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1. “그녀들은 싸웠다, 조용하고 집요하게”
우리는 ‘운동’이라 하면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대규모로 모이는 장면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조선시대 여성들의 싸움은 그런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전장은 마을 우물가였고, 회관의 부엌이었으며, 논둑 사이 작은 소문이 흐르는 길목이었습니다.
이들은 공식적인 말과 기록 속에 등장하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끈질기게 맞섰습니다. 그 싸움은 ‘자기 몫의 물을 지키는 일’이었고, ‘아이의 쌀을 내주는 대신 지주에게 항의하러 가는 일’이었으며, ‘남편 대신 이장 앞에서 부당한 군포 면제를 요청하는 일’이었습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마을 전체에 울렸습니다.
이들은 폭력 없이, 조직 없이, 권력도 없이 생활의 모든 수단을 활용해 싸웠습니다. 단단히 묶인 허리끈처럼, 여성들은 서로의 집과 아이, 남편, 들판을 연결하는 생활 연대의 고리였습니다.
예를 들어보자면:
- 한 마을에서 세곡을 불법적으로 징수하려 했을 때,
먼저 항의한 이들은 남성이 아니라 아낙네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건 우리 아이 밥줄을 끊는 일’이라며 수령 앞까지 가서 울음과 항의의 말로 저항했습니다. - 또 어떤 곳에서는 물길을 막은 지주의 아들에게 맞서,
여성들이 삿갓을 쓰고 단체로 관아를 찾았습니다.
이들은 구술 기록에서 “우리가 안 나서면, 우리 논이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한 줄의 외침이 아니라, 생활의 생존과 공동체를 위한 싸움의 언어였습니다. - 시장에서는 쌀값을 조작하는 상인을 지목하고,
마을 단위로 불매운동에 준하는 ‘담합 거절’ 움직임을 보였고,
때로는 장터에서 집단적으로 가격을 따지며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움직임은,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작고 사소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유교적 질서, 남성 중심의 권력 구조 속에서
여성들이 침묵하지 않고, 의견을 나누고, 계획을 세우고, 함께 움직였다는 것은
그 자체로 ‘저항’이었고, 명백한 풀뿌리 농민운동의 일환이었습니다.조용했지만 멈추지 않았고, 눈에 띄지 않았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들은 큰 목소리보다 오래 가는 인내로 싸웠고,
서명 없는 결의문처럼 향촌의 구조를 조금씩 바꿨습니다.요약
- 조선 여성들의 농민운동은 생활 공간에서 이루어진 ‘저강도이지만 지속적인 저항’이었다.
- 물길, 쌀값, 세금 등 일상 속 권력 문제에 침묵하지 않고 대응했다.
- 집단적 담합, 불복종, 항의, 정보 공유 등 다양한 형태의 ‘연대형 실천’을 보였다.
- 이들의 싸움은 작고 조용했지만, 향촌 사회의 구조를 바꾸는 지속적 변화를 만들어낸 동력이었다.
2. 아낙네가 이끈 논두렁 회의 – 생활이 곧 정치였다
조선의 향촌 사회에서는 ‘정치’라는 단어가 지금처럼 제도나 권력자 중심의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누가 결정을 내리는가’, ‘누가 일상의 규칙을 정하는가’에 가까운 생활 정치의 의미였죠.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아낙네들, 즉 마을 여성들이 있었습니다.논두렁, 우물가, 장터 – 여성들의 회의 장소
마을 여성들이 주도한 회의는 특별한 의제나 명칭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논두렁을 따라 물이 흘러가는 방식, 곡식이 먼저 수확될 순서, 소작 분배, 공동 경작의 노동 시간 등
모든 결정이 이들 사이의 대화, 경험, 판단으로 이뤄졌습니다.- 논두렁 옆에 모여 앉아 "올해는 물이 덜 드니 먼저 고지대로 돌리자"는 합의
- “이번엔 아무개댁이 먼저 풀 베자, 저 집 남정네 다쳐서 힘들다”는 식의 배려
- 공동 우물에서 "물이 줄었으니 한 번에 두 동이 이상은 금지하자"는 규칙 제정
이 회의는 그 자체로 제도는 아니었지만, 엄연한 공동체 규범의 생산 현장이었습니다.
누군가 어기면 ‘뒤말’이 돌았고, 반복되면 마을 내 경제·노동 연대에서 배제되기도 했습니다.
이는 일종의 사회적 규제력이었고, 여성들이 그 핵심 운영자였습니다.결정은 공식 회의보다 빠르고 실효적이었다
조선의 향약이나 촌회의 기록을 보면 대부분 남성 중심으로 운영되었고,
문서상 대표자는 이장, 계주, 노인회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공동체 문제의 상당수는 그 전에 비공식적인 여성 네트워크 안에서 조율됐습니다.이 네트워크는 정해진 명단도, 조직도도 없었지만
각 집안의 ‘살림을 쥔 손’이 누구인지 모두 알고 있었고,
문제가 생기면 우선 물어볼 사람, 이야기 나눌 사람이 정해져 있었습니다.이 시스템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녔습니다:
- 빠른 결정: 문제 발생 → 그날 저녁 우물가 혹은 마당에서 의논 → 다음 날 실행
- 실효성: 가족 수, 노동력, 병환 여부 등 실제 사정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참여
- 자율성: 관청이 개입하지 않아도 마을 내 합의로 문제를 조정
즉, 여성들은 명문화된 법은 없었지만 ‘관습이라는 법’을 만들고 집행한 존재였습니다.
“집 안의 결정권”이 “마을의 규칙”이 되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조선 여성들은 집 안에만 머물렀다고요.
하지만 실상은 ‘집 안의 살림’이 곧 마을 전체 경제의 핵심 축이었습니다.- 어느 집이 빚을 졌는지,
- 어느 집이 곡식을 얼마나 가졌는지,
- 어느 집이 공동노동에서 빠졌는지
이 모든 정보는 여성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공유되었고,
그 정보가 바로 ‘판단의 기준’이 되었습니다.따라서 여성들의 살림 판단이 곧 마을의 노동력 재편,
즉 **“올해는 어떤 식으로 논농사를 조직할 것인가”**라는 중대한 결정으로 연결되곤 했습니다.이는 단순한 살림의 차원을 넘어서,
지방 농촌 경제의 실질 운영 주체로서 여성의 지위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입니다.정리
- 논두렁 회의는 이름도 없고 제도도 없었지만, 강력한 향촌 운영 방식이었다.
- 여성들의 생활 경험과 정보 교환은 마을 내 규칙과 경제 조율의 출발점이 되었다.
- ‘집안 살림’은 곧 ‘공동체 경제’였으며, 그 판단권을 가진 여성들은 정치적 주체였다.
- 이 회의들은 비공식적이지만 효율적이며 지속가능한 생활 속 정치 모델로 작동했다.
3. 이름은 지워졌지만, 영향력은 남았다
조선 여성 농민들의 이름은 대부분 『실록』, 『지방지』, 『향안(鄕案)』 같은 공식 기록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활약이 미미해서"가 아니라, 여성이라는 이유로 기록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이름은 사라졌지만, 그녀들의 행위는 마을과 공동체, 삶의 질서 속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이름은 사라져도, 결과는 남는 법입니다.기록되지 못한 이유, 혹은 지워진 이유
조선은 철저한 유교 중심 사회였습니다.
그 사회는 여성의 이름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불경으로 여겼습니다.
공적 행위에 참여한 여성조차 **‘집안 어른의 딸’, ‘누구누구의 아내’**로만 표기되었죠.특히 다음과 같은 구조적 요인이 여성의 기록을 막았습니다:
- 공문서에 여성을 실명으로 적는 것은 ‘사사로움의 노출’로 간주
- 향약과 계문은 남성 중심으로 편성되어, 여성의 의견은 ‘비공식 참고’ 취급
- 여성의 활동은 ‘살림’이나 ‘도움’으로 축소되어 기록됨
- 농민운동 기록은 주로 동학 접주, 계주 등 남성 인물을 중심으로 서술됨
이처럼 여성은 ‘주체’가 아닌 ‘배경’으로만 처리되었습니다.
이름 없는 여성들은 역사에서 눈에 띄지 않는 실무자이자 설계자로 기능했습니다.영향력은 어떻게 남았는가?
기록은 사라졌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마을에 구조적으로 남았습니다.
1. 향약 운영 방식의 실질적 변형
- 마을의 향약은 원래 남성 계층 중심이었지만,
실질적 규율(우물 사용, 돌봄 순서, 잔치 예절 등)은 여성들 간의 조율로 유지됨 - 여성들이 결정한 ‘보이지 않는 규칙’이 마을의 실제 질서가 되었고,
그것이 세대를 거치며 향촌 질서 자체로 정착
2. 공동 노동과 농업 협업의 문화
- 여성 주도의 품앗이, 공동 보육, 가내 생산 분배 시스템은
현대에도 이어지는 마을 단위 상호부조 시스템의 전신이 됨 - 이는 조선 후기에 등장하는 ‘두레 공동체’, ‘계’ 조직의 생활형 기반이 되었으며,
여성의 실무력이 중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록에는 남성 이름만 등장
3. 동학농민운동 속 숨은 연대 기반
- 공식 역사에는 동학 접주의 연설, 무장 봉기의 기록이 남아 있지만,
그들 뒤에서 식량을 조달하고, 정보를 전하고, 피신처를 연결한 여성 네트워크가 존재 - 이는 **조직을 조직답게 만든 ‘실행의 손’**이자,
오늘날로 치면 운동의 실무 기획자, 전략가에 해당
구술과 문화에 남은 흔적들
비록 문서에는 남지 않았지만, 그녀들의 존재는 구술문화, 민담, 생활 속 말로 이어져 왔습니다.
- “아무개 할망은 곡식 대신 고발장을 올렸다”는 말
- “장날에 제일 무서운 건 시장 가는 아낙네들”이라는 속담
- 민요에 등장하는 여성 중심 서사의 비중 증가
- 민화 속 ‘부엌’과 ‘우물’의 상징이 공동체 권력의 은유로 작동
이러한 비문서적 흔적은 기록되지 못한 여성들의 영향력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증명합니다.
정리
- 조선 여성 농민들의 이름은 공식 기록에서 사라졌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질서, 조직, 저항의 방식은 마을의 구조적 유산으로 남음 - 향약·농업·공동체 운영 등 실제 변화는 대부분 여성 주도 하에 이루어졌으나,
유교적 성별 구조로 인해 기록권 자체에서 배제됨 - 그러나 구술, 민담, 생활 문화, 구조적 변화 속에서
그녀들의 흔적은 지금까지도 생생한 사회적 유산으로 작동 중
4. 여성의 노동이 곧 정치적 힘이 되던 시대
조선시대 여성의 노동은 단지 ‘집안일’이나 ‘밭일의 보조’로 취급받곤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녀들의 노동은 생산·재생산·조율·연대라는 여러 층위를 포괄하는 다기능적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이 행위는, 마을 안에서 실질적인 ‘정치적 영향력’으로 이어졌습니다.1. 노동의 시작은 곧 결정권의 시작이었다
하루의 첫 일과는 새벽 물 긷기로 시작됐습니다.
누가 먼저 물을 쓰고, 어떻게 나눌지를 정하는 일은 단순한 관례가 아니라 협상과 합의의 공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협상의 무대에 항상 있었던 이들이 바로 여성들이었습니다.예를 들어:
- 물 부족 시기, 고지대 논에 먼저 물을 돌릴 것인지 저지대 논을 먼저 채울 것인지를
여성들이 모여 비공식적으로 결정하고 이를 이장에게 전달 - 밭일과 가사노동을 조정하면서도, 이웃의 질병·가정사·경제력까지 고려해 순서를 정함
이런 과정은 자기중심적 판단이 아닌, 공동체 운영자적 감각을 필요로 했고
그 과정에서 여성은 마을 내 실질적인 결정권자로 작동했습니다.2. ‘돌봄’이라는 이름의 사회관리
여성은 식사 준비와 아이 돌봄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이웃의 병간호, 노약자 보살핌, 혼례·장례 등 공공 의례의 실무를 책임졌습니다.이는 단순한 돌봄이 아니라 마을 질서의 지속성과 재생산을 담당하는 행위였고,
여성이 없으면 유지될 수 없는 시스템이었습니다.- 공동밭에 참여하지 못한 집안에는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도움을 주었고,
그 덕에 마을 내부의 ‘소외’가 완화되며 사회 통합이 자연스럽게 이뤄짐 - 혼례 잔치 음식 준비, 제사 시 식재료 분배 등 의례의 질서와 균형을 여성들이 유지
- 잔치 때 누구의 밥상이 먼저 차려지는가, 누구의 젓갈이 뒤로 밀리는가에 따라
마을 내 위계 질서와 화합의 온도가 조정됨
이 모든 행위는 ‘정식 권력’은 아니지만, 공동체를 움직이는 숨은 힘이었습니다.
3. 생산만큼 중요한 ‘배분’의 권한
여성들은 농업 생산의 직접적 노동자였을 뿐 아니라,
수확한 곡물과 물자, 노동의 분배 방식을 결정짓는 중간 조율자 역할을 했습니다.예를 들어:
- 품앗이의 순서, 누가 며칠 일했는지를 여성들이 정리
- 두레밭 수확량을 집집마다 어떻게 나눌지를 여성들이 제안하고 조정
- 조선 말기엔 일부 지역에서 여성들이 직접 **계의 주관자(女계주)**가 되어 자금 관리까지 담당
이는 단순한 가계 관리가 아니라, 공동체 내부 자원의 순환 질서를 관리한 정치적 권한 행사였습니다.
4. 이름은 없어도, 영향력은 분명했다
비록 이 모든 노동은 공식 문서에 남지 않았고,
실록에 이름 한 줄 적히지 않았지만,
그들의 노동은 마을의 질서와 정의, 생존과 연대를 지탱하는 실질적 정치 행위였습니다.- 남성들이 외부와 대면하며 향약이나 군역을 논할 때,
여성들은 내부에서 실제 사람을 돌보고, 물자를 분배하며, 감정을 조율하는 기능을 담당 - 조선 향촌의 안정성은 그들이 만든 ‘비가시적 정치 공간’ 위에 구축되었습니다.
요약
- 여성의 노동은 단순 생계 활동이 아니라, 공동체를 조율하고 유지하는 실천적 정치였다.
- 물 관리, 품앗이, 돌봄, 배분, 의례 실무 등 모든 마을 운영의 기반 구조에 여성이 관여
- 이 힘은 공식 권력은 아니었지만, 공동체 내부의 권력 구조를 실질적으로 설계한 주체였음
- 조선 농촌 사회의 지속성과 안정성은 여성 노동의 정치성 덕분에 가능했다.
5. “그녀들은 지도자가 아니었다, 구조였다”
역사는 흔히 한 사람의 이름, 영웅, 지도자를 중심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조선의 향촌 사회는 ‘이름 있는 지도자’보다, ‘이름 없는 구조자’에 의해 유지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바로 여성들, 특히 농촌의 아낙네들이 있었습니다.그녀들은 명령을 내리지 않았고, 연설을 하지 않았으며,
깃발을 들고 나서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매일같이 밭을 가꾸고, 음식을 나누고, 서로를 돌보며
공동체를 지탱하는 구조 그 자체로 존재했습니다.1. ‘지도자’가 아닌 ‘기반’이었던 여성들
지도자는 어떤 구조 위에 올라섭니다.
그 구조가 없으면 지시도, 계획도, 동원도 힘을 잃습니다.
조선의 여성 농민들은 바로 그 **‘말없이 움직이는 기반’**이었습니다.- 공동 경작의 일정 조율은 여성들이
- 품앗이 대상의 선정과 일정은 여성들이
- 마을 잔치나 제사의 음식 배분과 집안 순서는 여성들이
- 어린이 돌봄, 환자 간병, 병약한 가족 대리 노동은 여성들이
이런 일들을 아무런 명령 없이 수행하며,
지도자가 나타나기 전에 먼저 움직였고,
지도자가 떠난 뒤에도 마을을 굴러가게 만든 존재였습니다.즉, 그녀들은 구조였지, 조연이 아니었습니다.
2. ‘네트워크’였던 그녀들 – 정보, 감정, 결정이 흐르는 통로
현대 사회로 치면, 여성들은 마을의 ‘네트워크 인프라’와 같았습니다.
정보의 흐름, 사람들의 감정 상태, 물자와 노동의 배치까지
이 모든 것이 그녀들을 통로 삼아 흘렀습니다.예를 들어:
- 집마다 어떤 농기구가 필요한지, 어느 집에 쌀이 부족한지
- 누구네 아이가 아프고, 누구네 논이 먼저 물을 대야 하는지
- 어느 청년이 군포를 면제받을 수 있을지, 누구 집이 이장에게 서운한 감정을 품고 있는지
이런 정보는 공식 문서나 회의록이 아니라, 여성들의 말, 감, 관찰을 통해 유통되었습니다.
그녀들이 없었다면 의사결정도, 행정도, 연대도 작동하지 않았을 것입니다.3. “보이지 않지만 작동하는 것” – 그것이 구조의 본질이다
지도자는 주목받지만, 구조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선 시선의 방향을 바꿔야 합니다.
바로 아래를 보고, 주변을 보고, 배경이라고 여겨졌던 이들을 봐야 합니다.여성들은 그런 비가시적 구조물이었습니다.
- 마을의 감정 균형을 잡는 ‘정서 조율자’
- 갈등이 터지기 전에 막는 ‘완충 장치’
- 과도한 집중을 분산시키는 ‘분배 설계자’
- 노동의 흐름을 짜는 ‘생활 관리자’
이러한 역할은 공직도 아니고, 상도 받지 않았지만
없으면 마을이 무너지게 되는 생활 기반 그 자체였습니다.정리하자면
- 조선 여성 농민들은 지도자가 아니라 구조였고,
**공동체 운영의 ‘보이지 않는 플랫폼’**이었다. - 그들은 명령보다 설득, 지도보다 균형, 힘보다 연결의 역할을 했다.
- 정보, 노동, 감정, 질서를 조율하며 마을이 작동하게 한 사회적 인프라였다.
- 이들의 이름은 실록에 없지만, 그 흔적은 마을 구조에 새겨졌다.
우리가 다시 기억해야 할 이유
잊힌 존재를 기억한다는 건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닙니다.
특히 기록되지 않은 여성들, 말하지 못한 사람들, 공식 역사에 포함되지 못한 주체들을 다시 부르는 일은
오늘날 우리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가를 묻는 현재적 태도이자 미래에 대한 선언입니다.그녀들의 이름은 지워졌지만,
그녀들이 만든 삶의 방식과 공동체 질서는
지금도 우리의 삶에, 마을에, 연대의 문화 안에 살아 있습니다.1. 역사는 ‘기억의 균형’ 위에 서야 한다
역사는 사실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누구의 이야기만 기록되었는가, 누구의 목소리가 반복되었는가가
기억의 구조를 결정합니다.그동안 여성 농민들의 일상적 정치, 생활 속 실천은
‘위대한 전쟁’, ‘혁명적 지도자’, ‘남성 중심 제도’ 뒤로 밀려났습니다.
그러나 역사란 거대한 변화보다,
그 변화를 가능하게 만든 기반을 함께 기억할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그녀들을 기억하는 것은
역사적 균형을 되찾는 일이며,
과거의 왜곡을 바로잡는 일입니다.2. 지금 우리 삶의 뿌리를 확인하는 일이다
지금도 지역 사회 곳곳에는 ‘공식 직함 없이 움직이는 여성’들이 존재합니다.
마을회의 뒤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돌봄의 틈을 메우고,
정보를 모으고,
서로의 집을 대신 챙깁니다.이 시스템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닙니다.
바로 조선의 이름 없는 여성 농민들이 만든 삶의 방식과
공동체 유산의 연속성 위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그녀들을 기억한다는 것은
지금 우리 삶이 어디서 왔는지를 이해하는 일이며,
이 사회의 돌봄·협력·공존의 철학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되새기는 일입니다.3. 미래의 역사에도 ‘이름 없는 손들’이 기록되길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주목받지 못하는 일’을 합니다.
돌봄노동자, 간병인, 마을 활동가, 여성 농민, 학부모 자원봉사자…
그들의 수고는 사회를 유지하는 힘이지만,
기록과 기억에서는 여전히 주변부에 머물러 있습니다.조선 여성 농민들을 다시 기억하는 것은
현재의 이름 없는 사람들도 언젠가는 역사로 기억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일입니다.기억은 단지 추모가 아니라,
역사적 정의의 실현이며,
사회가 책임지는 방식의 하나입니다.정리하자면
- 조선 여성 농민들을 다시 기억하는 것은
단지 과거를 되새기는 일이 아니라,
지금의 삶과 가치를 다시 구성하는 실천이다. - 그녀들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우리 공동체의 작동 원리, 감정의 질서, 협력의 유산을 만든 구조자들이었다. - 이 기억은 역사의 균형을 되찾고,
현재의 ‘보이지 않는 노동’을 다시 조명하며,
미래의 더 포용적인 기록을 가능케 한다.
'잊혀진 역사 속 인물 탐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동주만 있는 게 아닙니다 – 조선의 침묵 속 저항 시인 5인의 이야기 (1) 2025.06.12 학생이 이끈 항일운동? 3·1운동 속 무명의 소녀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0) 2025.06.12 “조선의 질서, 누가 지켰을까?” – 사헌부와 포도청의 무명 하급 관리들 이야기 (0) 2025.06.11 무덤 속 장인의 흔적 – 능묘 조성의 무명 조각가들 (0) 2025.06.10 한양 거리의 무명 화공들 – 우리가 몰랐던 민화의 진짜 주인공들 (0) 2025.06.10 - 한 마을에서 세곡을 불법적으로 징수하려 했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