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의 침묵: 기록되지 않은 존재들에 대한 해석

1. 사료란 무엇이며, 왜 중요한가?

역사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재료 중 하나는 바로 ‘사료(史料)’, 즉 ‘역사적 자료’다.
사료는 과거에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 사건, 제도, 환경 등을 보여주는 1차적 증거로서
역사학, 인문학, 고고학, 법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해석의 출발점이 된다.

그 형태는 다양하다.

• 관청 문서, 법률 기록, 호적부, 명령문
• 유언장, 혼인 증서, 세금 장부
• 편지, 일기, 신문 기사, 구술 자료
• 비석, 유물, 회화, 구전 전통

사료는 과거의 정보를 현재로 이어주는 다리이자,
‘무엇이 기억될지, 무엇이 잊힐지’를 결정짓는 권력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사료들이 언제나 ‘모든 사람’을 기록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2. 이름이 누락되는 구조적 원인들

과거의 사료에서 이름이 생략된 사람들은 단지 “운 나쁘게 빠진 존재”가 아니다.
기록의 구조와 사회 시스템 그 자체가 특정 사람들의 이름을 지우고, 어떤 이름만 남기는 방식으로 작동해왔다.
이제 그 구조를 본격적으로 들여다보자.

1) 권력 중심의 기록 체계

조선시대부터 근대 초까지, 대부분의 공식 문서는 권력자의 필요에 의해 생산되었다.
기록은 권위 있는 자, 명령을 내리는 자, 법을 제정하는 자의 이름만을 남겼다.

• 예: “영의정 이○○ 하명에 따라…”
• 예: “관찰사 지시에 의거, 지방민 처분…”

반면, 명령을 전달받은 자, 기록을 작성한 자, 그 문서로 영향을 받은 자는
이름 없이 숫자·직책·종속 관계로만 표시되었다.

즉, 이름은 권력의 상징이자, 소유의 표시였다.
이름을 남긴다는 건 곧 그 사람의 존재가 사회적으로 ‘인정되었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2) 문맹과 문자 접근성의 제약

과거 대부분의 인구는 문자를 읽고 쓸 수 없었다.
즉, 자기 이름을 직접 기입하거나 보증인을 세울 수 없었으며, 문서를 만들 수조차 없었다.

• 여성의 문해율은 조선 후기에도 10% 미만으로 추정됨
• 농민, 수공업자, 하인, 노비 등은 문서 기록 외곽에만 존재
• 서명 대신 ‘무인(拇印, 손가락도장)’으로 대체된 사례 다수

문자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사람답게’ 인정받던 시대,
문맹자들은 침묵의 사람들로 분류되었고,
자기 이름을 증명할 기회 자체가 박탈되었다.

3) 행정 효율성과 인적 간소화 전략

관청이나 사찰, 군영에서 작성된 문서는 대체로 용건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그 과정에서 ‘인명 생략’은 곧 표준화된 형식이었다.

• “노비 7명 동원”
• “향리 2인 입회”
• “수라간 상궁 외 궁녀 9인 봉직”
• “작자 미상” / “증언자 노파”

이는 단위 인원을 ‘기능적 대상’으로 간주하는 행정 기술의 방식이며,
‘한 사람 한 사람’의 고유성이 아니라,
‘몇 명이 있었는가’만을 중요시하는 제도적 처리 방식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과정에서 ‘사람’은 ‘기능’으로 환원되었고, 이름은 불필요한 장식이 되었다.

4) 사회문화적 위계의 반영

당대 사회는 분명한 위계 질서를 갖고 있었다.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는 계급, 성별, 신분의 장벽이 있었다.

• 여성을 ‘○○의 처’, ‘무명 여인’으로만 지칭
• 노비는 ‘소속’과 ‘기능’만 표기, 이름은 생략
• 어린이는 대체로 “자식 3인 중 막내”처럼 나이·위치로만 구분
• 기생, 악공, 도공, 화공 등은 대부분 무명 처리

사회적 존엄성이 이름의 유무로 드러난다는 사실은 당시 인식 구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기록되지 않는 건 무시가 아니라, 배제의 결과였던 것이다.

5) 기록 보관의 기술적 한계

종이의 품질, 보존 방식, 사본 제작 기술이 미비했던 시대에는
기록을 짧고 간결하게 남기려는 경향이 강했다.

• 문서 길이 제한 → 이름 생략
• 글씨 크기와 먹 값의 절약 → 약칭 사용
• 손실된 문서 → 사람보다 사건 중심으로 재기록

특히 재난, 화재, 정란 이후 복원된 문서에서는
“기록 불명”, “명부 분실로 인명 기재 불가”와 같은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이는 구조적 배제를 의도하지 않은 기술적 누락의 경우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무명 인물의 공백은 더 크게 확대되었다.

요약 정리

원인 유형                        핵심 내용                                                                              이름이 생략되는 방식

 

권력 중심	기록은 상위 권력자 중심	명령자 이름만 기재됨
문해력 제약	문맹자는 자기 이름을 남길 수 없음	구술·무인 처리
행정 편의	기능 단위로 인원 통합	인원 수만 표기
사회적 위계	하층민·여성의 고유 정체성 삭제	관계 중심 표현
기술 한계	기록·보관 기술의 부족	요약, 생략, 단축 표기

 

이름의 생략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누가 사람으로 인정받았는가’
‘누가 기록될 자격이 있다고 여겨졌는가’에 대한 사회적 대답이었다.

3. 이름 없는 자들은 어떻게 표현됐는가?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완전히 존재가 삭제된 것은 아니다.
사료 속 무명 인물들은 여러 형태로 '간접적 존재'로서 드러났다.
그 흔적은 분명 존재하지만, 인격이 아니라 기능, 숫자, 종속 구조로 대체되었다.
이제 그 다양한 표현 방식을 유형별로 정리해보자.

1) 소속 기반 표현: 누구의 일부로 기록된 사람들

사료 속 무명 인물 대부분은 ‘자기 자신’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대신, 누구의 종속물, 관계자, 하위 구성원으로서 존재한다.

• “이씨의 처, 성씨 미상”
• “○○의 여종 두 명 동행”
• “김첨지의 노비 정씨”
• “왕의 수라를 담당한 상궁 일인”

이러한 표현은 개인의 이름보다 ‘누구에 속했는가’를 더 중요시하는 위계적 세계관을 반영한다.
이는 단지 이름의 생략이 아니라, 존재의 독립성 자체를 제거하는 기록 방식이다.

이름이 아닌 소속만 남은 기록은 '정체성의 배제'다.

2) 기능 중심 서술: 역할로만 존재한 사람들

많은 무명 인물은 사료에서 '직무 단위'로 등장한다.
이들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한 정보는 남지만,
그 일을 수행한 개인의 이름은 없다.

• “포졸 세 명, 사건 당시 체포에 동원됨”
• “사환 한 명이 장부를 전달”
• “기생 여럿이 접견 중 연주함”
• “나무꾼이 산길에서 도적을 발견”

이 경우, 문서는 개인을 역사적 행위 주체가 아니라 단순 기능 담당자로 본다.
‘일을 했지만, 이름은 불필요한 존재’로 처리하는 것이다.

역사적 기여가 존재하되, 기여자가 지워지는 구조.

3) 숫자화된 집단: 개인을 수량으로 환원한 방식

사료에서 이름을 생략하는 가장 흔한 방법은 **‘수량화’**다.
이는 관리 효율성과 행정 기록의 편의성이라는 명분 아래,
개인의 고유한 정보는 삭제된 채 ‘몇 명’으로만 남는 처리 방식이다.

• “군량 운반 노비 12명”
• “수령 수행 향리 4명”
• “환자 27인 중 9인은 여자”
• “제작 공정 참여 인원 30명, 모두 무명”

이처럼 숫자화는 존재의 익명화이며,
“존재했지만,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사회적 합의의 반영이기도 하다.

이름은 권리지만, 숫자는 수단일 뿐이다.

4) 묵서(黙書) 또는 말소 표현: 아예 의도적으로 지운 흔적

간혹 이름이 쓰였다가 지워지거나, 애초에 의도적으로 쓰지 않았음을 명시한 경우도 있다.

• “이름은 알 수 없음”
• “기재되지 않음”
• “먹칠로 지움”
• “출처 불명 노파 1인”
• “당시 함께 있었던 자들에 대한 기록 없음”

이들은 단순 실수가 아니라,
정치적 이유, 사회적 편견, 기록권력의 의도적 삭제일 수 있다.

특히 여성, 기생, 이단자, 하층민, 투항자, 이민자 등에 대해선
'역사적 침묵'이라는 방식의 검열이 작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말소된 이름은 가장 강력한 기록 거부의 결과다.

5) 비유적·은유적 표현: 기록될 수 없는 자들을 암시하는 언어들

기록자가 의도적으로 실명을 피하고,
은유적 방식으로 존재를 표현하는 경우도 많다.

• “시끄러운 여인 하나”
• “젊은 농부가 중얼거렸다”
• “노인 한 명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 “지혜로운 여인이 말하길…”

이는 구술 전승이나 민담, 서간문, 야담집에서 흔히 나타나는 방식이다.
의도적으로 익명성을 유지하면서,
개인의 이름보다 집단적 정체성과 서사성을 강조하는 구조다.

이름은 지우되, 목소리는 남기려는 마지막 장치.

요약 정리: 이름 없는 표현 방식 5가지

표현 방식                                          기록 방식                                                      사회적 의미

 

소속 중심	누구의 처, 종	존재의 종속화
기능 중심	역할만 기록	인격의 도구화
수량 표현	숫자로 표기	존재의 익명화
말소 및 생략	이름 삭제·비기재	의도된 배제
은유적 서술	간접 언급	기억의 대체 기법

 

이처럼 사료 속 이름 없는 자들은 문서 바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사료를 통해 우리가 다시 읽고, 다시 불러낼 수 있는 존재들이다.

4. 사료의 침묵: 기록 편향과 사회적 배제

1) 동학농민운동 격문 필사자 – 민중 혁명의 전달자

1894년 전봉준은 탐관오리를 척결하자며 격문을 작성했지만,
그 문서를 전국 각지로 배포하는 데는 이름 없는 필사자들이 있었다.
대부분은 몰래 협력한 서리(書吏) 출신이거나,
지방에서 농민과 접촉하던 지역 유생, 글 읽는 노인이었다.

이들은 체포되면 역적의 동조자로 분류되어 형을 당할 수도 있었기에 이름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이 있었기에 전봉준의 뜻은 지방 단위로 전달되었고, 동학군은 조직될 수 있었다.

“말하지 않은 이름이 혁명을 확산시켰다.”

2) 한양 도성 축조의 조수들 – 조선 도시 건축의 주역

서울 도성(사적 제10호)은 태조 이성계 시기부터 수차례 축성되었으며,
관청 대목장(大木匠) 아래 수백 명의 목수와 조수들이 동원되었다.
기록에는 대목장 몇 명의 이름만 남고,
각 구간 석축, 성문 목조, 문루 천장 등을 담당한 조수의 이름은 단 한 명도 없다.

하지만 도성 기단부의 석축에서 발견된 공구 자국과 도면 격자 흔적은
고도의 건축 기술이 여러 명의 손에 의해 분업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말해준다.
이는 조선 기술사의 ‘무명의 집단 지성’이 어떤 방식으로 발현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도성은 임금의 이름으로 남았고, 벽돌은 조수의 손으로 쌓였다.”

3) 전염병 시기의 여성 간병인들 – 조선의 ‘숨은 방역자’

조선후기 두창(천연두)과 홍역이 유행하던 시기,
국가는 **남성 의원(醫員)**을 파견했지만, 실질적으로 병자를 간호한 주체는 무명의 여성들이었다.

• 어머니, 시어머니, 종부, 이웃 아낙
• 시신을 치우고, 수건을 삶고, 아기를 닦아주던 여인들

『동의보감』 부록에 “부녀의 수고로 병이 줄어든다”는 구절이 있고,
실제 『향약집성방』에는 “유녀 2인 외 간호자 ○○ 미상” 같은 기록이 종종 나온다.
이들은 감염에 노출되어 사망하거나, 후유증을 겪었지만 역사 속 이름은 남기지 못했다.

“그들의 손길이 수많은 목숨을 살렸지만, 기록된 것은 약제뿐이었다.”

4) 조선 시대 사찰 복원 공사 – 무명의 화공과 승려 기술자들

조선은 억불정책 속에서도 지방 사찰의 복원과 중창을 꾸준히 진행했다.
특히 불화, 단청, 목탑 보수 등에는 승려 장인들과 지방 장공인들이 투입되었다.
그러나 완공 문서에는 “삼인합화”, “○○화승 외 다수 참여”라는 식으로만 남는다.

봉정사, 부석사, 통도사 등의 천장화 복원 과정에서
정밀 분석을 통해 서로 다른 손의 붓질과 안료 선택이 확인되었고,
이는 이름 없이도 개별적 존재성과 예술적 역량이 드러나는 사례로 평가된다.

“사찰 천장의 붓끝은 무명의 장인이 남긴 가장 조용한 서명이었다.”

5) 독립운동 전단지를 배포한 어린 학생들 – 항일의 그림자 조직

일제강점기, 신문이나 책으로 활동이 어렵던 시기
항일 전단지를 몰래 배포한 이들은 10대 학생이나 인근 점원, 배달원들이었다.

• “신문배달 소년이 경성 시내에 독립운동 소식 전달” (《조선중앙일보》 구술자료)
• “여학생 3인, 송현동 일대 전단 뿌리다 체포” – 명단 미기록

이들은 공식 항일운동 명부에는 없지만,
독립운동의 실질적인 ‘루머 전달자’, ‘소식 유통자’, ‘심리전 주체’로서 활동했다.
자발적 참여자였지만, 어린 나이와 하급 신분으로 인해 아무런 표창이나 서훈 없이 사라졌다.

“그들은 나팔 없이 싸웠고, 이름 없이 사라졌다.”

요약: 기록은 이름을 지웠지만, 역사적 행위는 남았다

사례                                             사료 속 표                                              현실질적 기여

 

격문 필사자	미기재, 유생 일부	민중 저항 확산 주체
도성 조수	기능 표기만 존재	건축 기술 실무 담당
여성 간병인	부녀, 아낙	전염병 방역과 생명 보호
불화 장인	삼인합화	사찰 미술의 실현자
전단 배포 소년	여학생, 신문배달	항일 소식 전달자

 

이름 없는 자들은 역사에 없던 것이 아니라,
역사가 일부러 지우거나, 무심코 잊어버린 존재들이다.

이제 그들을 다시 불러내는 일은
기억을 복원하고, 역사를 완성하는 일이 된다.

5. 이름 없는 존재를 복원하기 위한 역사학의 시도

오늘날 역사학은 이름 없는 자들을 다시 부르는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 문서 여백 분석: 서체, 지문, 인주 색, 보조 기입문 확인
• 구술 자료 활용: 문서 밖에서 살아남은 이름 복원
• 교차 문서 분석: 다른 자료와 대조해 사라진 인물 추적
• 문서 바깥의 시선: 시, 노래, 민담, 성씨 조사, 묘지 발굴 등

이러한 복원은 단지 과거에 대한 ‘애도’가 아니다.
지워진 이름을 다시 불러냄으로써,
역사를 전체로 되돌리려는 윤리적 행위다.

결론: 이름은 권리다

사료의 공백은 단순한 기술적 문제나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기록 권력의 구조를 반영한 사회의 ‘의도된 침묵’이다.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공백을 다시 읽고, 이름 없는 사람들의 존재를 복권시키는 일이다.
기억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