.

그는 ‘완벽한 영웅’은 아니지만,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움직인 문제적 인간이었습니다.

정리 요약

항목                                              내용

 

이름 이관술 (李觀述)
출생/사망 1895~1950?
활동 사회주의 계열 항일운동, 조선공산당, 독립동맹
주요 특징 좌우 이념을 넘은 조직가, 전략가, 독립운동 실천가
현재 재조명 이유 삭제된 독립운동가 복권, 가치 중심 역사 해석 흐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