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역사 속 인물 탐구

100년을 앞선 페미니스트, 나혜석 이혼을 고백한 최초의 여성 화가

지아니13 2025. 5. 23. 09:57

화가, 작가, 독립운동가, 그리고 여성 인권을 외친 시대의 반란자.
나혜석은 단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여성도 인간이다’라는 외침으로 일제강점기 조선 사회에 충격을 던졌던
가장 급진적이고도 외로운 ‘선구자’였습니다.

100년을 앞선 페미니스트, 나혜석 이혼을 고백한 최초의 여성 화가

나혜석은 누구인가?

**나혜석(羅蕙錫, 1896~1948)**은 단순히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녀는 예술, 사상, 사회운동, 여성주의 담론 전반에 깊숙이 발을 들였고,
일제강점기라는 제약된 시공간 속에서 여성도 예술을 통해 말할 수 있으며,
자기 몸과 인생의 주체로 살아갈 수 있다는 선언을 행동으로 증명한 인물
입니다.

그녀는 진명여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쿄 여자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본격적으로 공부한 한국 여성 최초의 전문 화가로 평가받습니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업적이 아니라,
당시 대부분의 여성이 정규 교육조차 받기 어려웠던 상황에서
여성도 예술을 전공하고, 전시하고, 사회적 메시지를 생산할 수 있음을 보여준 선례였습니다.

3·1운동의 주체, 여성 지성의 실천자

1919년, 나혜석은 예술가로서의 길만 걸은 것이 아니라,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운동에도 능동적으로 참여합니다.
그녀는 3·1운동 당시 학생대표로 시위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고,
수형 생활 속에서도 여성 민족지사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며 언론에 등장합니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그녀가 자신의 ‘여성성’이 단지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의 실천 가능성을 지닌 힘이라는 것을
직접 행동으로 보여준 사례입니다.

한국 최초의 여성 개인전 – “내가 본 세상을 그린다”

1921년, 그녀는 한국 여성 최초로 **개인 화전(전시회)**을 열고
자신의 작품을 공개적으로 전시합니다.
이는 여성의 ‘표현 행위’가 미술관, 언론, 비평의 영역으로 진입한 역사적 전환점이었습니다.

당시 나혜석은 풍경화, 인물화, 자화상을 중심으로
여성이 바라본 일상, 감정, 정체성을 표현하며
‘남성의 시선’이 아닌 ‘여성 스스로의 시선’을 담은 작품을 선보입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내가 그리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느낀 나 자신이다.”

여성 인권과 이혼 고백 – 한국 페미니즘의 시초

나혜석은 글로도 시대를 도발했습니다.
『이혼고백서』(1934)는 단지 개인의 고백문이 아니라,
여성이 스스로의 성적 자유와 감정을 해석하고,
그로 인해 당한 사회적 억압과 모순을 정면 비판한 문학적 선언
입니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이혼’은 여성에게 낙인이자 불명예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나는 사랑받지 못한 아내였고,
이혼을 택한 이유는 단지 그 남자를 떠나고 싶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녀의 이런 고백은 전통 윤리관을 정면으로 비판했고,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감정 표현의 자유를 주장한 한국 여성주의 글쓰기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질문했다 – “왜 여성은 인간으로 살 수 없는가?”

나혜석의 삶은 끊임없는 질문과 도전의 연속이었습니다.

  • 왜 여성은 정조를 강요받고, 남성은 용서받는가?
  • 왜 결혼은 여성에게만 희생을 요구하는가?
  • 왜 예술계에서 여성은 비평이 아니라 외모로 평가되는가?

이러한 물음은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그녀가 시대를 초월해 현대의 MZ세대에게도 울림을 주는 이유입니다.

예술가로서의 나혜석 – 여성의 시선으로 그린 세계

나혜석은 한국 여성 미술사의 기념비적 존재입니다.
그녀는 일본 도쿄 여자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본격적으로 전공한 최초의 조선 여성 예술가였으며,
그 당시 여성에게는 드물었던 ‘자기 표현의 기술’을 훈련받은 주체적 창작자였습니다.

유학 초기, 나혜석의 그림은 일본 및 유럽의 인상주의적 화풍과 아카데믹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풍경, 정물, 인물 등의 전통적 주제를 다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는 단순한 자연 묘사나 관습적 구성에서 벗어나
여성의 감정, 불안, 억압, 소망, 자아의 파편화 등 보다 내면적인 주제에 집중합니다.

“나는 내가 본 여성을 그린다”

당시 미술계는 철저히 남성 중심적 시선(‘Male Gaze’)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여성은 주로 그림 속의 피사체(모델)였지, 작품을 창조하는 ‘화가’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나혜석은 이 틀을 깨고, 여성 화가가 여성의 삶을 그리는 **‘여성 시선의 회화’**를 선보인 최초의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남성의 눈에 비친 여성이 아니라,
여성이 자기 몸과 감정을 직접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림은 단순한 미적 대상이 아니라, 사회적 메시지의 캔버스였고,
그녀는 그림을 통해 여성 억압의 구조를 시각화하고, 자신을 재현해낸 시대의 시각 작가였습니다.

대표작 속 여성의 존재 읽기

1. 《결혼의 환상》

이 작품은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한 여성의 기대와 현실의 괴리를 표현한 문제작입니다.
배경의 흐릿한 풍경, 반쯤 흐려진 표정, 긴장된 손의 묘사는
단지 사랑이나 동경이 아니라, 결혼이 여성에게 강요하는 ‘역할’과 ‘침묵’을 상징합니다.

2. 《모자상(母子像)》

여성의 모성성을 찬미하는 전통적인 구도처럼 보이지만,
나혜석의 《모자상》은 아이와 엄마 사이의 거리감, 정적(靜的)이고 음울한 분위기로 인해
‘모성’을 이상화하지 않고, 오히려 그 내면의 고독과 무게를 그려냅니다.

3. 《자화상》

자기 얼굴을 그린 자화상은, 나혜석이 화가로서 스스로를 위치 지운 선언적 작업입니다.
그녀는 고전적 아름다움이나 여성적 꾸밈을 거부하고,
화가의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강한 시선과 당당한 자세를 표현합니다.
이 그림은 “나는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창조하는 사람이다”라는 여성 예술 주체의 상징적 선언입니다.

4. 《정조의 미덕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제목부터 도발적인 이 작품은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된 ‘정조 담론’을 비판하는 시각적 에세이입니다.
이 그림은 공개적으로 전시되지 않았지만, 제목과 함께 존재한 스케치와 텍스트 일부는
여성의 몸, 성, 권리를 스스로 해석하려는 적극적 시도로 평가됩니다.

나혜석의 회화는 왜 ‘출발점’이었는가?

나혜석은 ‘여성도 예술을 할 수 있다’는 증거였을 뿐 아니라,
“여성이 주체적으로 세상을 재현할 수 있다”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녀가 그린 그림은 단순히 기술적으로 유려하거나 미학적으로 독창적이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무엇을 그리고, 왜 그리고, 누가 그리는가’에 대한 철학적 선언이었기 때문입니다.

  • 그녀는 여성이 그리는 여성성의 복잡한 정체성을 그렸고,
  • 감정의 무게, 억압의 구조, 사회의 침묵을 붓끝에 실어 말했습니다.
  • 나혜석 이전의 여성은 풍경 속에 있었고,
  • 나혜석 이후의 여성은 풍경을 그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여성 예술가들에게 남긴 유산

나혜석의 작품은 현재 미술계에서도 점점 재조명되고 있으며,
현대 여성 예술가들의 ‘자화상’, ‘여성 몸의 표현’, ‘가부장제 비판’ 작업과도 깊은 연결고리를 지닙니다.

그녀의 회화는 단지 아름다움을 위한 장식이 아니라,
사회적 저항이 담긴 언어였고, 정체성과 존재에 대한 탐색이었습니다.

작가로서의 나혜석 – 사회에 던진 불편한 질문들

화가 나혜석은 붓뿐만 아니라, 펜으로도 시대를 찔렀던 예술가였습니다.
그녀는 그림을 통해 여성의 정체성과 감정을 표현했을 뿐 아니라,
글을 통해 사회 구조와 도덕적 위선을 정면으로 비판한 지성인이기도 합니다.

그중 가장 유명하고도 논쟁적인 저작이 바로 1934년에 발표한 **『이혼고백서』**입니다.
이 글은 단순한 사적 고백이 아니라, 여성의 삶과 성, 자유, 결혼제도에 대한 체계적이고 정치적인 문제 제기였습니다.

『이혼고백서』는 무엇이었나?

『이혼고백서』는 나혜석이 결혼과 이혼, 연애와 정조, 그리고 여성의 인간적 욕망과 자기 결정권에 대해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사회 구조를 흔드는 목소리로 써 내려간 기록입니다.

그녀는 글에서 남편 김우영과의 결혼 생활의 불행, 외로움, 부부 간의 성적 소외,
그리고 이후 유럽 여행 중 만난 외교관 최린과의 사랑, 그리고 이로 인한 이혼 과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그러나 이 글의 핵심은 단순한 연애사가 아닙니다.
그녀는 이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은 본질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정조는 왜 여성에게만 요구되는가?”
“사랑은 남성의 선택이고, 여성은 왜 그에 따르기만 해야 하는가?”
“결혼은 여성의 인격을 부정하고, 남성의 권리를 과잉 부여한 제도가 아닌가?”
“나는 ‘사랑하고 싶다’는 감정 하나로 사람을 떠날 자유가 없다면, 나는 인간이라 할 수 있는가?”

이러한 고백은 그 당시 조선의 유교적 도덕관념과 남성 중심 사회에 날린 도전장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의 반응 – 환영이 아닌 낙인의 시작

『이혼고백서』가 발표되자, 사회는 충격과 비난으로 들끓었습니다.
신문은 그녀를 “정조 관념을 파괴한 망나니 여성”, “도덕적 타락자”로 몰았고,
한때 그녀를 지지하던 예술계, 언론계, 여성계에서도 침묵하거나 그녀를 외면했습니다.

  • 남성 사회는 ‘자기 욕망을 말하는 여성’을 견디지 못했고,
  • 여성 사회는 ‘여성을 대표해버린 여성’이 주는 두려움에 등을 돌렸으며,
  • 가족과 지인들마저 그녀의 글을 “여성의 수치”라고 여겼습니다.

그녀는 『이혼고백서』 이후 전시 요청도 끊기고, 글 출간도 중단되며 생계 자체가 어려워졌고,
사회적으로도 철저히 고립된 채 가난과 병으로 1948년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녀는 외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글을 통해 ‘신여성’이라는 개념에 대한 사회적 오해도 지적합니다.
당시 ‘신여성’은 화장을 하고, 일본말을 하며, 옷을 짧게 입는 여성을 일컫는 부정적 코드로 쓰였지만,
나혜석은 말합니다:

“신여성이란 단순한 외형이 아니라,
생각하는 여자요, 말할 수 있는 여자이며,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는 여자다.”

이 선언은 여성의 삶이 ‘누군가에게 선택받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자기 욕망과 윤리를 가지고 행동할 수 있는 주체적 인간임을 사회에 선언한 최초의 페미니즘 실천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혼고백서』의 오늘날적 의미

지금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혼고백서』는 개인 에세이인 동시에 사회학적 보고서,
그리고 여성의 욕망, 감정, 선택을 둘러싼 금기와 제도 비판의 기록입니다.

그녀는 이 글에서 여성이 사랑할 자유, 떠날 자유, 말할 자유를 주장했고,
이는 이후 정현숙, 김말봉, 박완서, 공지영, 김숨 등 한국 여성 문학의 흐름 속에 중요한 원형이 됩니다.

그녀는 당시로선 누구도 하지 않았던 ‘사적인 글쓰기’를 통해
가장 정치적인 저항을 만들어낸 여성 작가였습니다.

나혜석의 삶은 왜 무너졌는가?

그녀는 결국 사회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 3·1운동으로 투옥 → 정신적 충격
  • 남편과의 불화, 유럽 유학 중 자유연애 실천
  • 『이혼고백서』 출간 이후 언론과 사회의 집단적 비난
  • 가족에게 외면당하고, 예술계에서도 단절
  • 1948년 서울역 근처에서 가난과 병으로 생을 마감

그녀가 잃은 것은 사회의 인정이었고,
그녀가 남긴 것은 여성 해방을 위한 최초의 외침이었습니다.

지금 다시 읽는 나혜석 – MZ세대에게 보내는 100년 전의 질문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특히 **MZ세대(밀레니얼+Z세대)**는
정체성과 자율성, 연애와 결혼의 조건, 경력 단절과 돌봄 노동,
자기 표현의 자유와 감정의 기록 같은 주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질문들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100년 전, 나혜석이라는 한 여성이 이미 자신의 언어와 예술로 이 문제들을 선명하게 제기했습니다.

그녀는 단지 “그림을 잘 그리는 여성”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을 말한 여성, 이혼을 말한 여성, 성을 말한 여성, 감정을 말한 여성,
그리고 “나는 인간이다”라고 외친 가장 정치적인 예술가이자 글쓰기의 실천자였습니다.

그녀는 시대를 초월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사랑할 권리가 있다.”
“나는 결혼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나는 내 이름으로 그릴 권리가 있다.”
“나는 감정을 기록할 자유가 있다.”
“나는 나의 인생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다.”

이런 선언들은 지금의 페미니즘 담론, 자기서사 중심 콘텐츠, 1인 창작자 문화, 비혼/비연애 담론, 감정노동의 해석
모든 흐름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녀는 누군가의 딸이나 아내가 아니라,
그저 ‘나혜석’으로 살고자 했던 여성이었습니다.

MZ세대가 나혜석을 읽어야 하는 이유

오늘날의 MZ세대는 과거 세대보다 훨씬 더 자기표현, 감정 공유, 정체성 존중, 다양성의 언어화에 능숙합니다.
SNS와 유튜브, 브이로그, 에세이 출판, 1인 전시 등 자기 내면을 콘텐츠화하는 문화
사실 나혜석이 100년 전 감행한 **‘자기 고백의 글쓰기’와 ‘자화상의 회화’**와 닮아 있습니다.

  •  우리가 지금 브이로그를 찍는다면, 그녀는 자화상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  우리가 SNS에 감정을 쓰듯, 그녀는 『이혼고백서』에 내면을 새겼습니다.
  •  우리가 ‘나다운 삶’을 말할 때, 그녀는 “나는 나로 살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지금도 유효한 그녀의 질문들

나혜석의 질문                                                                                오늘날의 형태

 

“여성은 왜 사랑할 자유가 없는가?”  연애/비연애/비혼 선택권, 연애와 노동
“결혼이 여성을 구속하는가?”  경력 단절, 돌봄노동 불평등, 육아휴직
“나는 왜 내 욕망을 말하면 비난받는가?”  여성 표현의 검열, 감정 표현의 이중잣대
“왜 여성이 예술을 하면 도덕부터 검열당하는가?”  여성 창작자에 대한 도덕적 기준과 성차별
“나는 내가 되고 싶은 나로 살 수 있는가?”  정체성, 비규범적 삶, 다양성의 권리
 

이처럼 나혜석은 단지 과거에 머무는 인물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 안에 여전히 살아 있는 ‘불편하지만 꼭 필요한 질문’의 발신자입니다.

나혜석은 20세기 초반을 살았지만, 21세기를 향해 말한 인물입니다.
그녀는 정답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스스로를 향해 질문하고, 그 질문을 세상에 던짐으로써
여성이 스스로를 해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여자는 왜 사랑받기만 해야 하나요?”
“나는 내 인생을 스스로 그릴 수 있나요?”
“나는 나로 살아도 괜찮은가요?”

이 질문들에 여전히 우리가 답을 찾고 있다면,
나혜석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걷고 있는 동시대인입니다.

요약: 나혜석의 핵심 키워드

분야내용
예술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자화상과 풍경화 중심
문학 『이혼고백서』, 『신여성의 생애』 등 성과 존재에 대한 급진적 발언
사회참여 3·1운동, 여성 교육운동, 자유연애 실천
페미니즘 여성의 주체성, 성적 권리, 사회 제도 비판
유산 한국 여성주의 역사에서 상징적 존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