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니의 잊혀진 역사 속 인물 탐구

잊혀진 역사 속 인물 탐구에 대해서 글을 작성합니다.

  • 2025. 6. 9.

    by. 지아니13

    목차

      – 역사를 움직였지만 역사에 쓰이지 못한 사람들

      "정변의 성공은 몇몇 공신만의 승리가 아니었다"

      – 명분 뒤의 현실, 정변은 다층적인 협력 구조 속에서 완성되었다

      조선 역사에서 ‘정변’이 성공하려면 단순히 왕을 바꾸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곧 권력의 재편성, 군사 동원, 정보 통제, 여론 설득, 외교 안정까지 포함하는
      복합적이고 정밀한 ‘국가 리셋 작업’이었습니다.

      우리는 실록이나 공신록을 통해 정변의 성공을 소수 엘리트 공신들의 전략과 결단으로 요약해 기억합니다.
      중종반정의 박원종·성희안, 인조반정의 김류·이귀 등이 그 예입니다.
      하지만 정변이란 실제로 수십 명, 수백 명의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한 이들의 협업과 분업 속에서 가능해진 프로젝트였습니다.

      ① 현장의 ‘손’이 없었다면, 반정은 시작되지 못했다

      모든 정변은 시작부터 **‘말’이 아닌 ‘손과 발’**의 문제였습니다.
      중종반정을 예로 들면, 거사 당일 새벽 문을 연 이는 궁궐 내무반의 병졸,
      반대 세력의 이동을 차단한 이는 금군 소속 하급 장교,
      동조 세력을 움직이기 위해 군기시, 병조 내부 인맥을 활용한 조율자들이 필요했습니다.

      반정의 핵심은 “기습”과 “속도”였고,
      이것을 가능하게 한 건 명령을 받자마자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던 수많은 익명의 참여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명분보다 ‘행동’을 먼저 수행했고,
      실제로는 거사의 성패를 가르는 분기점을 만든 결정적 손끝이었습니다.

      ② “누가 칼을 들었는가?”보다 “누가 열쇠를 열었는가?”가 중요했다

      정변은 칼로 이기는 싸움이 아닙니다.
      정보와 타이밍, 이동 경로와 통신망, 이 네 가지를 선점하는 사람이 승리합니다.
      그 역할은 결코 고위 공신들이 직접 하지 않습니다.

      • 내금위의 숙직 명단을 바꾼 사람
      • 거사 전날 야간 통금 조치를 일부러 완화시킨 병조 내 실무관
      • 조정 관료 명단에서 반대파의 외출 경로를 차단한 형조 서기
      • 무기고의 열쇠를 당일 ‘실수한 척’ 바깥으로 옮긴 무기 담당 무관

      이런 ‘사소한 조정’들이 없었다면,
      거사는 시작부터 실패했을 것이며,
      공신들은 단지 ‘계획 실패자’로 전락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중요한 고리 역할을 한 이들은,
      기록에서 “익명의 조력자”, “모종의 병사”로만 언급될 뿐입니다.

      ③ ‘왕이 되다’는 정치 사건이 아니라, ‘질서 재편’의 총체였다

      정변은 단순한 권력 교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곧 새로운 법질서, 인사 제도, 외교 관계, 민심 정비까지 새로 짜야 하는 국가 전체 시스템의 재조정 작업입니다.

      그러므로:

      • 누구를 등용하고 누구를 배제할 것인가?
      •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어떤 교서(敎書)를 어떤 문구로 발표할 것인가?
      • 명나라, 청나라 등 외세에 어떤 방식으로 왕위 교체를 통보할 것인가?
      • 지방 수령과 군현의 관리를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이 문제들을 풀기 위해 수많은 실무자, 중간 간부, 지역 관료들이 나섰습니다.
      이들은 정변 성공 후에도 전국 각지에서 새 국왕의 정통성을 받아들이도록 분위기를 조율하고,
      무력 충돌 없이 체제 전환을 완성시키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는 단지 ‘반정의 완성’이 아니라,
      ‘새 시대의 안착’을 위한 가장 중요한 단계였고,
      그 중심에는 조정의 중심을 떠나 지방, 병력, 행정 조직을 관리한 다수의 무명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정변은 몇몇의 칼로 이뤄지지 않았다

      역사는 승자의 이름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승자 중에서도 소수의 정치적으로 유효한 인물만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역사를 움직인 힘은, 기록되지 않은 다수의 실천자들로부터 나왔습니다.

      “정변은 위대한 몇 사람의 작품이 아니다.
      정변은 수많은 익명의 손과 눈, 입과 발이 하나의 방향으로 작동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이제 우리가 복원해야 할 반정의 역사란,
      공신록에 오른 이름들만이 아니라,
      그 이름들이 빛날 수 있도록 배경을 세우고 장면을 연출한 모든 조력자들의 노력과 리스크를 함께 기억하는 일입니다.

      종종반정의 숨은 주역, 실록에 남지 못한 공신들

      1. 반정은 몇 줄짜리 지시로 이뤄지지 않았다

      – 명령이 아닌 설계, 계획이 아닌 연쇄 작동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조선의 반정(反正)—예컨대 중종반정(1506), 인조반정(1623)—은 마치 왕을 바꾸자는 결단 몇 줄로 갑작스럽게 일어난 정변처럼 여겨지곤 합니다.
      실록이나 공신전에서 “박원종 등이 거사를 단행하였다”, “이귀가 병력을 이끌고 궁궐로 들어갔다”는 식의 간결한 서술은 그러한 오해를 강화합니다.

      그러나 실제 역사는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반정은 몇 줄짜리 명령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수많은 사람과 절차, 구조가 동시에 움직여야만 작동하는 복합적 시스템의 폭발적 발동이었습니다.

      단지 "칼을 들자"가 아니라, 누가 어디로, 언제, 어떻게?

      정변이 성공하려면 다음 요소들이 모두 정교하게 작동해야 했습니다:

      • 병력 동원: 군사력은 단순히 모은다고 되는 게 아니라,
        • 어떤 병영에서 몇 명을 차출할 것인가?
        • 무기와 군복은 어디서 조달할 것인가?
        • 밤에 이동할 경우 군기 누설은 어떻게 막을 것인가?
      • 정보 통제:
        • 왕실 측근에게 정보가 새지 않도록 누가 감시할 것인가?
        • 반정 세력이 움직인다는 정보를 사전에 어떻게 차단할 것인가?
        • 외부 사찰(사헌부, 사간원)의 간섭은 어떻게 회피할 것인가?
      • 내통 및 협조:
        • 궁궐 문은 누가 열 것인가? 어느 시각에? 어떤 암호를 사용할 것인가?
        • 궁녀, 내관, 호위 무사들 중 누구를 포섭했으며, 누가 중립인가?
      • 명분 설정과 여론 조작:
        • 거사 직후 발표할 교서는 누가 미리 써둘 것인가?
        • 정변의 목적을 ‘국가를 위한 정통성 회복’으로 포장하기 위한 문구는?
        •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민심을 진정시킬 논리는?

      이 모든 것은 계획에서 끝나지 않고, 각 지점에 적절한 인물이 배치되고 협조가 연결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실행 가능한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필요한 건 ‘결정자’가 아닌 ‘연결자’였다

      정변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종종 결정자라기보다,
      각 구조의 정보를 연결하고, 서로 다른 집단을 조율한 무명의 연결자들이었습니다.

      • 무기고 관리를 맡은 하급 군관
      • 금군 내 경비 교대를 조작한 숙직 책임자
      • 병조 내 서고에서 명단을 유출하지 않도록 문서를 통제한 관리
      • 거사 하루 전 내금위 병력의 숙소를 바꾼 담당 서리

      이들은 지시를 받은 게 아니라, 위험을 무릅쓰고 ‘정변의 톱니바퀴’를 맞물리게 만든 실질 조정자였습니다.

      그들이 한 일은 명백한 설계이자 실행이었지만,
      공신의 이름 뒤에 감춰진 비공식적 성취로만 남았습니다.

      아무리 큰 칼이라도, 잠긴 문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반정의 성공은 거대한 병력보다도,
      궁궐의 어느 문이 어느 시각에 열렸는가,
      누가 그 문을 열게 설득했는가,
      기록 담당자는 왜 보고를 지연시켰는가 같은 ‘작은 고리’들에 의해 결정됩니다.

      • 인조반정 때 사직단(社稷壇) 앞 병력 배치가 사전에 변경된 덕에,
        반정군이 저항 없이 도성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습니다.
      • 중종반정 당일, 명나라 사신단이 머무는 객관 근처에서 일부 병력이 의도적으로 해산되어, 외교 충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절대 한두 줄짜리 명령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전에 수십 차례의 조율, 설득, 은밀한 약속, 비공식 명령 체계가 작동한 결과였습니다.

      정리하자면:

      정변은 한두 명의 결단이나 간단한 명령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왕조 시스템을 다시 설계하고 뒤집기 위한 조직적 연합, 다층적 협력, 정밀한 설계의 결과였습니다.

      공신은 전면에 나섰고,
      기록자는 그들을 남겼지만,
      그 성공을 가능하게 한 건 수많은 무명 실무자들의 사전 작업과 현장 실행이었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들이 아니었다면 반정은 시작조차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2. 공신록에는 정치적 이름만 오른다

      – 진짜 공로자보다 권력의 동맹이 중요했던 명단

      조선왕조실록이나 《○○반정 공신록》을 펼치면, 반정을 주도한 인물들의 이름이 공훈 순서에 따라 길게 나열됩니다.
      중종반정의 박원종, 성희안, 홍경주, 인조반정의 김류, 이귀, 이서 등이 대표적입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정변의 주역은 곧 이들이다”라고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공신록에 오른 이름들은 전장에서 가장 앞에 섰거나, 거사의 실행을 주도한 자들이 아니라, 새로운 권력 구조에 가장 ‘필요한 자들’**이었습니다.

      공신은 ‘기여도’보다 ‘정치적 유용성’으로 결정됐다

      공신록은 마치 영웅 명단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권력 재편 과정에서 필요한 인물을 공적으로 포장하는 정치적 도구였습니다.

      공신 선정 기준에는 다음과 같은 정치적 요소가 작동했습니다:

      • 새 왕의 즉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문벌 귀족인지
      • 반정 세력 간 균형을 맞추기 위해 포함되어야 할 가문인지
      • 정치적 연줄이 있는 종친, 대신들과의 관계
      • 새로운 정권 아래 장기적으로 충성할 만한 인물인지

      즉, 공신 책봉은 공로의 크기가 아니라,
      왕권의 안정성과 권력 분배 전략에 따라 정해진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실질적으로 병력을 이끈 장교,
      반대 세력을 제거한 실무자,
      정보전을 기획한 설계자들은 명단에서 빠지기 일쑤였습니다.

      사례 1: 인조반정 – 병권을 쥔 군관은 빠지고, 정치 귀족은 남았다

      인조반정 당시, 실제 병력을 동원하고 궁궐 문을 장악한 주역은 당시 훈련도감 소속의 중·하급 장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작전의 실행을 맡고, 내통한 문지기들과 직접 접촉하며, 반정군을 도성으로 진입시키는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공신록에는 그들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고,
      왕족의 측근, 서인 계열의 고위 문신들이 대부분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 결과,
      정변을 실제로 '몸으로' 성공시킨 이들은 아무런 포상도 받지 못한 채 기존의 직위에 머물거나, 이후 정국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사례 2: 중종반정 – 궁궐 내부 협력자는 사라지고, 문벌 가문이 올라섰다

      중종반정은 외부에서 무력을 동원하여 단행된 사건이 아니라,
      궁궐 내부와 외부 세력의 철저한 내통과 조율을 통해 진행된 쿠데타였습니다.
      궁녀, 내관, 문서 관리직 등 ‘궁중 정보의 키’를 쥔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공신록은 모두 사대부 중심으로 채워졌고,
      궁중 실무를 담당한 하급 관료나 여성들은 그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행동이 공식적으로 증거로 남을 경우 오히려 숙청 대상이 될 수 있었기에,
      그들은 일부러 기록되지 않았고, 누군가에 의해 ‘지워지기도’ 했습니다.

      공신록은 보상 명단이 아니라, 정치 명부였다

      조선 시대의 공신록은 ‘공로자의 보상’이라는 명분 아래 운영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새로운 권력이 자기 세력을 제도화하는 수단이었습니다.

      • 공신으로 책봉된 자들은 작위와 토지, 벼슬을 받으며,
        향후 정권 유지에 필수적인 핵심 세력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반면,

      • 그 누구보다 몸을 던졌던 실무자들,
      • 정변의 성패를 가른 일선 실행자들,
      • 군사적 판단을 직접 내린 참모형 인물들은

      기록에서 빠지거나, 애매한 표현으로 처리되었고,
      공신의 영예는커녕 생존을 보장받기도 어려운 처지에 놓였습니다.

      공신록은 ‘누가 싸웠는가’가 아니라, ‘누가 필요했는가’를 보여준다

      조선의 공신록은 일종의 정권 청사진입니다.
      누구와 정치를 할 것인지, 어느 가문과 연대할 것인지, 어떤 정치 구도를 만들 것인지를
      이름으로 보여주는 정치적 선언이자, 새로운 시대의 연출 명단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공신록만으로는
      역사의 전장에 실제로 있었던 사람들, 정변의 엔진이 되었던 손발들, 기획과 실행을 조율한 인물들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이면에서, 공신 명단에 오르지 못한 수많은 인물들이 어떤 이유로 누락되었는지를 추적하는 일이,
      정변의 진짜 구조를 이해하는 첫걸음이 됩니다.

      3. 실록에 남지 못한 이유 – 정통성의 '위험 요소'였기 때문이다

      – 왕조의 기록은, 왕조의 체면을 위해 지워야 할 이름도 선택했다

      조선은 철저히 정통성과 명분에 기반한 유교국가였습니다.
      그만큼 ‘왕이 되는 것’은 단순히 권력의 이동이 아니라,
      하늘의 뜻(天命)을 받은 군주로서의 도덕적, 정치적 정당성을 반드시 갖추어야 했습니다.
      문제는, 그 왕의 즉위가 ‘반정(反正)’, 즉 피를 수반한 정변에 의해 이루어졌을 경우입니다.

      즉위의 과정이 폭력과 암살, 숙청, 음모 등을 동반했을 경우,
      새로운 왕은 실록 속에서 마땅히 정의롭고 도덕적인 군주로 탄생해야 했기 때문에,
      그 과정에 개입한 ‘위험 요소들’은 역사 기록에서 은폐되거나 축소되거나, 아예 지워졌던 것입니다.

      실록의 원칙은 기록이 아니라, 질서를 위한 ‘편집’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왕조의 존속과 왕권의 정당성을 보호하기 위한 기록 시스템이었습니다.

      • **사관(史官)**은 항상 임금 곁에서 관찰하되,
        실록 초고(사초)는 왕도 볼 수 없는 철저한 비밀 기록으로 유지되었고,
      • 실록 편찬 시점에서는 해당 왕의 사망 이후,
        다시 사초를 정리하며 편집 및 정제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이때 정권을 창출한 정변의 내막이 너무 노골적이거나 잔인하거나, 명분을 해치는 요소일 경우,
      사관들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서술을 조정합니다:

      • “모사 중 누군가가 진언하였다” → 익명 처리
      • “성상께서 뜻을 모아 과단성 있게 결단하셨다” → 왕의 주도성 강조
      • “전하를 추대할 움직임이 자연스레 일어났다” → 자발적 민심 왜곡

      이러한 기술 방식은 실록을 통해 왕조의 ‘체면과 명분’을 만드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반정의 실무자 = 왕권을 흔들 수 있는 존재

      정변의 성공은 종종 단 한 명의 결단이 아니라,
      수많은 실무자와 기획자의 손과 입에 의해 완성된 정치적 작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보이지 않는 권력 설계자’의 존재는 새 임금에게는 매우 위험한 존재였습니다.

      왜냐하면:

      • 그들이 새 임금을 왕으로 만든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 정권이 안정되기 전까지, 이들의 입 하나, 문장 하나가 왕위 정당성의 치명적 약점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새 임금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전략을 사용했습니다:

      1. 실무자들을 숙청하거나, 소외시킨다
      2. 공신 책봉은 하되, 실록에서는 역할을 축소하거나 삭제한다

      이것이 실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떤 이가 모종의 일을 주도했다” “한 인물이 군졸과 함께 성문을 넘었다”
      와 같은 흐릿한 서술 방식의 본질적 이유입니다.

      기록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존재해서 지운 것이다

      ‘기록되지 않았다’는 표현은 마치 우연한 누락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철저히 정치적 판단명분 조율의 결과물이었습니다.

      • 중종반정 당시 궁궐 내부에서 문을 열고 반정군을 인도한 내관의 이름은 끝내 실록에 실리지 않았습니다.
        → 이유: 내시의 반역 협조는 유교적 명분상 ‘도덕적 타락’이기 때문.
      • 인조반정의 경우, 거사 전날 야조를 맡은 금군 장교가 군 진형을 고의로 재배치했지만,
        그 사건은 “궁성 내부 병력에 혼선이 있었다”로 처리됩니다.
        → 이유: 병력이 쉽게 무너졌다는 기록은 반정의 ‘대의’를 훼손하기 때문.

      결국 실록은 말하지 않습니다.
      말하면 위험하니까.
      그리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새로운 질서를 보호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실록은 정변의 '기억'이 아니라, 정권의 '설명서'였다

      우리가 실록에서 찾을 수 없는 수많은 이름, 수많은 손발의 기록은
      그들이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가 정치적으로 ‘지워져야만 했던 기억’**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실록은 단순한 연대기가 아니라,
      정권이 새로 태어나는 순간의 공식 시나리오였고,
      그 시나리오에 맞지 않는 인물과 사건은 삭제, 축소, 왜곡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 “왜 그 인물의 이름은 사라졌는가?”
      • “기록되지 않은 그 사람은, 실제로 어떤 역할을 했는가?”
      • “정치의 뒷면에 있던 기억은, 어떤 방식으로 ‘삭제’되었는가?”

      이 질문에서부터 비로소 우리는
      조선이라는 체제가 남기지 못한 또 하나의 진짜 역사에 다가가게 됩니다.

      4. 그럼에도 남은 흔적 – ‘누군가 했다’는 문장들

      – 기록되지 않았지만, 지워지지도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정사(正史)에는 특유의 문장들이 종종 반복됩니다.
      예를 들어:

      • “모처에서 누군가 거사를 알렸다.”
      • “군영의 병졸이 문을 열었다.”
      • “당일 궁궐로 향한 무리가 있었으나, 그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 “어떤 자가 군사들의 움직임을 조율하였다.”

      이 짧은 문장들은, 단지 기록자가 모호하게 기술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명확해서, 너무 위험해서 실명을 기록할 수 없었던 문장들입니다.

      익명 서술은 ‘지우기’가 아니라 ‘간접 남기기’였다

      실록 편찬에 참여한 사관과 편찬관은, 역사와 정치를 동시에 고려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왕의 눈치를 보기도 했지만, **역사 기록자로서의 ‘양심’**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이름은 지우되, 사건은 남기는 방식으로 사태를 정리한 것입니다.

      대표적 서술 방식:

      • “모신이 암암리에 계획을 도왔다.”
        → 신분이 낮거나 정치적으로 민감한 인물.
      • “성문이 누군가에 의해 열렸다.”
        → 거사의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내통 인물.
      • “군졸들이 자연스레 그리로 향했다.”
        → 사전 조율된 움직임을 우연처럼 포장.

      이런 문장들은 **의도적 누락이자, 역사에 남기기 위한 최소한의 ‘문장의 생존 방식’**이었습니다.

      이름은 없지만, 행동의 구조는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중종반정 당시 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밤이 깊어 성문이 열렸고, 병력은 소리 없이 궁 안으로 들었다.
      그 경로를 누가 인도하였는지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실제로는,
      해당 병력은 내금위 병사들과 내관의 협조로 입궐하였고,
      그 과정은 사전에 시간까지 조율된 정밀 작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실록은 '누군가'라는 말로 연결된 행동 구조만 남겨둔 채,
      그 이름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문장의 배열, 맥락, 시간 순서를 보면
      그 ‘누군가’가 구체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었고, 어떤 권한을 가졌으며, 무엇을 했는지
      역사 연구자나 독자는 추론할 수 있게 됩니다.

      실명보다 더 많은 걸 말해주는 익명의 문장들

      ‘누군가 했다’는 말은 단순한 회피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역사가 기억하려 애쓴 마지막 표현이자, 누락을 인정하는 방식입니다.

      • “병조의 명령이 없었음에도 군졸이 움직였다.”
        → 누군가 비공식 명령을 내렸다는 것.
      • “교서가 준비된 듯 반정 직후 반포되었다.”
        → 사전 기획이 있었으며, 집필자가 존재했다는 것.
      • “거사 당일 일부 병력의 무장이 달랐다.”
        → 병기고가 이미 열려 있었고, 누군가 공급했다는 것.

      이처럼 **익명의 묘사는 역사적 공백이 아니라, ‘의도적 공백’**입니다.
      그 공백은 독자와 후대가 스스로 질문을 품고, 해석하며, 복원하도록 유도하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지워진 이름이 남긴 ‘말의 흔적’을 읽는 일이 역사다

      역사는 말해진 것만으로 쓰이지 않습니다.
      말하지 못한 것, 말하지 않은 것, 그리고 말하지 않기로 결정된 것까지 함께 읽을 때
      비로소 그 시대의 권력 구조와 정보 흐름, 그리고 실질적 행동의 주체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누군가 했다’는 문장은:

      • 위험하다는 이유로 지워진 이름을 대신하고,
      • 실명을 남기지 못한 실무자의 공로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며,
      • 역사 서술자의 고뇌와 선택을 담은 유의미한 흔적입니다.

      그리고 그 문장 하나하나를 복기하고 해석하는 작업이야말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 없는 역사의 진실에 가까워지는 첫 걸음입니다.

      결론: 기록되지 않았기에 더 기억해야 할 이들

      공신록에 오르지 않았다고 해서,
      실록에 이름이 없다고 해서,
      그들이 조선의 질서를 바꾸는 데 기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전선에서, 더 큰 위험을 감수하고 더 치밀한 계획을 세운 조선 정치사의 엔지니어들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름이 사라진 이유를 질문하고,
      흔적이 묻힌 문장을 다시 읽고,
      “역사를 만든 실체는 누구였는가”라는 질문을 복원하는 것입니다.